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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레이디 1권 2화



“그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멜로디아.”
부인의 제의에 대해 전해 들은 샤론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함께 청소를 하던 중이라 복도에는 둘밖에 없었다. 멜로디아는 들뜬 얼굴로 왜냐고 물었다.
“음, 저기…… 내가 말했다고 하지 않을 거지?”
“무슨 말인데?”
“이다 아가씨는 조금…… 좋을 땐 좋으신데, 어떨 때는 참…… 대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어. 종종, 아니, 좀 자주.”
“왜?”
멜로디아는 순진하게 물었다. 샤론은 당혹감을 느꼈다. 오래 하녀 일을 해 온 사람들과는 이 정도 이야기해도 바로 의미 전달이 된다. 그러나 평생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 온 멜로디아는, 일은 빨리 배웠지만 이런 면에서는 눈치가 없었다.
“아마 주인마님께서는 너랑 아르디온이 이다 아가씨를 바꿀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또래 형제가 없는 걸 염려하시는 거 아닐까 싶어. 남작님도 안 계시는데, 혼자라면 너무 외로울 거야.”
샤론도 멜로디아가 남동생과 아주 사이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멜로디아는 사랑받고 자란 사람답게, 많은 일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트리톤 남작가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용기는 없어서 샤론은 그저 조심하라는 말만 덧붙이고 그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언제나 친절하고 사려 깊은 멜로디아를 좋아하는 하녀들은 그녀를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멜로디아는 걱정하지 않았다. 남작 부인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르디온까지 배려해 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표정이 어둡고 피로해 보이긴 하지만 남편이 오래 자리를 비운 저택을 홀로 지키려니 그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부인 아래서 자란 딸도 분명 마음씨 고운 사람일 거라고, 멜로디아는 생각했다.
“누나, 누나 방도 정말 예쁘다.”
이다 트리톤이 도착하기 하루 전,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새 방을 받았다. 이다의 방과 가까운 곳으로, 환기도 잘되고 한 사람이 지내기에 딱 적당한 규모였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과 자기 방이 가깝다는 것에 만족했다.
남작 부인은 두 사람에게 더한 특혜를 주었다.
“이다와 있을 때 그 옷을 입고 있을 수는 없지. 내려가서 새 옷을 사 오렴.”
사실상 하루 동안 휴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니자 남매는 한껏 들떴다. 한 달 일하고 받은 봉급을 거의 쓰지 않고 있었기에 둘은 옷은 물론 이런저런 물건을 살 수 있었다.
“누나, 누나는 시녀가 된 거야?”
아르디온은 멜로디아가 옷을 고르는 것을 보고 물었다. 멜로디아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트리톤 남작가는 규모가 작아서 특별히 시녀 하녀를 구별하진 않는 것 같아. 그러니 시녀라고 하긴 그렇지만…… 옷을 갖춰 입으라고 하신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시녀처럼 지내지 않을까 싶어.”
시녀는 궂은일을 하기보다는 간단한 시중을 들거나 말 상대, 놀이 상대가 되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트리톤 남작가는 권세가도 아니고 사치할 만큼 부유하지도 않아 귀족 출신 시녀를 쓰지는 못하지만, 부인은 멜로디아에게 시녀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온 멜로디아는 부인에게 가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하기로 했다. 아르디온도 함께였다.
“부인,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진심을 다해 아가씨를 잘 모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부인.”
아르디온도 멜로디아 곁에서 인사하고, 조심스레 다가가 부인에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작은 상자였는데 부인은 그걸 받더니 이게 뭐냐고 물었다. 아르디온은 조금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부인에게 무언가 드리고 싶었는데, 오늘 밖에 나갔다가 눈에 띄어서 샀습니다. 꽃을 나무 수액으로 굳힌 거라고 해요. 값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부인께 작은 기쁨이 되면 좋겠습니다.”
남작 부인은 이 뜻밖의 성의에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껏 봐 왔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생기 있는 얼굴로 아르디온을 바라보았다.
“고맙구나. 어린데도 이렇게 생각이 깊다니. 너희에게 이다를 부탁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짧은 대화 후 두 사람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멜로디아는 아르디온을 먼저 방으로 들여보낸 뒤에 자기 방에 들어와 누웠다. 어쩐지 모든 일이 다 잘될 것만 같았다.

