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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22화)
6장 주루에 모인 후기지수들 (5)
관심사가 양유에게로 옮겨 갔다.
“그런데 정주에는 왜 온 거야? 백암산에서는 언제 내려왔고.”
참 빨리도 물어보는 것이다.
양유는 하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고는 군유현에게 용건이 있는데 철검성에 들어갈 수가 없어 널 찾아온 것이라고 목적을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도와줘야지. 나만 믿어.”
믿음이 가지는 않았으나 월담하지 않는 이상 철검성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은 군하경을 등에 업는 것뿐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양유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는데 요 반 시진 내에 있었던 일들, 초일화와 개싸움을 하고, 남궁상진에게서 찬사를 받고, 석상현의 추론을 듣고, 초영하가 자신에게 관심을 표명했었고, 군하경의 가면 벗은 모습을 보았고 했던 것, 이것들이 그 짧은 시간에 다 일어났다 생각하니 그랬고 군하경을 만났으니 광억의 심부름도 거의 마쳤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뭘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올라와서 그렇기도 했다.
7장 철검성 (1)
군하경은 간만에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으니 붙잡고 아무 말이라도 더 하고 싶은 듯했다.
그렇지만 무슨 연인 사이도 아닌데 남녀가 밀실에 오래 있기도 그래서, 적어도 난화봉은 그걸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만 나가기로 했다.
복도에는 여중년인이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었고 노상은 멀찌감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그 꼴이 마치 배변이 급한 유구(乳狗)와도 같았다.
“너 왜 그래?”
양유가 묻자 노상은 말없이 여중년인을 보았다.
노상의 눈에, 없던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양유는 상황을 이해하고 말했다.
“맞을 짓을 했나 보구나.”
“그저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노상은 눈두덩을 어루만지며 무척 억울해했다.
양유가 핀잔을 주었다.
“남의 방명(芳名)을 함부로 알려 하니까 그렇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웬 방명?
그러나 가장 이상스러운 것은 친우를 때렸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양유의 태도였다.
남자들이 다 그렇지만 무림인들은 특히 우정이라는 것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고 있어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뭐니 해서 장렬히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양유는 노상과는 실제로 아무 사이가 아니니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고 노상의 곰 같은 얼굴에 멍이 아로새겨지니 그게 의외로 어울려서 재밌기까지 했다.
“뭐해? 가자. 그리고 그쪽도 어서들 갑시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초청루 주인이 군하경을 맞았다.
웬 미친놈이 침입했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왔는데 어디 몸상한 데가 없느냐고 하며 손을 싹싹 비볐다.
“괜찮아요. 그런데 연회장이 좀 어지러져서 죄송하게 됐어요.”
“죄송하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남제일화 난화봉께서 사용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 초청루의 영광입지요.”
군하경이 철검성주 딸이 아니었더라도 여전히 영광일지 의문이 든다.
난화봉이 인기가 많아 추종자들을 몰고 다니니 그것이 매출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생각할 법도 하나, 여기는 고급 주루이다.
군하경에 목매는 사람들은 술은 싸구려 객잔에 가서 마시는 것이다.
그건 그거고 어쨌거나 지금 군하경은 정주 최고 무벌(武閥)의 수장 딸이다.
비비면 비빌수록 좋았다.
루주(樓主)는 초청루 경비 체계의 총체적 부실 탓에 난화봉과 용봉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 데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하고는 그제야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침입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침입자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군하경이 말했다.
“저희가 격퇴하기는 했으나 발이 빨라 놓치고 말았어요.”
“예예, 죄송합니다. 그 대신, 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성으로 돌아가실 거죠? 그래서 제가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기특한 생각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인 것 같았다.
이대로 나가면 한 떼의 추종자 무리에게 시달릴 것이 뻔했다.
내심 반가워하는 군하경의 속내를 양유는 읽어 낼 수 있었다.
“옆의 분들은?”
“다 같이 갈 거예요.”
“그럼 이쪽으로.”
일행은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차 앞에는 세 마리 말이 묶여 있었다.
모두 덩치가 크고 털에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말들이 끌고 있는 마차도 상당한 고급품으로 보였다.
양유가 돈 많아서 좋겠다는 듯이 쳐다보자 루주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요놈들 먹이값만 해도 은자가 쏙쏙 빠져나가서 감당이 안 될 정도입니다.”
저런 되지도 않는 앓는 소리를 하는 게 겸양이 아니라 염장이라는 걸 알고 그러는 것일까 모르고 그러는 것일까?
양유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군하경과 여중년인이 마차에 탑승했다.
양유, 노상도 올라갔다.
루주가 일행을 배웅했다.
