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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1화
프롤로그
그 날은 멜로디아가 매질을 당한 날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남작 부인이 완전히 정신을 놓은 뒤, 멜로디아는 이런 식의 매질에 자주 시달리게 되었다. 아픈 내색을 숨기려고 애쓰며 방으로 돌아갔다.
“누나.”
열여섯 살의 어린 동생이 얼른 문가로 달려왔다. 멜로디아는 웃으려고 했는데 종아리에서 피가 날 것처럼 아파서 웃지 못했다.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또 맞은 거야?”
“괜찮아. 조금 쉬어야겠다.”
동생 아르디온이 눈물을 글썽였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일단 침대에 엎드렸다. 똑바로 누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침대 맡에 선 아르디온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누나.”
“응?”
너무나 피곤해서 잠이 쏟아졌다. 멜로디아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르디온의 대답도 곧장 들리지는 않아서, 다음 순간 그녀는 깜빡 선잠에 들었다.
“……려고.”
“으응.”
신음처럼 대답했다. 몇 초 후, 멜로디아가 번쩍 눈을 떴다.
“뭐?”
“여기서 나갈 거야.”
멜로디아는 말을 잃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멜로디아는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르, 섣부른 일은 하지 마. 경솔하게 움직이면 안 돼.”
“계획이 있어. 밤에 다른 하인들과 짐을 받으러 마을로 내려가는데, 그때 기회를 잡으면 돼.”
아르디온은 확고하게 말했다. 이미 결심을 끝낸 모양이었다. 왜 이제껏 한 번도 상의하지 않았을까. 멜로디아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앞에 우뚝 선 아르디온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나갈 수 없어. 하인들만 움직이잖아.”
“알아, 누나.”
아르디온은 그렇게 말하더니 멜로디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멜로디아의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아르디온은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누나. 나는 나갈 거야. 누나를 언제까지고 이렇게 둘 수는 없어.”
“나가서, 뭘 어떡하려고?”
“방법을 찾을게. 그래서 누나를 여기서 꼭 구해 줄 거야.”
“아르.”
멜로디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상황이 닥치자 갑자기 온몸의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멜로디아는 아르를 불렀지만,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누나, 날 믿어. 데리러 올게. 누나는 이렇게 살면 안 돼. 우리 누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예쁘고 훌륭한데, 그 형편없는 여자 화풀이 상대나 될 이유가 없어.”
아르의 목소리에 분노의 기색이 스미기 시작했다. 말할수록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멜로디아는 아르의 두 손을 잡아 주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작은 손으로 무얼 하겠다는 걸까. 일을 많이 해 거칠어졌지만, 한때는 고운 도련님의 손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나를 두고 가지 마, 그 말이 턱 아래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자기의 두려움을 억눌렀다. 아르는 떠나야 했다. 멜로디아는 그걸 알고 있었다. 이곳 아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를 다른 곳으로 팔아 버릴 것이다.
“누나, 버텨.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살아만 있어. 내가 꼭 데리러 올게. 그때까지만 이 악물고 버텨 줘.”
“아르…….”
“약속해. 날 기다릴 거라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날 기다릴 거라고 약속해 줘.”
멜로디아는 울지 않았다. 동생의 결심은 이미 확고했다. 꼭 그 결심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함께 갈 수는 없다. 서둘러 아르를 보내야 한다.
“약속할게.”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기를 올려다보는 동생을 향해, 속삭였다. 자기와 꼭 닮은 푸른 눈이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아르디온은 누나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이 떠는 것을 느꼈다.
이 작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널 믿어.”
날 여기 혼자 두고 가지 마.
“난 걱정하지 마.”
혼자 남는 게 무서워.
“사랑해, 아르.”
멜로디아는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매달리지도 않았다.
아르디온은 멜로디아가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그녀 옆에 머물 수는 없었다. 아르디온은 가야 했다. 가서 멜로디아를 구할 힘, 그녀를 다시 고귀한 여인으로 만들 힘을 얻어야 했다.
