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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23화)
7장 철검성 (2)


여중년인은 양유를 흘끗 보았다.
매화실에서도, 오는 동안에도 내내 불신을 가득 담아 양유를 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군하경과 보통 관계가 아닌 듯한데, 전혀 본 바도 들은 바도 없으니 너무나도 수상했다.
그리고 군하경을 꼬드겨 철검성주까지 만나려 하는 것이다.
이건 막아야 했다.
여중년인의 주 임무는 군하경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군하경이 계속 깨끗한 난꽃으로 남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신경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나이 든 여고수의 활용 가치는 이런 데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님도 양 오라버니를 만나면 반가워하실걸요.”
양유는 내기가 생각나 노상을 보았다.
그러나 노상은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마차 밖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여중년인이 알려 주는 대로 마부가 방향을 잡았다.
일행은 곧 무장각 앞에 당도했다.
마차에서 내렸다.
무림을 경영하는 삼십삼존, 그리고 무림인의 정점에 선 십대고수, 그 두 위치에 모두 올라 있는 사람은 일곱 명에 불과하다.
군유현은 바로 그 칠인 중의 일인! 모래알처럼 많은 무림인 가운데서 빛나는 북두칠성과 같았다.
그런 군유현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무장각은 육 층 높이나 되었다.
그 주위는 무사들로 물샐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전 처소에 먼저 가 있겠습니다.”
“그게 낫겠네요.”
군하경이 허락하자 여중년인은 짧게 읍(揖)을 하곤 뒤돌아 가 버렸다.
군하경이 앞장을 섰다.
입구에서 무사들이 제지했으나 군하경임을 알고 일제히 포권했다.
“성주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책임자인 듯한 무사가 물었다.
군하경은 그렇다고 했다.
“뒤의 분들은?”
“같이 가려고 하는데요, 안 되나요?”
군하경은 슬픈 듯이 물었다.
경비무사는 차마 안 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두 놈 다 정체불명의 놈들이나 성주 가족은 어디라도 출입할 수 있었으니 동행하는 이상 상관없을 것 같기도 했다.
“안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기는 주셔야 합니다.”
양유는 검을 끌러 건넸고 노상은 가지고 다니던 단검과 아미자(峨嵋刺), 표창 등을 꺼냈다.
무사가 거두어 가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무기는 삼류나 쓰는 것이 아닌가?
아니, 곳곳에 녹이 슬고 예리함이라고는 없어서 삼류도 안 쓸 것 같다.
경비를 통과하고 셋은 무장각으로 들어갔다.
군유현의 집무실은 이 층에 있었다.
군하경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소녀, 하경입니다.”
“들어오너라.”
집무실은 엄청나게 넓었다.
군유현이 앉아 있는 모습이 저 멀리에 보였다.
그만큼 거리가 있었는데도 양유가 들어오자 군유현은 한번에 알아봤는지 곧장 달려왔다.
“아니, 양 사제가 아닌가?”
군유현은 양유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 덕에 양유는 군유현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창으로 비치는 햇빛 아래에서 정직히 드러나는 군유현의 얼굴은 여전히 헌양했다.
아니, 오 년 전보다 더 젊어진 것도 같았다.
“사형은 여전하십니다.”
“양 사제는 여전하지가 않군. 이젠 무림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겠어.”
양유는 뒤돌아 노상을 보며 히쭉 웃었다.
어떠냐 이 녀석아, 하는 웃음이었다.
들떴던 노상의 마음이 급격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양유의 말이 전부 진실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양유가 보통 무림인은 아니라는 것은 주루에서, 그리고 군하경의 태도를 통해 알았다.
그렇더라도 양유가 했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무장각에 들어와서도 잘해야 군유현을 아는 정도겠지, 하고 생각하고 말 뿐이었는데 이럴 수가?
“정, 정말로 사제지간입니까?”
충격에 휩싸여 군유현이든 군하경이든 양유든 전부를 돌아보며 물었다.
셋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데 왜 사숙이라고 안 하셨는지?”
노상이 군하경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양유가 대답했다.
“쟤는 항상 나하고 맞먹으려 하니까 그랬던 거다. 고작 그 이유 가지고 그렇게 태연자약했던 거야?”
군유현이 물었다.
“그런데, 형제는 누구인가?”
군유현의 눈을 마주하자 노상은 자신이 지금 누구 앞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일개 삼류 무인도 못되는 자신이 철검성주 앞에서 뭘 한 것인가?
노상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납죽 엎드려 절했다.
“소, 소, 소, 소인은 노상이라고 합니다! 죽,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군유현은 친히 노상을 일으켜 주었다.
“사제의 친구라면 나에게도 역시 아우와 같다고 할 수 있네, 그렇게 예를 차릴 것 뭐가 있는가.”
노상의 눈이 자기도 모르게 뜨끈히 젖었다.
철검성을 방문한 것으로도 모자라 철검성주에게 아우 소리를 듣다니 이것은 꿈이 아닐까?
주루에서 용봉들을 만났을 때도 꿈 같았으니 지금은 몽중몽(夢中夢)인가?
장주(莊周)도 울고 갈 법한 심오한 도가적 사유를 하면서 노상은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이 보기에 과히 좋지 않았다.
