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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강호 1권 (20화)
6장 주루에 모인 후기지수들 (3)
초일화는 다시금 술잔을 던졌다.
이번 것은 양유의 방식대로 갚아 주겠다는 의미인지 빙빙 돌며 다가왔다.
양유는 가소로울 수밖에 없었다.
져 놓고 인정 못하는 사람 만큼 꼴불견이 또 없다.
양유는 술잔을 가볍게 받아 내 초일화에게 되돌리고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 앞의 술잔을 집어 또 던졌다.
두 개의 술잔이 연이어 초일화에게로 들이닥쳤다.
초일화는 양팔을 각각 뻗어 술잔을 잡아 내고 다시 양유에게 던져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것으로 끝내면 괜히 지는 것 같아 옆에 앉은 사공복의 술잔을 추가로 집어들어 날렸다.
이쯤 되면 내공 대결이 아니라 거의 투석전(投石戰) 수준인데, 그래도 고수들이라 잔에서 술 한 방울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양유 역시 세 개의 술잔을 안전히 받아 낸 다음, 되돌려 주고 술잔을 하나 더 얹으려 했으나 너무 멀리 있어 가져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는데 홍소육(紅燒肉)이 담긴 접시였다.
잘 조려진 돼지 삼겹살이 공중을 떠다니고 초일화가 뒤이어 추가한 닭 날개는 생전에 엄두도 못 내던 비상(飛上)의 꿈을, 죽어 요리되고 나서야 비로소 실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깔끔한 편이었다.
요리 몇 접시가 더 추가되자 초일화는 감당하기 어려워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미처 거두지 못한 술잔이 벽을 들이받고 파삭 깨졌다.
초일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한 굴욕감이 차올랐다.
대결이 우스꽝스러운 양상으로 치달았으니 더더욱 자기가 병신이 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찻잔과 술잔, 접시와 주전자, 양념통 등을 닥치는 대로 던져 댔다.
찻물과 술, 뜨끈한 국물이며 고깃덩어리 등이 비산하고 난리가 났다.
용봉들은 재밌게 보다가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는 자신들도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아 연회실 한쪽으로 몸을 피해 구경했다.
양유는 오는 족족 잡았다.
어쩐 일인지 맞던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곧 손이 모자라는 때가 왔다.
초일화는 옳거니 하고 계속해서 그릇들을 투척했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해도 허공을 때리는 듯 느낌이 없었다.
부딪혀 깨지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초일화는 이상함을 느껴 양유를 보았다.
그제야 용봉들이 토끼 눈을 하고 양유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럴 만했다.
어떤 인력(引力)이 작용하는 듯, 양유를 중심으로 각종 식기가 공전(公轉)하고 있는 것이다.
초일화가 던진 것들은 모두 양유 주위에 빨려들어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남궁상진이 장내 인물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대변했다.
“어검술(御劍術)……! 아니 저건 어식기술(御食器術)이라고 해야겠군.”
어검이라 함은 손이 아닌 기(氣)로써 검을 다루는 것으로 내공기예(內功技藝)의 절정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아서 그걸로 사람 죽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으나 알아두면 쓸만한 구석이 많다.
팔방투예에서는 어검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광억 특유의 삐딱한 무공관 탓에 별것 아닌 듯이 다뤄졌으나 중원에서는 이상검(理想劍)으로 누구나 한 번쯤 몰두해 보는 기예였고 웬만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었다.
손도 대지 않고 검 스스로 노닐 수 있다면 그것보다 완벽한 검법이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심검(心劍)이고 자연검(自然劍)이 아닐까?
거의 개소리였으나 이렇게 생각하는 무림인들이 많았다.
아무튼 초일화까지도 멍하니 양유만 보았다.
일단 놀라운 기예인 것은 분명한데, 양유를 둘러싼 것들이 손잡이가 달리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미끈하게 솟아나온 검이 아니라 비록 고급이기는 하나 한낱 식기류라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양유는 자기가 하고도 이걸 왜 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별생각 없이 권역을 만든 것이었는데, 그릇들은 계속 자기 주위를 돌고 여기서 이제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공전 속도가 점차 빨라지더니 파공음이 날 정도까지 되었다.
양유는 회전력을 이용해 식기들을 초일화에게로 모두 날렸다.
한 무더기의 그릇이 초일화를 덮쳐 갔다.
뒤에는 벽밖에 없고 워낙 날아오는 것이 많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접시나 주전자에 맞는다고 죽기야 하겠느냐마는, 초일화는 그러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양유에게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거 다 깨먹으면 변상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양유는 마지막 순간에 그만하기로 했다.
식기들은 그대로 살포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초일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양유를 보았다.
그 낯에는 안도감이 어린 듯했고 반대로 더한 수치심이 서린 듯도 했다.
초일화는 입을 꾹 다문 채 매화실을 나가 버렸다.
양유는 약간 미안해져서 변명하듯 말했다.
“좀 심했나?”
군하경이 대답했다.
“그럼요, 초 공자가 이 일을 얼마나 오래 가슴에 담아둘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네요. 벌써 적을 만들다니 정말 대단해요, 오라버니.”
