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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24화)
7장 철검성 (3)


“그, 그럼 대체 얼마나?”
“칠 주야에 한 냥씩은 어때? 제값으로 치면 너무 오래 달고 다녀야 하니까 그 정도면 많이 봐준 것 같은데.”
노상은 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백스물여섯 날하고도 사흘하고도 하루 반 더.
“그건…… 그것도 역시 너무합니다.”
양유는 하는 것을 봐서 빨리 보내주든지 말든지 하겠다고 했다.
총관이 걸음을 멈췄다.
영빈관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입니다.”
총관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갔다.
영빈관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맞았다.
총관은 양유와 노상에게 각각 방을 내주었는데, 무척 넓으면서도 고급스러웠으며 총관이 말하기를 진객(珍客)의 편의를 위해 방마다 시비(侍婢)가 한 명씩 배치되어 있다고 했다.
손바닥만 치면 알아서 다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럼, 편히 쉬시길.”
총관은 정중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양유는 돌려받은 검을 아무 데나 던져 놓고 침상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묵었던 객잔의 침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양유의 전신을 감싸왔다.
양유는 그러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너는 왜 계속 거기 있지?”
방 한쪽에 어린 소녀가 다소곳이 시립(侍立)하고 자기만 쳐다보고 있으니 무척 거슬렸다.
“시키실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언제라도 명을 듣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그럼 잠은 안 자?”
여자아이는 무척 당황해 했다.
이런 것을 묻는 사람은 양유가 처음이었다.
“귀빈께서 주무시면 저도 잘 수 있죠.”
“아침에는?”
“제가 먼저 일어납니다.”
“그래? 그럼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겠네. 아마 내가 더 빨리 일어날걸?”
백암산에서 칠 년을 살면서 잠이 엄청 줄었다.
양유는 자신이 있었다.
시비는 이 인간이 농담을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운 듯했다.
“진짜야, 내일 인시말(寅時末)에 일어날 테니까 각오하라고.”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시비와 얘기나 하면서 놀다가 노상과 저녁을 먹었다.
술도 있다기에 노상하고 대작(對酌)하며 축시초(丑時初)까지 퍼마셨다.
그리고 양유는 정말로 인시말에 일어났는데 시비는 아직 자는지 방에 오지 않았다.
양유가 고작 시비나 놀려 먹자고 이 새벽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습관, 아니, 그보다는 강박감에 더 가까운 무언가가 매일 아침 양유를 깨우는 탓이다.
광억은 그것을 각뇌의 부름이라 일컬었다.
양유가 먹고 놀고 돌아다니고 하는 동안에도 습득저장된 기억은 무의식 속에서 분해되고 해석되며 이해된다.
이러한 과정은 잠을 자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이때 각뇌는 더 고도의 작용을 한다.
낮 동안은 낱낱의 분석 작업을 수행했다면, 밤은 통합과 재해석의 시간이다.
두뇌가 가진 정보 내에서, 가능한 최선의 해답이 이 시기에 도출되며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렇기에 한 번 눈을 떠 버리면 다시 침상으로 기어들어 갈 수가 없다.
밤사이 자신의 이해 수준이 자신을 앞서 버린 것이다.
체득을 통해 다시 균형을 맞춰줘야 했다.
자신과의 싸움, 각뇌와의 경쟁.
광억은 이 틀만 잡아 주었을 뿐이었다.
궤도에 오르자 양유는 도무지 무공을 수련하지 않고는 못 배겨 알아서 검을 휘두르게 되었다.
지금도 양유는 깨어나자마자 가부좌를 틀고 백위신공을 운용했다.
기맥을 타고 백위신공의 기운이 흘렀다.
양유는 극양(極陽)의 성질을 끌어냈다.
한낮의 찌는 더위, 모락모락 차오르는 후끈한 아지랑이, 백위신공의 양(陽)적 면모이다.
내공은 숨 막히게 뜨거운 뙤약볕처럼 양유의 전신을 돌아다녔다.
내기가 일주천(一周天)을 하자 혈관에 들러붙어 있던 취기(取氣)가 양기(陽氣)를 못 이기고 증발해 버렸다.
양유는 상쾌한 기분으로 운기(運氣)를 계속했다.
백위신공 기공편은 백위의 내공을 축기(築氣)하고, 기맥을 따라 내력을 운행하는 기초적인 수준에서 더 나아가 내공 자체로 실전에 활용할 수 있는 경지를 다루고 있었다.
백위신공의 유온(柔溫)한 성질을 극양으로도 한음(寒陰)하게도 자유자재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중 한 갈래였다.
양유는 이어 한음의 성질을 끌어냈다.
쨍쨍 따가웠던 기운이 점차로 식어 가며 결국에는 차가워졌다.
더위 먹어 풀어졌던 기맥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양기에서 음기로의 전환.
이것은 중원무림의 상식을 벗어났다.
종종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동시에 수련하는 얼빠진 놈들은 있다.
그들은 광인이 되거나 주화입마에 걸려 죽거나 해서 곧 무림에서 보이지 않게 되지만, 그런 식으로 음기와 양기를 모두 다루려는 시도가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백위신공 같은 경우는 없었다.
음양이기가 아니라 음양일기(陰陽一氣)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순간, 양유는 눈을 번쩍 떴다.
평소에는 장난기로 가득하지만, 지금만큼은 두 눈에서 정광(晶光)이 감돌았다.
방문 앞에 시비 아이가 서 있었다.
운기조식하는 것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쳤으나 양유가 그것을 알고 맞추어 조식을 마친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엿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곧장 나가려고 했습니다.”
시비는 달달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양유는 의아해서 물었다.
“내 벗은 몸을 본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황송해하고 그래?”
그 말투에 어떤 화난 기색도 담기지 않았으나 시비는 양유가 고차원적인 질책을 하는 것으로 여겼다.
수련하는 것을 염탐하는 행위는 무림의 금기인 것이다.
양유가 뭐라 말하건 전부 반어법으로 알아들으며 그저 빌기만 했다.
“거참, 어디서 이렇게 교육을 잘했는지 궁금하군.”
자기가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며 자신의 언행일치함을 알리며 놀려 주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오히려 달래 줘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양유는 시비를 겨우 진정시켜 내보냈다.
그리고는 아침나절 내내 백위신공을 운공하며 지행의 간격을 좁혀 나갔다.