“나도 사랑해, 누나.”
그게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이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한마디였다.
그날 밤, 아르디온은 하인들과 함께 마을로 내려갔다. 수상해 보일까 봐, 멜로디아는 배웅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저 창문에 바짝 붙어 아르디온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아르디온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르디온이 사라지자, 예상대로 불똥은 멜로디아에게 튀었다. 이미 시퍼렇게 멍든 종아리 위에 다시 회초리가 떨어졌을 때 멜로디아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르디온의 무사를 빌었다.
1장.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493년, 네레이드 백작가는 역모 혐의를 입고 멸문당했다. 멸문이라고는 해도 혐의가 크지 않았던 탓에, 부인과 성인이 된 아들만 처형한다는 성문법상의 연좌제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네레이드 백작가의 두 아이들은 가문을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두 사람은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었다가 다시 트리톤 남작가의 사유 재산이 되었다. 남매가 헐값에 나란히 팔린 것이다.
트리톤 남작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저택 앞에서 멜로디아는 열두 살 된 어린 동생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멜로디아도 무척 두려웠다. 하지만 동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간 이송 대원들은 오래 나오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꽁꽁 얼어 가는 아르디온의 손이 안타까웠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은 두 손을 잡은 채 입김을 불어 주었다. 아르디온은 괜찮다는 듯 멜로디아의 손을 밀어 내려 했다. 멜로디아는 놓지 않았다. 내 동생, 얼마나 추울까…….
“누나, 걱정하지 마.”
아르디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멜로디아가 멈칫한 사이 동생이 두 팔을 뻗어 멜로디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멜로디아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르디온의 야윈 등을 도닥여 주었다.
“누나가 꼭 지켜 줄게.”
“나도.”
아르디온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가문을 잃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동안, 아르디온은 부쩍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마저도 마음이 아팠다. 스산한 겨울바람이 마음까지 저미는 듯했다.
“일어나라. 남작 부인이 보자고 하신다.”
이송 대원 중 하나가 나와 멜로디아를 일으켜 세웠다. 멜로디아는 휘청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택 풍경 같은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맞잡은 아르디온의 손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얼굴을 익혀야 하니 고개를 들어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남작 부인 앞이었다. 멜로디아는 자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뒤늦게 얼굴을 들어 남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인상이었다. 눈가에 만성적인 피로가 번진 얼굴. 친근한 인상은 아니라 멜로디아는 반사적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멜로디아입니다.”
“아르디온입니다.”
곁에 섰던 아르디온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린아이들임에도 몸가짐이 훌륭해 보였다. 남작 부인은 남동생과 꼭 붙어 있는 멜로디아를 보고 물었다.
“몇 살이지?”
“올해 열다섯이 되었습니다, 부인.”
“동생은.”
“열둘입니다.”
“일을 배우기엔 조금 늦은 나이구나. 하지만 괜찮겠지.”
남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특별한 적의도 보이지 않아 멜로디아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남작 부인은 더 묻지 않고 오늘은 쉬라며 두 사람을 내보냈다.
낯을 가리는 듯한 하녀가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을 사용인 숙소로 안내했다. 숙소는 저택 바깥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지 못한 멜로디아는 조심스럽게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실례하네. 아직 저녁 식사 전이라……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을 수 있을까 싶네.”
하녀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멜로디아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조금 당황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귀족 출신이라더니 진짠가 보네. 말투가 되게…… 아무튼 식당 운영은 끝났어. 오늘은 그냥 자.”
하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했지만, 멜로디아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동안 자기 처지를 깨달은 탓이었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이 걱정되었지만 저녁 식사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남녀 숙소가 달라 헤어져야 했을 때, 멜로디아는 동생을 꼭 안아 주었다.
“아르,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좋은 꿈 꿔.”
“누나도.”