“뭐, 말리지도 않고서.”
“그 난장판에 누가 끼어들겠어요?”
둘이 투닥투닥 말을 주고받는 것을 용봉들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오누이 같지 않은가?
평소 군하경은 부드러우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양유는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했다.
기이한 신위도 그렇고 어디서 이런 인간이 튀어나왔는지 궁금증은 더욱 깊어만 갔다.
연회는 완전히 파장된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더 지속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탁상 위에는 음식 찌꺼기 말고는 없었고 이걸 다 치우고 새로 음식을 내온다고 해도 분위기라는 것이 이미 끝장나 버려서 다시 하하 호호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군하경은 용봉들에게 말했다.
“아쉽지만 여기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네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용봉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자리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가장 먼저 황보진천이 작별 인사를 했다.
“정주는 처음이라 일찍 파한 김에 거리 구경도 하고 그래야겠소. 그럼, 이만.”
하나둘씩 매화실을 나갔다.
양유는 자기가 초일화와 합작하여 연회를 망쳤기 때문에 용봉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예상했으나 대부분 호의적인 눈인사를 보내며 떠났다.
연회가 재미없어서 빨리 끝내준 데 고마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보다는 양유의 어식기술 덕이었다.
이들의 배경이 좋다고는 하나 무림에서 더 알아주는 것은 일신의 무공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신분 증명서인 것이다.
마도인만 아니라면.
고매한 인품이나 들끓는 협기(俠氣) 이런 것은 사실 부차적이고 무림인의 존경심을 유발하는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강함이다.
남궁상진은 특히 감명받은 듯했는데, 양유의 손을 붙들고 열변을 토했다.
“내 평생 그런 재주는 처음 보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지. 무림 역사상 어식기술이 펼쳐진 적이 있겠소? 정말 좋은 구경을 했소이다. 앞으로도 종종 보면서 소생을 개안(開眼)시켜 주시기를 바라오.”
양유는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어식기술이 뭐가 대수인가?
대상만 바꾸어 당장 여기 있는 의자나 탁자를 기로 조종하면 어가구술(御家具術)이 되지 않는가?
남궁상진이 가고 또 양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석씨세가의 석상현이었다.
이 남자는 남궁상진처럼 흥분하며 접근한 것이 아니라 침착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의구심 같은 것을 품고 있는 듯했는데, 그러면서도 무척 예의가 발랐다.
“양 형(兄), 양 형이라 불러도 되겠소?”
양유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니 석상현이 말했다.
“양 형은 사문을 모른다고 했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것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소. 내 소견이 틀렸으면 고쳐 주시오.”
양유는 틀리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석상현을 좀 달리 보았다.
정주에 오고부터 아무도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아서 서글픈 참이었다.
“그렇다면 양 형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양 형의 사문에 대한 내 생각을 풀어보겠소. 그래도 좋겠소?”
양유는 석상현이 약간 마음에 들어서 그러라고 했다.
“일단 삼십삼파, 양 형 보고 마인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실례이니 이십구파로 하겠소. 이십구파 출신은 아니오. 이십구파에서 양 형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오. 물론 문파마다 드러나지 않은 비밀 고수는 있기 마련이나, 그랬다면 이 자리에서 그런 기예는 선보이지 않았겠지.”
석상현의 말이 맞기는 했다.
“석 형 말대로 나는 삼십삼파하고는 별 관련이 없소.”
“그렇다면 양 형 같은 사람을 길러 낼 수 있는 문파가 과연 어디가 있겠소? 삼십삼파 외의 다른 문파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양 형은 무림의 다음 세대를 이끌 우리 후기지수들 수준을 이미 가뿐히 넘어 버리지 않았소? 그런 고수를 양성하기란 삼십삼파에서도 어려운 일이오. 그러므로 삼십삼파 아래로 취급되는 문파 소속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소.”
양유는 자기 수준이 어떻기에 그런 평가를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 자기도 후기지수들이 다 초일화 정도라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참이었으나 석상현은 그 자신이 후기지수인 것이다.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석상현은 약간 웃더니 말했다.
“본인은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은 없으나 눈썰미 하나는 있다고 자부하오. 나에게는 그것이 자존심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소.”
그러더니 양유에게 덤벼들어 장력을 쏟아부었다.
석상현이 갑자기 미쳐서 이러는 것 같지는 않은지라 양유는 장력을 가볍게 흘리며 그의 팔목을 잡는 정도로 그쳤다.
“이것만 봐도 그렇지 않소?”
양유는 눈앞의 청년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보통 이상한 놈이 아니었다.
양유가 놓아 주자 석상현은 잡힌 부위를 어루만지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앞서 말했던 사문을 모른다는 말, 그것을 생각한다면 한 가지 가능성만이 있는 것 같소. 기연(奇緣)으로 인해 어떤 신비전승(神祕傳承)을 얻었으나 그 출처는 모르는 상황, 바로 그것이 아니오?”
양유는 전혀 아니라고 했다.
석상현은 너무 깊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저 광억이 사문 같은 것을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인데, 너무 합리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이런 간단한 경우를 놓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