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풍상강호 1권 (19화)
6장 주루에 모인 후기지수들 (2)
양유는 어차피 자신은 초청루를 다 뒤져서 군하경을 찾을 것이니, 네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자기가 군하경을 찾는 시간이 줄어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고작 그것을 위해 네 얼굴을 희생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남자는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군하경은 삼 층 복도 왼쪽에 있는 매화실(梅花室)을 빌렸다고 했다.
“고마워.”
양유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삼 층으로 올라갔다.
남자 말대로 왼쪽으로 가자 매화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이 보였다.
정주로 오면서 군하경을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고, 요 며칠 동안 그러한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었으나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는 했어도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러나 이 문 앞에서 재회가 확정되었음을 인지하니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하십니까?”
노상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양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둘러앉아 있는 용봉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양유를 쳐다보았다.
그중에서 양유는 군하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강산이 뒤바뀐 정도로 세월이 흐른 것은 아니라 알아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양유는 저게 과연 군하경이 맞는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예뻐져서였다.
백설(白雪) 같은 살갗에 눈썹은 붓으로 그린 듯했고 눈빛은 영롱하고 심원(深遠)하여 누구라도 빠져들 것 같았다.
아래로 내려오는 콧날은 입체감 있게 잘 솟아 있었고 작고 붉은 입술과 갸름한 턱은 어딘지 관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뜯어보지는 않았다.
미추(美醜)란 즉시적(卽時的)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어릴 때도 좀 귀엽긴 했지만 이 정도로 아름다워지다니 놀랍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기(銳氣)가 느껴졌다.
양유는 몸을 살짝 뒤로 빼고는 상대를 보았다.
중년쯤 되는 여자가 검을 겨누고 있었다.
가만히 있었더라면 검 끝에 목이 닿을락 말락 했을 것이다.
“제법 날래군. 웬 놈이냐!”
나이를 보아하니 후기지수는 절대 아니었고 예전에 그랬다 해도 그 시절은 한 이십 년은 족히 지난 듯한 사람이었다.
다 앉아 있는데 혼자 서 있다가 공격한 것을 보아 대강 신분이 짐작되었다.
양유가 말했다.
“흥을 깨 버린 것 같아 미안하게 되었소. 무슨 악의를 품고 온 것이 아니라 잠깐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그리고는 군하경을 보았다.
군하경도 양유를 계속 보는 것이 양유를 알아본 듯했다.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니 가만히 앉아만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군 소저께 무슨 볼일이 있소?”
사나이다운 기상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선 굵은 외모에 질끈 동여맨 영웅건(英雄巾)이 잘 어울렸다.
“당신이 알 바 아니오.”
영웅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분노해서였다.
양유는 그러거나 말거나 군하경만 보다가 지겨워져서 말했다.
“계속 이렇게 쳐다보기만 할 거야?”
군하경은 미소 짓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양 오라버니는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얼마나 변했나 찬찬히 보고 있었죠.”
이 말은 여러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여중년인은 검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났고 영웅건인도 은근슬쩍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무심했던 용봉들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말하는 것을 보아 둘이 친해 보이고 군하경과 친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 얼굴은 전혀 본 적이 없이 낯설었다.
또한 양유 일행에게도 심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문 뒤에 숨어서 양유가 개망신당하기를 기대하고 있던 노상은 둘이 정말 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그래도 오라버니라 하니 내기에서 이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양유는 군하경의 말하는 투가 나긋나긋하고 기품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거기다 오라버니라니?
일 년을 같이 살면서 군하경이 그렇게 불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너야말로 정말 많이 변했구나.”
양유는 약간 비꼬는 투로 말했다.
군하경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잔한 미소를 계속 띠며 장내의 용봉들에게 말했다.
“이분은 제 오라버니 같은 분이에요. 여러분께서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같이해도 될까요?”
이번 회합의 주도권은 군하경에게 있었고 양유가 누구인지 다들 궁금한 터라 좋다고들 말이 나왔다.
양유는 빈 의자에 가서 앉으며 용봉들에게 인사했다.
“양유라 하오. 노상, 너도 와서 앉아.”
노상은 머뭇머뭇하더니 마음을 먹고 매화실 문 뒤에서 나와 양유 옆에 털썩 앉았다.
약간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게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되는 듯했다.
무림을 지탱할 동량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니!
군하경이 물었다.
“그분은?”
“친구.”
노상은 거의 고함치듯 자신을 소개했다.
“노, 노, 노상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는 추태라는 것을 알았는지 얼굴이 씨뻘게진 채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용봉들은 별 신경을 안 썼다.
방만한 발걸음과 거친 호흡을 보면 무림인이 아닌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고 옷차림과 생긴 것은 범인(凡人)만도 못했다.