아르디온의 뒷모습을 바라볼 틈도 없었다. 하녀는 멜로디아를 이끌고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과히 늦진 않았는지 깨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일순 시선이 멜로디아 쪽으로 몰렸다.
“멜로디아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 몰라, 멜로디아는 어설프게 말을 높이며 엉거주춤 무릎만 굽혀 보였다. 하녀들은 멜로디아의 인사에 답하는 대신 멜로디아를 데려온 하녀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진짜 귀족이었대?”
“어디 담당할 건지 들었어?”
“어려 보인다. 몇 살이래?”
호기심 어린 물음들. 멜로디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관심은 흐려졌다. 새 옷을 받고 잠자리에 누우니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쪽도 딱히 나쁜 분위기는 아니구나. 멜로디아는 조금 안심하는 동시에 아르디온에게도 별문제 없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녀들은 자기들끼리 조금 떠들다가 하나씩 잠들었다. 이곳의 냄새, 풍경, 소리…… 모든 것이 다 낯설었다. 나무판자 수준인 딱딱한 침대도 어색했다. 어둠과 침묵이 함께 찾아오자 수많은 걱정이 다 마음 저편에서부터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괜찮을 거야. 나한테는 아르가 있어. 난 아르를 지켜야 해. 멜로디아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남작가의 사용인이 되었다.
트리톤 남작가는 지방 귀족으로, 중앙에서 활약하는 권세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봉토로 받은 땅이 기름지고 남부 기후도 온화하여 넉넉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한 달이 지났다. 배움이 빠른 멜로디아와 아르디온도 점차 사용인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처음에 걱정했던 이유 모를 적의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성적 학대 같은 것들은 전혀 없었다.
밤이면 근육통에 시달리고 손이 거칠어졌지만 멜로디아는 이렇게 조용히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여전히 부모를 잃은 슬픔에 시달리긴 했지만 일이 워낙 바쁘다 보니 몸이 지쳐 기절하듯 잠드는 일이 잦았다. 멜로디아는 부디 아르디온도 그렇기를 바랐다.
어느 평화롭던 날 오전, 멜로디아는 남작 부인의 방으로 가는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꽃꽂이가 되어 있는 흰 화분을 조심조심 닦다가, 꽃이 흐트러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몇 송이는 시들기도 했다. 가지를 제때 갈지 못한 모양이었다.
“샤론, 잠깐만.”
멜로디아는 곁에 있던 하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샤론이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고 말했지만 멜로디아는 묵묵히 시든 꽃가지를 빼고 남은 꽃들로 맵시 있게 틈을 메웠다.
“이것 봐, 처음보다 훨씬 낫지?”
함께 일하는 하녀들과도 한결 편히 말하게 되었다. 멜로디아는 웃으며 샤론을 돌아보았다가, 저쪽에서 다가오는 남작 부인을 보고 얼른 무릎을 굽혔다. 샤론과 함께 벽 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남작 부인이 멜로디아 앞에 멈춰 섰다.
“무얼 하고 있었지?”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
더 오래 일한 샤론이 대답했다. 남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멜로디아가 붙어 서 있던 화분을 살폈다. 멜로디아는 혹시 멋대로 행동했다는 말을 들을까 긴장했다. 많이 익숙해지긴 했어도 아직 생전 모셔 본 적 없는 ‘주인마님’을 대하는 일은 낯설었다.
“잘했구나.”
“감사합니다, 부인.”
멜로디아는 다시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부인은 곧 수고하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인이 말한 건 그뿐이어서 멜로디아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멜로디아는 남작 부인이 유난히 자기를 자주 부르는 것을 느꼈다. 산책을 나갈 때 부르기도 하고, 식사 중에 따로 수발을 드는 아이가 있는데도 시중 담당이 아닌 멜로디아를 부른 적도 있었다.
“부인이 네가 맘에 드셨나 봐.”
샤론은 멜로디아에게 속닥거렸다. 멜로디아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부인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건 아닌 탓에 종종 하녀들이 수군거리거나 힐끔거리는 일도 생겼다.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서 멜로디아는 막연히 걱정스러웠다.