정오 무렵, 군하경이 방문했다.
여전히 뒤에 여중년인을 달고 있었다.
“편히 쉬셨어요?”
“그럭저럭 괜찮았어. 침상은 편하고 식사도 훌륭하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군하경 혼자 왔다면 모르겠으나 여중년인이 따르니 무슨 목적을 지니고 행차한 것일 테다. 양유는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실은 오늘 또 용봉회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용봉들이 양 오라버니를 초청했으면 하기에 제가 이렇게 모시러 왔죠.”
“내가 꼭 가야 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으시잖아요.”
그건 그랬다.
방에 처박혀 있느니 그 사람들하고 노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양유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요?”
노상은 양유와 권커니 잣커니 하다 주량을 넘도록 마셔서 아직도 뻗어 자고 있었다.
시비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군하경은 고소를 지었다.
노상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용봉들이 노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상이 자리의 격을 확 떨어뜨리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것은 노상도 인정할 것이다.

둘, 그리고 뒤따르는 꼬리 하나는 철검성을 나와 덕화가를 걸었다.
이번에도 초청루에서 모이나 했더니 그렇지는 않았고 군하경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평범한 객잔이었다.
오늘 용봉회는 즉흥적으로 열렸으니 어제처럼 추종자들이 미리 알고 대기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군하경은 지나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목뿐 아니라 사람 자체를 끌어 버린다.
행인들이 행로를 바꾸어 슬금슬금 뒤따라왔고 곧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상당한 수의 군중이 객잔 앞에 모였다.
그렇지만, 가까이 접근한다거나 한목소리로 군하경의 이름을 부른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일단 극성 추종자들은 대부분 양유에 의해 어느 한 군데가 잘못되어 집에서 정양하고 있었고 이곳에는 어제 양유의 무서움을 겪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방해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용봉들은 대부분 먼저 와 있었다.
군하경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했다.
양유는 가볍게 묵례하는 정도로 그쳤다.
남궁상진은 좀 호들갑스럽다 싶을 정도로 화답했고 석상현도 양 형 잘 오셨다고 맞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 초영하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워요.”
초영하는 어제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쥐어짜 내듯 말했으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이는 초영하의 변덕이라기보다는 양유의 변모에 의한 바가 컸다.
오래간만에 깨끗이 씻고 시비의 도움을 받아 머리도 잘 빗고 영빈관에 비치되어 있던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사람이 달라 보였다.
백위신공의 정명한 내공 덕에 얼굴에 정기가 감돌아 원래 좀 신비스러운 느낌이 든다.
거기에 깔끔함까지 더해지니 인물이 살아났다.
“환대해 주시니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저(小姐).”
양유는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장난스럽게 답했다.
군하경이 전음으로 왜 그런 식으로밖에 못하냐고 답답해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루 사이에 풍류공자가 되겠는가?
입에 기름칠하는 것은 양유하고는 맞지 않았다.
군하경과 양유가 자리에 앉고 조금 있으니 사공복과 황보진천이 왔다.
초일화를 제외하고는 이번 정주회합에 참석한 용봉들은 다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초일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초일화였어도 어제 그렇게 개쪽을 당했으면 부끄러워서 잠적해 있을 것이다.
용봉들은 점소이를 불러 이것저것 음식을 시켰다.
초청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면이나 만두, 오리고기, 싸구려 죽엽청(竹葉靑) 등을 주문했다.
양유는 용봉들이 왜 이런 허름한 곳에 모여서 저질의 음식을 먹으려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절약 정신이 생기기라도 했나?
그런데 가만 보니 이들은 이런 객잔은 처음인 듯했다.
낡아빠진 실내 장식, 파리가 날아다닐 정도의 위생 상태, 이런 것들을 보며 문화 충격을 겪고 있었다.
일종의 일반 백성 체험을 하러 온 모양인데, 뭘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다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