대신 양유는 행동거지에 여유가 넘쳤고 자신들을 거의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자기 이름만 딱 말하고는 차려진 음식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 오만함에 매료되었는지 용봉들은 한 명 한 명 자신을 소개했다.
이들은 모두 칠남사녀로, 그 이름과 배경은 이러했다.
남자들은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남궁상도, 남궁상진, 진씨세가(陳氏世家)의 진화량, 사공세가(司空世家)의 사공복, 황보세가(皇甫世家)의 황보진천, 석씨세가(石氏世家)의 석상현, 그리고 패도성(覇刀城)의 초일화였는데, 바로 영웅건인이었다.
여자들은 남궁세가의 남궁소령, 모용세가(慕容世家)의 모용청, 패도성의 초영하, 마지막 한 명은 당연히 군하경이었다.
대부분 십육대세가의 자제였고 구파일방 출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도에는 후기지수가 없단 말인가?
이는 이유가 있었다.
세가는 혈족 공동체라 직계 자손이 이후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출생과 동시에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파일방은 주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으니 누가 향후 문파의 패권을 쥘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후기지수를 꼽기가 모호했다.
물론 뛰어난 이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세가 자제들처럼 소속 문파의 자원을 써 가며 놀러다니고, 용봉회 활동 같은 것을 하고 할 여력이 없는 것도 한 이유였다.
소개가 다 끝나자 초일화가 물었다.
“그런데 양 형은 사문이 어디시오?”
말투가 도전적이고 깔보는 듯해서 담긴 뼈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뒤에 패도성이 있는데 너는 어느 정도나 되느냐? 이런 느낌이었다.
용봉들은 너무 노골적이라 생각해서 몇몇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양유의 사문이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잘 모르겠소.”
군하경을 제외한 모두는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문이 없을 수는 있다.
삼류 무림인들이 대부분 그렇다.
그리고 독학으로 무공을 익혀 홀로 우뚝 선 고수들도 적지만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사문을 모르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양유는 정말로 몰랐다.
광억은 우리는 무슨 문(門)이니 무슨 파(派)니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양유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이러니 초일화는 자신이 또 모욕당한 듯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밝히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모르겠다는 것은 또 뭐요?”
“믿든 말든 당신 자유요. 그러나 난 정말 내 사문을 모르겠소.”
“그렇다면 본인이 알아봐도 되겠소?”
초일화는 대답도 듣지 않고 대뜸 술잔을 집어들더니 양유에게 던졌다.
술잔은 공중에 떠 있는데도 마치 탁상에 놓인 것 같았다.
안에 담긴 술이 밖으로 흐르지도 않을 정도였다.
“훌륭한 수법이오!”
남궁상진이 감탄성을 발했다.
내공을 가득 담아 마치 술잔 아래를 지탱하는 효과를 낸 것이었다.
술잔은 양유의 가슴팍으로 날아왔다.
이 대결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실은 내공에 관련된 여러 복합적 능력을 요구했다.
우선 초일화처럼 던지는 것만 해도 내공을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했다.
무식하게 내공을 불어넣다가는 술잔이 깨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술잔을 받기가 더 어렵다.
술잔에 담긴 상대의 내공을 감당해야 하니 더 깊은 내공력(內功)을 필요로 한다.
술잔을 온전히 보전시켜야 함은 당연한 것이라 아무렇게나 받아서는 안 되고 유(柔)로써 강(强)을 상대하는 묘리(妙理)를 발휘해야 한다.
양유는 몸을 틀어 술잔을 피하고 손바닥을 닿을 듯하게 대며 날아가는 술잔을 따라 움직였다.
그동안 백위신공의 내력이 술잔을 둘러싼 초일화의 내공을 두들겨 해소시키자 술잔의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양유는 몸을 축으로 삼고 한 바퀴 돌며 술잔을 초일화에게로 보냈다.
술잔은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빠르게 회전하며 나아갔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술이 튀지 않았다.
“이것도 대단하군!”
남궁상진만 목소리를 높였고 모두 초일화가 어떻게 대처할지 숨죽이고 보았다.
초일화 역시 양유처럼 술잔을 따라가며 자신의 내공으로 술잔의 각운동량(角運動量)을 감소시키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술잔을 감싼 백위신공의 내력이 견고한 탓이었다.
곧 술잔은 벽에 부딪힐 듯했고 초일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술잔을 잡아 버렸다.
잔은 손바닥 안에서 몸부림쳤고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 정도면 승부가 가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초일화는 승복할 수가 없는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좋아, 좋아. 그런 수를 쓰다니…….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당해 보시오!”
잔을 회전시키는 것이 무슨 반칙이라도 되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