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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21화)
6장 주루에 모인 후기지수들 (4)
석상현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러면 어떠한 상황인지 말해 줄 수는 있겠소?”
양유는 굳이 밝힐 필요를 못 느껴서 고개를 저었다.
석상현은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고는 나가 버렸다.
양유는 뭔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얼굴로 군하경을 보았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원래 그래요. 괜히 무림박사(武林博士) 석상현이 아니죠.”
맑고 청아한 음성으로, 석상현을 끝으로 용봉들은 모두 나간 줄 알았는데 연회실 한구석에 초영하가 서 있었다.
초영하는 양유 앞으로 와서 말했다.
“무공보다도 무림 그 자체에 빠진 사람이에요. 석씨세가의 골칫거리죠. 백 년 내 무림에서 명멸했던 인물들과 그 무공, 각종 사건이 모조리 자기 머리에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봐서는 분명 천재는 맞는 것 같은데 영 쓸모없는 분야의 천재죠.”
초영하는 말하는 내내 양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양유도 눈을 피하지는 않아서 초영하의 외면(外面)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초일화가 남자답게 잘생겼다면 초영하는 여성미가 물씬 풍겼다.
십전완미(十全完美)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한 오전미인(五全美人)이나 육전미인(六全美人)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랬군요.”
방향(芳香)이 코끝을 간질였다.
초영하가 더 가까이 온 것이다.
양유는 뒤로 피해 그만큼의 거리를 다시 벌렸다.
양유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초영하에게는 거절당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초영하는 안색을 유지한 채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양 소협(小俠)에게 망신을 당했는데 제가 소협에게 이러는 게 이상하죠? 하지만, 오라버니는 그래도 싸요. 언젠가 쓴맛을 볼 날이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맙고 그 때문에 양 소협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너무나 과감한 고백에 보고 있던 노상이 남사스러워서 죽으려 했다.
초영하도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양유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남매간(男妹間)에 사이가 좋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긴 하죠.”
애정사를 가정사로 전환시키는 황당한 짓을 양유는 저지르고 있었다.
어색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초영하는 할 말은 다 했다고 하며 가 버렸다.
군하경이 소감을 말했다.
“오라버니는 정말 여자 마음을 모르는군요! 거기서 그런 말이 왜 나와요?”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그리고 내가 여자 마음을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이지.”
군하경은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는 듯했다.
초영하 얘기는 더 하지 않고 노상에게 물었다.
“잠시 양 오라버니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노상이 어찌 싫다고 하겠는가?
아까부터 군하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고 장인처럼 선녀라고 생각하는 차에 사근사근 부탁해 오니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매화실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아직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양유를 환대해 주었던 여중년인이었다.
용봉들은 다 갔는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군하경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군하경은 여중년인에게 말했다.
“정 대고(大姑), 대고도 자리를 피해 주면 좋겠어요.”
“하지만…….”
여중년인은 양유가 군하경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으로 생각하는지 머뭇머뭇하며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하경의 의지가 뚜렷하니 하는 수 없이 나갔다.
별별 사건을 다 거치고 나서야 이렇게 군하경과 독대하게 되었고 양유는 내내 품었던 의문을 해결하려고 입을 여는데, 군하경이 눈을 빛내며 먼저 얘기했다.
“아, 진짜 정말 정말 반가워. 아무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어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
갑자기 군하경은 딴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일단 말투부터가 달라졌고 온화하고 품위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껄렁껄렁했으며 별빛처럼 청초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어떤 교활함 같은 것이 두 눈동자에 담긴 듯 보였다.
양유가 물었다.
“이미 미친 거 아냐?”
군하경은 화내지 않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다.
난화봉 군하경으로 살기가 진저리나 돌아 버릴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양유는 군하경이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거나 무슨 귀신에라도 씐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군하경이 진짜이고 난화봉은 위장인 것이다.
“하긴, 넌 어릴 때부터 낯이 두꺼워서 연기를 잘했지. 그래도 그렇지 너라는 인간 자체를 거짓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멍청한 짓인 것 같은데.”
양유의 신랄한 비판에도 군하경은 잠잠히 있었다.
자신을 난화봉이 아닌 군하경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양유밖에 없는 것이다.
오 년의 공백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군하경이 입을 열었다.
“나라고 남들 속이며 살고 싶었겠어?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란 말야.”
그 음성에 물기가 어린 듯해 양유는 그만 질책하기로 하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난화봉이니, 하남제일여협이니 하고 불리게 된 게.”
군하경은 이것을 기억하느냐고 했다.
군하경의 두 손이 어지러이 움직이며 허공을 점했다.
양유도 익히 아는 동작이었다.
둘이 같이 살았을 무렵, 수련하고 있으면 심심해진 군하경이 옆에서 이걸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뭐였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난화만개수(蘭花滿開手). 사조(師祖)가 딱 하나 알려 준 무공이야.”