몇 주 후, 과연 부인은 방으로 멜로디아를 불렀다. 오전이었다. 주방 일을 돕다가 부인의 부름을 받은 것이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멜로디아를 바라보았다. 같은 사용인이라 해도 주인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꽤나 철저히 구분되고 있었다. 멜로디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서둘러 앞치마를 벗고 치맛자락을 단정히 했다.
“부르셨나요, 부인?”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했다. 부인의 방은 단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쓸모없는 가구도 없고 크기도 지나치게 넓지는 않았지만, 창으로는 햇살이 비치며 상쾌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멜로디아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가까이 오련, 멜로디아.”
이렇게 다정하게 불리긴 오랜만이었다. 남작 부인이 자기 이름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멜로디아는 놀란 표정을 감추고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인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고동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려 목을 드러낸, 우아한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떠올라 멜로디아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잠깐 숨을 멈추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부인.”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나긋나긋 대답하자 부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 다음에 부인이 꺼낸 말은, 멜로디아로서는 예상조차 못 했던 내용이었다.
“네가 내 딸과 함께 지내 줬으면 싶구나.”
멜로디아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작 부인에게는 물론 딸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멜로디아는 한 번도 그 딸을 본 적이 없었다. 트리톤 남작가의 외동딸은 지금 수도 사교계에 나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실례지만 부인, 따님께서 돌아오시나요?”
“그래. 그 아이가 데뷔 무대를 끝냈다는 연락을 받았지.”
지방 귀족들도 열다섯이 되면 수도로 올라가 사교계에 데뷔한다. 멜로디아는 이런 처지가 되어 하지 못했지만, 자기와 동갑이라는 그 아가씨는 데뷔 무대를 가졌을 것이다.
“딸아이의 시중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도와주렴. 지켜보니, 몸가짐도 바르고 사소한 곳에도 마음을 기울이더구나. 딸 이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야.”
“과찬이십니다.”
“방도 따로 주마. 수도에서 귀하게 자랐으니 이런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텐데…… 인내심도 좋은 듯해. 이다와 잘 지내보렴.”
멜로디아는 파격적인 대우에 당혹했다. 부인이 자기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러는지는 몰라도 방까지 내준다고 할 줄은 몰랐다. 멜로디아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인, 이렇게까지 마음을 기울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성을 다해 아가씨를 모실 것입니다. 다만 머무는 곳은 지금으로도 괜찮습니다.”
“동생 때문이라면, 동생에게도 방을 주마. 동생과 함께 이다를 만나도 좋아.”
아르디온 얘기를 꺼내면 뭔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부러 말을 삼킨 것인데, 부인은 예리하게 그 부분을 짚어 왔다. 멜로디아는 놀라서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깨를 딱딱하게 굳힌 멜로디아를 향해 부인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당부했다.
“잊지 말거라. 나는 네 마음과 몸가짐을 높이 평가한단다. 이다와 잘 지내보렴.”
“감사합니다, 부인.”
멜로디아는 인사를 마치고 부인의 방에서 나왔다.
갑자기 달라진 제 처지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다정한 어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에는 운이 따른다 여기며 지냈지만 가문이 몰락한 후에는 운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행운이라니.
게다가 아르디온도 다른 방을 받게 되었다. 열두 살밖에 안 된 아르디온이 함께 쓰는 숙소에서 적응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부인은 아르디온도 아가씨 이다의 시중을 들게 하려는 듯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주인 가족 곁에서 하는 것과 아닌 것은 천지차이였다.
“아르, 아르, 들어 봐!”
그날 아르디온을 찾아가 부인의 지시에 대해 알려 주었다. 과연 아르디온도 기뻐했다. 남작 부인이 왜 굳이 자기 딸 옆에 사람을 두려 하는 것인지, 그때는 두 사람 다 전혀 몰랐다.