“그럼 언제든지 또 방문해 주십시오. 출발해!”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따그닥 따그닥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나며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초청루 앞은 여전히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군하경이 언제 나오나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군하경에 눈이 멀었어도 진짜 장님인 것은 아니라서 마차가 지나가자 모두 길을 비켰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상식적인 생각을 해냈다.
저 안에 난화봉이 있을 것이다.
루주이거나 난화봉이거나일 텐데 루주가 갑자기 수줍음이 엄청 생겨서 마차 창문을 꼭꼭 닫았겠는가?
난화봉이 틀림없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 다들 마차로 우르르 몰려왔다.
당황한 마부는 속도를 높이려 했으나 여긴 가도(街道)가 아니라 길 위에 사람도 있고 수레도 있고 가판대도 있고 그랬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참사가 벌어진다.
도저히 채찍을 갈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추종자들이 마차를 둘러쌌다.
추종자들은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 낼 대담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다수의 힘이다.
겁대가리가 머릿수만큼 분산되고 괜히 자기 위세가 높아진 듯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추종자임을 의식하는 것도 한몫했다.
우리가 그대를 좋아하니 설마 당신이 우리를 싫어하겠는가?
단체적으로 이런 심리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군하경은 하는 수 없이 창문을 내렸다.
군하경의 옆모습이 드러나자 뭇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창문 근처로 모여들어 한목소리로 외쳤다.
“난화봉! 난화봉! 애모(愛慕), 사모(思慕), 흠모(欽慕) 난화봉!”
저건 대체 뭐하는 짓들인가? 양유는 어처구니가 없어 군하경을 보았다.
“너 저 사람들한테 은자라도 퍼 줬냐? 아니면 뭐 일일이 목숨을 구해 주기라도 했어?”
이 정도면 거의 집단 광기 수준 아닌가.
군하경이 전음을 보냈다.
-나도 몰라. 정주의 할 일 없는 인간들이 날 쫓아다니는 모임을 만들었다던데 그 뒤로부터 내가 나타나는 곳마다 저 지랄이야.
창문 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서 더 잘 띄었는데, 바로 장인이었다.
같이 다니던 사람들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난화봉을 연호(連呼)하면서.
양유는 슬슬 이성의 끈이 마모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저들이 꼴 뵈기 싫어서인지, 군하경의 심정이 이해되었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소음이 거슬려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양유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우선 장인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장인이 버둥거리자 아무 데나 던졌다.
보통 사람인 이상, 자기 무게 그대로 바닥과 마주하면 일시적으로 불능 상태가 된다.
양유는 이제는 두 놈씩 잡아다 패대기쳤다.
“왜, 왜 이러는 거요?”
무리는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덕화가 사람들은 무림인을 하도 많이 보니 무림인에 무덤덤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림인의 무서움을 더 잘 알게 되었다.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뿔뿔이 흩어졌다.
“왜냐고? 그걸 나한테 묻기 전에 너희 스스로 생각해 봐라.”
한 일곱 놈 던졌나 싶은데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사라져 있었다.
양유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차에 탔다.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덕화가에서 철검성까지는 걸어서 가도 산책하는 정도밖에는 안 된다.
말이 속력을 내니 어느덧 철검성 정문에 와 있었다.
마부가 마차 안쪽을 향해 물었다.
“어디로 들어가야 합니까?”
여중년인이 가장 오른쪽의 넓은 통로로 가라고 일렀다.
성주 가족이니 이 통로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지기가 앞을 막았으나 군하경이 얼굴을 비추니 황급히 비켜 주었다.
양유는 좀 허무해졌다.
이 정도로 자유 통과일 줄은 몰랐다.
저번 왔을 때의 문지기를 다시 만나서 나 이런 사람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은 유치한 보복심리가 있었는데, 통로가 달라 그런지 딴 사람이었고 군하경이 탄 마차라는 것을 알자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도 안 하는 것이었다.
마차는 철검성 내부를 달렸다.
바깥 거리와는 달리 이 안은 포석이 잘 깔렸고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없어서 말은 신나게 질주했다.
성내에 들어오고부터 노상은 감격스러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창밖으로 노상이 동경하는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
수없이 늘어선 전각(殿閣), 광활한 연무장(練武場)과 기골이 장대한 무사들, 성 전역에서 무혼(武魂)이 살아 숨쉬며 일렁이는 듯했다.
양유는 너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건물과 사람들을 보면서 왜 그렇게 감동하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불쌍해서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아무도 마부에게 가야 할 곳을 알려 주지 않았기에 마차는 아무 데로나 가고 있었다.
멈춰 서면 될 텐데 이러는 것을 보면, 마부도 노상과 같은 심정인 듯했다.
“아버님을 뵈어야 한다면서요. 무장각(武奬閣)으로 가지요.”
지금껏 가만히 있던 여중년인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가씨, 외부인을 초대하는 것은 아가씨의 자유이지만 무장각에 간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