군유현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집무실 한쪽에 회의(會議)를 위해 둔 긴 탁상이 있었다.
넷은 거기에 둘러앉았다.
군유현이 막 생각난 듯 물었다.
“스승님은 강녕하시고?”
“그럼요, 사부님도 수옥도 사형만큼이나 달라진 게 없죠. 사실 사부님 안부를 묻느니 백암산 소릉폭포(小綾瀑浦)에 아직 물이 흐르는지 궁금해 하는게 더 의미가 있을걸요.”
“하하, 나도 뵐 때마다 회춘하시는 것 같으니 스승님은 세월도 비껴가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하지. 그건 그렇고, 사제가 여기는 어쩐 일인가? 혹, 출도한 것인가?”
양유는 그렇다고 했다.
광억이 가차 없이 내쫓았다고 말하고는 그러면서 심부름을 시켰는데, 자기를 부려 먹으려고 일부러 하산시킨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군유현은 뭐, 같이 스승의 뒷담을 깔 수는 없으니 곤란하다는 듯 웃기만 했다.
양유는 품에서 서신을 꺼내 군유현에게 건넸다.
“이걸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함부로 뜯어 보지 못하도록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양유도 열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군유현이 손톱으로 봉투 윗부분을 죽 그으니 깔끔히 열렸다.
군유현은 편지를 꺼내 읽었다.
군유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종이 아래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다 읽고 군유현은 편지를 도로 집어넣었다.
군유현은 어떻게 정의할 수가 없는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노한 듯 이를 악무는 것이었으나 어찌 보면 온갖 참담함이 전면(全面)을 뒤덮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양유가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기에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군유현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통해 아무것 이상임을 몸소 보여 주고 있었다.
좋던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양유는 할 말도 별로 없는데 군유현도 딴생각을 하는 듯하니 손발이 잘 맞아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노상이야 감히 입을 열 엄두도 못 내었고 하는 수 없이 군하경이 나서 이 얘기 저 얘기 꺼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양유는 이만 일어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고 군유현에게 해야 할 일도 마쳤고 그만 가 보겠다고 말했다.
군유현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양유가 그리 말하자 문득 정신을 차린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내 집에 왔으니 마땅히 내가 대접해야지. 이대로 가 버린다면 가만히 안 둘걸세.”
갑자기 이러는 게 이상하다는 것을 아는지 군유현이 이어 말했다.
“우형(愚兄)이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 그랬네. 오늘은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푹 쉬도록 하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양유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군유현은 종을 쳐 총관을 불렀다.
“예, 성주님.”
총관은 불혹을 갓 넘긴 듯한 중년인이었다.
총관은 문파의 대소사(大小事)나 맡아 처리하는 직책이라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철검성쯤 되면 총관 자리도 피를 튀기는 경쟁이 따른다.
이 총관도 범상치가 않았다.
양유는 공손함 뒤에 숨은 날카로운 기도(氣度)를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손님일세, 영빈관(迎賓館)을 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양, 노는 총관을 따라 무장각을 나왔다.
걸어가면서 양유가 노상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걸었던 판돈이 얼마나 되는가를.
“내가 너한테 받을 은자가 몇 냥이었지?”
“은자라뇨? 은자가 아니라 제 노동력으로 갚기로 한 거였죠. 열여덟 냥분이요.”
“그래, 그거였지. 아니,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어. 은자 반 냥도 걸었잖아?”
“그……랬습니다.”
노상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한 내기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자기 재수가 참 더럽게 없다고 생각되었다.
재수 없게도 하필 강도질하려 한 대상이 무림인이고, 더 재수 없게도 그 무림인은 철검성주의 사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재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
멋도 모르고 무림인을 털려 했는데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그 무림인 덕에 후기지수들과 한자리에 앉아 보았고 철검성주와 마주하기도 했다.
인활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것도 좋지만, 양유와 겪은 것은 진짜 무림, 그것도 초일류 무림인들의 세계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급해야 할 판돈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것으로 느껴졌다.
노상은 패배를 인정하게 되어 은자 반 냥을 꺼내 양유에게 주었다.
그러나 양유는 됐다고 했다.
“준 것을 다시 받기는 그렇고 그건 넣어둬. 열여덟 냥 반으로 계산하면 되지. 그럼 며칠당 은자 한 냥으로 할까?”
양유는 내기에서 승리함으로 인해 노상을 그만큼 부릴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옆에 두고 있어 봐야 도움도 되지 않으나 권한을 방기(放棄)하기는 또 싫었다.
“하루 한 냥은 어떨까요?”
양유는 노상의 머리통을 갈겼다.
“너 은자 한 냥이 얼마나 큰 돈인 줄 알아? 네가 하루 한 냥을 벌었으면 변두리에서 그러고 살진 않았겠지?”
맞는 말이었다.
이 시기 은자의 구매력은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은자 한 냥이면 쌀 두세 석(石)은 살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노상뿐 아니라 인활단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달려들어 온종일 먹어도 쌀이 남는다.
남아도 너무 많이 남아서 그들은 강도질을 그만두고 쌀가게를 차려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