프롤로그
그 날은 멜로디아가 매질을 당한 날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남작 부인이 완전히 정신을 놓은 뒤, 멜로디아는 이런 식의 매질에 자주 시달리게 되었다. 아픈 내색을 숨기려고 애쓰며 방으로 돌아갔다.
“누나.”
열여섯 살의 어린 동생이 얼른 문가로 달려왔다. 멜로디아는 웃으려고 했는데 종아리에서 피가 날 것처럼 아파서 웃지 못했다.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또 맞은 거야?”
“괜찮아. 조금 쉬어야겠다.”
동생 아르디온이 눈물을 글썽였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일단 침대에 엎드렸다. 똑바로 누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침대 맡에 선 아르디온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누나.”
“응?”
너무나 피곤해서 잠이 쏟아졌다. 멜로디아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르디온의 대답도 곧장 들리지는 않아서, 다음 순간 그녀는 깜빡 선잠에 들었다.
“……려고.”
“으응.”
신음처럼 대답했다. 몇 초 후, 멜로디아가 번쩍 눈을 떴다.
“뭐?”
“여기서 나갈 거야.”
멜로디아는 말을 잃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멜로디아는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르, 섣부른 일은 하지 마. 경솔하게 움직이면 안 돼.”
“계획이 있어. 밤에 다른 하인들과 짐을 받으러 마을로 내려가는데, 그때 기회를 잡으면 돼.”
아르디온은 확고하게 말했다. 이미 결심을 끝낸 모양이었다. 왜 이제껏 한 번도 상의하지 않았을까. 멜로디아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앞에 우뚝 선 아르디온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나갈 수 없어. 하인들만 움직이잖아.”
“알아, 누나.”
아르디온은 그렇게 말하더니 멜로디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멜로디아의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아르디온은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누나. 나는 나갈 거야. 누나를 언제까지고 이렇게 둘 수는 없어.”
“나가서, 뭘 어떡하려고?”
“방법을 찾을게. 그래서 누나를 여기서 꼭 구해 줄 거야.”
“아르.”
멜로디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상황이 닥치자 갑자기 온몸의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멜로디아는 아르를 불렀지만,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누나, 날 믿어. 데리러 올게. 누나는 이렇게 살면 안 돼. 우리 누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예쁘고 훌륭한데, 그 형편없는 여자 화풀이 상대나 될 이유가 없어.”
아르의 목소리에 분노의 기색이 스미기 시작했다. 말할수록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멜로디아는 아르의 두 손을 잡아 주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작은 손으로 무얼 하겠다는 걸까. 일을 많이 해 거칠어졌지만, 한때는 고운 도련님의 손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나를 두고 가지 마, 그 말이 턱 아래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멜로디아는 자기의 두려움을 억눌렀다. 아르는 떠나야 했다. 멜로디아는 그걸 알고 있었다. 이곳 아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를 다른 곳으로 팔아 버릴 것이다.
“누나, 버텨.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살아만 있어. 내가 꼭 데리러 올게. 그때까지만 이 악물고 버텨 줘.”
“아르…….”
“약속해. 날 기다릴 거라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날 기다릴 거라고 약속해 줘.”
멜로디아는 울지 않았다. 동생의 결심은 이미 확고했다. 꼭 그 결심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함께 갈 수는 없다. 서둘러 아르를 보내야 한다.
“약속할게.”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기를 올려다보는 동생을 향해, 속삭였다. 자기와 꼭 닮은 푸른 눈이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아르디온은 누나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이 떠는 것을 느꼈다.
이 작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널 믿어.”
날 여기 혼자 두고 가지 마.
“난 걱정하지 마.”
혼자 남는 게 무서워.
“사랑해, 아르.”
멜로디아는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매달리지도 않았다.
아르디온은 멜로디아가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그녀 옆에 머물 수는 없었다. 아르디온은 가야 했다. 가서 멜로디아를 구할 힘, 그녀를 다시 고귀한 여인으로 만들 힘을 얻어야 했다.