“그게 왜?”
“내 별호하고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사실 들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창의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작명이라 생각되어 그건 아니겠지 하고 넘어간 것이다.
군하경은 난화만개수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백암산에서는 할 일이 없어서 익힌 것이었으나 이 무공이 자신과 맞는지 쉽게 묘리를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경지가 깊어지는 것을 느껴서 집에 와서도 틈틈이 매진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조가 아무 무공이나 던져 준 것은 아니었는지 철검성 무사들하고 비무를 하면 내가 쉽게 이기는 거였어. 물론 그 사람들이야 예전부터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지며 항복을 외쳤으니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하지만, 이 손으로 작은 오라버니까지 제압해 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양유는 강하기는 무슨, 하고 중얼거렸다.
그 군하경이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해졌겠는가?
“이게 진짜!”
군하경은 난화만개수로 양유의 옆구리를 할퀴었다.
어찌나 사나운지 살점을 뜯어낼 목적인 것 같았다.
양유는 몸을 빼며 같이 손을 뻗었다.
팔방투예는 말 그대로 전방위적 무공 기예서라 척타솔나(踢打푮拏), 즉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고, 집어 던지고, 꺾고 비트는 법도 다뤘다.
그래서 양유도 금나수법(擒拏手法)에 자신이 있어서 팔만 움직이며 상대했다.
네 개의 손이 서로 얽히고설켰다.
난화만개수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며 양유의 눈을 현혹시켰으나 양유는 허실(虛實)을 꿰뚫어 보았고 손아귀 힘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강해서 부딪힐 때마다 군하경이 손해를 보았다.
군하경은 팔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너 검법이 주공(主功) 아녔어? 왜 수법(手法)마저도 그 모양이야? 지난 오 년 동안도 밥 먹고 무공 수련만 했니?”
군하경은 약간 딱하다는 듯 보았다.
그러나 원래 무림인은 식전식후(食前食後) 무공만 갈고닦는 족속이다.
왜 군하경에게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강하다는 것을 안 뒤에 어떻게 됐는데?”
“뭐, 내 무공에 자신이 생겨서 밖으로 돌기 시작했지. 아버님이야 처음에는 여자애가 어딜 나다니느냐고 하셨지만, 가둬 놓으면 몰래 빠져나가고 혼내도 말을 안 들었지. 내가 명성을 날리고 나서야 정 대고와 함께 다닌다면 제지하지 않기로 타협을 봤어. 일종의 감시자이면서 호위 역할도 하는.”
그러던 중, 하남제일여협이 되는데 시발점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정주삼살(鄭州三殺)이라고 어느 지역을 가나 꼭 있는 사파 의형제 나부랭이들이 음심을 품고 다가왔는데 군하경이 난화만개수로 가볍게 무릎 꿇리고 단단히 혼내 줬다는 것이었다.
“그 인간들이 어찌나 민폐를 끼치고 다녔는지 내가 좀 쥐어 패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하더라.”
그러한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무슨 거창한 협의심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런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난화만개수의 위력에 푹 빠진 상태라 써먹고 싶어서였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남제일여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드니까 점점 예뻐지는 거야. 그것도 이런 식으로.”
군하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음영을 드리웠다.
입 다물고 저러고 있으니 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자태가 정말 아름답고 고아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변화를 관찰하면서 양유는 군하경이 자기를 보는 눈빛의 성격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공모자에게나 내보일 법한 은밀한 속내를 드러내는 시선이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나같이 예쁜 여자들에게 이상한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어. 왜 예쁘면 다 요조숙녀(窈窕淑女)일 것으로 생각하지?”
군하경은 분개하며 말했다.
외모를 단지 겉껍질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자신을 지각하는 방식이 자신이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본질이 얼굴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남제일여협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어. 하지만 난화봉, 하남제일화라는 별호가 붙기 시작하자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거야.”
양유는 좀 이해가 안 되었다.
“대충 줄거리는 알겠는데, 그런 것 가지고 실아(失我)한다는 게 이상하다.”
“한 번 남의 기대대로 행동하다 보면 그걸 뒤집어 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그리고 그때의 나는 칭송받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남들이 원하는 난화봉 상(像)에 맞추는 게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어. 하지만, 이제는 지긋지긋해.”
군하경은 뭐가 지긋지긋한지를 말했다.
우선 자기 본성과는 전혀 반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점이고 자신이 아닌 만들어진 난화봉을 보고 집적거리는 놈들도 짜증이 난다고 했다.
특히 요즘에는 초일화가 자꾸 들러붙는데 아까 양유에게 시비를 건 것도 일단은 그 너절한 자존심 때문이겠으나 자기하고 친해 보이니 질투심이 일어난 탓도 있을 거라고 했다.
이렇게 다 털어놓으니 군하경은 속이 많이 풀린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