“나도 사랑해, 누나.”
그게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이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한마디였다.
그날 밤, 아르디온은 하인들과 함께 마을로 내려갔다. 수상해 보일까 봐, 멜로디아는 배웅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저 창문에 바짝 붙어 아르디온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아르디온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르디온이 사라지자, 예상대로 불똥은 멜로디아에게 튀었다. 이미 시퍼렇게 멍든 종아리 위에 다시 회초리가 떨어졌을 때 멜로디아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르디온의 무사를 빌었다.
1장.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493년, 네레이드 백작가는 역모 혐의를 입고 멸문당했다. 멸문이라고는 해도 혐의가 크지 않았던 탓에, 부인과 성인이 된 아들만 처형한다는 성문법상의 연좌제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네레이드 백작가의 두 아이들은 가문을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두 사람은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었다가 다시 트리톤 남작가의 사유 재산이 되었다. 남매가 헐값에 나란히 팔린 것이다.
트리톤 남작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저택 앞에서 멜로디아는 열두 살 된 어린 동생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멜로디아도 무척 두려웠다. 하지만 동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간 이송 대원들은 오래 나오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꽁꽁 얼어 가는 아르디온의 손이 안타까웠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은 두 손을 잡은 채 입김을 불어 주었다. 아르디온은 괜찮다는 듯 멜로디아의 손을 밀어 내려 했다. 멜로디아는 놓지 않았다. 내 동생, 얼마나 추울까…….
“누나, 걱정하지 마.”
아르디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멜로디아가 멈칫한 사이 동생이 두 팔을 뻗어 멜로디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멜로디아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르디온의 야윈 등을 도닥여 주었다.
“누나가 꼭 지켜 줄게.”
“나도.”
아르디온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가문을 잃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동안, 아르디온은 부쩍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마저도 마음이 아팠다. 스산한 겨울바람이 마음까지 저미는 듯했다.
“일어나라. 남작 부인이 보자고 하신다.”
이송 대원 중 하나가 나와 멜로디아를 일으켜 세웠다. 멜로디아는 휘청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택 풍경 같은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맞잡은 아르디온의 손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얼굴을 익혀야 하니 고개를 들어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남작 부인 앞이었다. 멜로디아는 자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뒤늦게 얼굴을 들어 남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인상이었다. 눈가에 만성적인 피로가 번진 얼굴. 친근한 인상은 아니라 멜로디아는 반사적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멜로디아입니다.”
“아르디온입니다.”
곁에 섰던 아르디온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린아이들임에도 몸가짐이 훌륭해 보였다. 남작 부인은 남동생과 꼭 붙어 있는 멜로디아를 보고 물었다.
“몇 살이지?”
“올해 열다섯이 되었습니다, 부인.”
“동생은.”
“열둘입니다.”
“일을 배우기엔 조금 늦은 나이구나. 하지만 괜찮겠지.”
남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특별한 적의도 보이지 않아 멜로디아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남작 부인은 더 묻지 않고 오늘은 쉬라며 두 사람을 내보냈다.
낯을 가리는 듯한 하녀가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을 사용인 숙소로 안내했다. 숙소는 저택 바깥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지 못한 멜로디아는 조심스럽게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실례하네. 아직 저녁 식사 전이라……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을 수 있을까 싶네.”
하녀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멜로디아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조금 당황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귀족 출신이라더니 진짠가 보네. 말투가 되게…… 아무튼 식당 운영은 끝났어. 오늘은 그냥 자.”
하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했지만, 멜로디아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동안 자기 처지를 깨달은 탓이었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이 걱정되었지만 저녁 식사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남녀 숙소가 달라 헤어져야 했을 때, 멜로디아는 동생을 꼭 안아 주었다.
“아르,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좋은 꿈 꿔.”
“누나도.”
아르디온의 뒷모습을 바라볼 틈도 없었다. 하녀는 멜로디아를 이끌고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과히 늦진 않았는지 깨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일순 시선이 멜로디아 쪽으로 몰렸다.
“멜로디아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 몰라, 멜로디아는 어설프게 말을 높이며 엉거주춤 무릎만 굽혀 보였다. 하녀들은 멜로디아의 인사에 답하는 대신 멜로디아를 데려온 하녀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진짜 귀족이었대?”
“어디 담당할 건지 들었어?”
“어려 보인다. 몇 살이래?”
호기심 어린 물음들. 멜로디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관심은 흐려졌다. 새 옷을 받고 잠자리에 누우니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쪽도 딱히 나쁜 분위기는 아니구나. 멜로디아는 조금 안심하는 동시에 아르디온에게도 별문제 없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녀들은 자기들끼리 조금 떠들다가 하나씩 잠들었다. 이곳의 냄새, 풍경, 소리…… 모든 것이 다 낯설었다. 나무판자 수준인 딱딱한 침대도 어색했다. 어둠과 침묵이 함께 찾아오자 수많은 걱정이 다 마음 저편에서부터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괜찮을 거야. 나한테는 아르가 있어. 난 아르를 지켜야 해. 멜로디아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남작가의 사용인이 되었다.
트리톤 남작가는 지방 귀족으로, 중앙에서 활약하는 권세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봉토로 받은 땅이 기름지고 남부 기후도 온화하여 넉넉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한 달이 지났다. 배움이 빠른 멜로디아와 아르디온도 점차 사용인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처음에 걱정했던 이유 모를 적의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성적 학대 같은 것들은 전혀 없었다.
밤이면 근육통에 시달리고 손이 거칠어졌지만 멜로디아는 이렇게 조용히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여전히 부모를 잃은 슬픔에 시달리긴 했지만 일이 워낙 바쁘다 보니 몸이 지쳐 기절하듯 잠드는 일이 잦았다. 멜로디아는 부디 아르디온도 그렇기를 바랐다.
어느 평화롭던 날 오전, 멜로디아는 남작 부인의 방으로 가는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꽃꽂이가 되어 있는 흰 화분을 조심조심 닦다가, 꽃이 흐트러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몇 송이는 시들기도 했다. 가지를 제때 갈지 못한 모양이었다.
“샤론, 잠깐만.”
멜로디아는 곁에 있던 하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샤론이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고 말했지만 멜로디아는 묵묵히 시든 꽃가지를 빼고 남은 꽃들로 맵시 있게 틈을 메웠다.
“이것 봐, 처음보다 훨씬 낫지?”
함께 일하는 하녀들과도 한결 편히 말하게 되었다. 멜로디아는 웃으며 샤론을 돌아보았다가, 저쪽에서 다가오는 남작 부인을 보고 얼른 무릎을 굽혔다. 샤론과 함께 벽 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남작 부인이 멜로디아 앞에 멈춰 섰다.
“무얼 하고 있었지?”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
더 오래 일한 샤론이 대답했다. 남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멜로디아가 붙어 서 있던 화분을 살폈다. 멜로디아는 혹시 멋대로 행동했다는 말을 들을까 긴장했다. 많이 익숙해지긴 했어도 아직 생전 모셔 본 적 없는 ‘주인마님’을 대하는 일은 낯설었다.
“잘했구나.”
“감사합니다, 부인.”
멜로디아는 다시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부인은 곧 수고하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인이 말한 건 그뿐이어서 멜로디아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멜로디아는 남작 부인이 유난히 자기를 자주 부르는 것을 느꼈다. 산책을 나갈 때 부르기도 하고, 식사 중에 따로 수발을 드는 아이가 있는데도 시중 담당이 아닌 멜로디아를 부른 적도 있었다.
“부인이 네가 맘에 드셨나 봐.”
샤론은 멜로디아에게 속닥거렸다. 멜로디아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부인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건 아닌 탓에 종종 하녀들이 수군거리거나 힐끔거리는 일도 생겼다.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서 멜로디아는 막연히 걱정스러웠다.
몇 주 후, 과연 부인은 방으로 멜로디아를 불렀다. 오전이었다. 주방 일을 돕다가 부인의 부름을 받은 것이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멜로디아를 바라보았다. 같은 사용인이라 해도 주인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꽤나 철저히 구분되고 있었다. 멜로디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서둘러 앞치마를 벗고 치맛자락을 단정히 했다.
“부르셨나요, 부인?”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했다. 부인의 방은 단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쓸모없는 가구도 없고 크기도 지나치게 넓지는 않았지만, 창으로는 햇살이 비치며 상쾌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멜로디아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가까이 오련, 멜로디아.”
이렇게 다정하게 불리긴 오랜만이었다. 남작 부인이 자기 이름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멜로디아는 놀란 표정을 감추고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인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고동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려 목을 드러낸, 우아한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떠올라 멜로디아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잠깐 숨을 멈추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부인.”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나긋나긋 대답하자 부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 다음에 부인이 꺼낸 말은, 멜로디아로서는 예상조차 못 했던 내용이었다.
“네가 내 딸과 함께 지내 줬으면 싶구나.”
멜로디아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작 부인에게는 물론 딸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멜로디아는 한 번도 그 딸을 본 적이 없었다. 트리톤 남작가의 외동딸은 지금 수도 사교계에 나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실례지만 부인, 따님께서 돌아오시나요?”
“그래. 그 아이가 데뷔 무대를 끝냈다는 연락을 받았지.”
지방 귀족들도 열다섯이 되면 수도로 올라가 사교계에 데뷔한다. 멜로디아는 이런 처지가 되어 하지 못했지만, 자기와 동갑이라는 그 아가씨는 데뷔 무대를 가졌을 것이다.
“딸아이의 시중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도와주렴. 지켜보니, 몸가짐도 바르고 사소한 곳에도 마음을 기울이더구나. 딸 이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야.”
“과찬이십니다.”
“방도 따로 주마. 수도에서 귀하게 자랐으니 이런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텐데…… 인내심도 좋은 듯해. 이다와 잘 지내보렴.”
멜로디아는 파격적인 대우에 당혹했다. 부인이 자기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러는지는 몰라도 방까지 내준다고 할 줄은 몰랐다. 멜로디아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인, 이렇게까지 마음을 기울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성을 다해 아가씨를 모실 것입니다. 다만 머무는 곳은 지금으로도 괜찮습니다.”
“동생 때문이라면, 동생에게도 방을 주마. 동생과 함께 이다를 만나도 좋아.”
아르디온 얘기를 꺼내면 뭔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부러 말을 삼킨 것인데, 부인은 예리하게 그 부분을 짚어 왔다. 멜로디아는 놀라서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깨를 딱딱하게 굳힌 멜로디아를 향해 부인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당부했다.
“잊지 말거라. 나는 네 마음과 몸가짐을 높이 평가한단다. 이다와 잘 지내보렴.”
“감사합니다, 부인.”
멜로디아는 인사를 마치고 부인의 방에서 나왔다.
갑자기 달라진 제 처지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다정한 어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에는 운이 따른다 여기며 지냈지만 가문이 몰락한 후에는 운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행운이라니.
게다가 아르디온도 다른 방을 받게 되었다. 열두 살밖에 안 된 아르디온이 함께 쓰는 숙소에서 적응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부인은 아르디온도 아가씨 이다의 시중을 들게 하려는 듯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주인 가족 곁에서 하는 것과 아닌 것은 천지차이였다.
“아르, 아르, 들어 봐!”
그날 아르디온을 찾아가 부인의 지시에 대해 알려 주었다. 과연 아르디온도 기뻐했다. 남작 부인이 왜 굳이 자기 딸 옆에 사람을 두려 하는 것인지, 그때는 두 사람 다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