*

트리톤 남작의 외동딸 이다 트리톤은 자기의 새 말동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집에 돌아왔다.
편지에는 쓰지 못했지만 이다의 데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대부분의 지방 소귀족 아가씨들이 그러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규모의 파티, 밤새 이어지는 은밀한 모임들, 어디에도 이다 트리톤의 자리는 없었다. 그녀의 미모는 수도 아가씨들의 세련미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며 사교술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이미 형성되어 있던 관계망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다는 화려하게 빛나는 세계를 목도했으나 그대로 돌아서야만 했다. 그 때문에 이다 트리톤은 두 달 사이, 꽤 위축되고 말았다.
“이다, 이제부터 네 시중을 들어 줄 아이란다.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이라고 하지. 두 사람도 귀족이었으니 너와 어울려 지낼 수 있을 거야.”
남작 부인은 따로 이다를 불러 남매를 소개했다.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은 각자 격식에 맞는 인사를 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멜로디아라고 해요.”
멜로디아는 꽤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네 왔다. 남작 부인은 이다와 몇 마디 나눈 후 바로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다는 제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동생보다는 누나 쪽이 더 눈에 들어왔다. 멜로디아는 색이 짙은 흑발을 가졌는데, 단정하게 하나로 틀어 올려 하얗고 가는 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곱게 깜빡이는 진청색 눈동자는 빛깔도 곱고 느낌도 고왔다. 무엇보다도 손끝 발끝을 모으고 선 자세가 아름다웠다.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몸에 밴 습관이었다.
수도에 다녀오면서 옷을 보는 눈도 생겼다. 멜로디아가 입은 옷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수도 사교계에 가서 저런 옷을 드레스라고 했다간 망신이나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옷을 입고 있는데도 멜로디아에게서는 어떤 기품이 느껴졌다.
이다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이다 트리톤이야.”
대뜸 반말로 뱉어 놓고 멜로디아의 반응을 살폈다. 분명 귀족이었다고 했다. 발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멜로디아는 대답해 줘서 기쁘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거기에 상냥한 말을 건네 오기까지 했다.
“긴 여행을 하셨을 텐데 피로하지 않으세요? 목욕 전에 간단한 음식이라도 내올까요?”
멜로디아는 자연스레 다가와 거추장스럽던 겉옷부터 받아 갔다. 옆에 있던 동생이 얼른 누나의 손에서 옷을 받아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다.
“목욕 먼저 하겠어. 네가 시중을 들어.”
“네, 아가씨.”
목욕 시중을 들라는 말에도 멜로디아는 불평이 없었다. 오히려 기꺼운 기색으로 드레스를 벗겨 주고, 머리를 내려 주었다.
“발이 아파. 구두부터 벗겨.”
의자에 털썩 앉으며 발을 내밀었다. 노골적인 행동이었지만, 멜로디아는 상대가 자기에게 악의를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악의 어린 사람과 많이 접촉해 보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었지만, 이다는 그 모습조차도 눈에 거슬렸다.
멜로디아는 이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굽이 높은 구두를 벗겼다. 멜로디아는 이다의 발목이 퉁퉁 부은 것을 보았다. 다리가 붓는 체질인지, 이다의 발은 안쓰러울 정도로 부어올라 있었다. 가볍게 발목을 쥐고 몇 차례 주물러 주었다. 아르디온을 돌보면서 생긴 습관 중 하나였다. 이다가 놀라서 발을 뺐다.
“뭐 하는 거야?”
“아, 발목이 아플 것 같아서요.”
바닥에 꿇어앉아 상대를 올려다보고 있으면서, 멜로디아는 그저 선하게 웃었다. 이다는 당황했다. 한 번도 이런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이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다른 쪽 발을 내밀었다.
“그런 건 됐어, 어서 씻고 싶어.”
저도 모르게 이다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멜로디아는 여전히 순순하게 이다의 다른 발에서 신을 벗겨 주었다. 다리가 원래 잘 부으시나요, 같은 물음을 다감하게 건네기도 했다.
이다는 멜로디아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했다. 미리 준비를 해 둔 것인지 욕조에 물은 가득 차 있었지만, 식은 것인지 미지근했다. 따뜻한 물이 필요했던 이다는 살짝 인상을 썼고, 멜로디아는 당황해서 얼른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아가씨. 물이…… 데워 드릴게요.”
그러면서 멜로디아는 얼른 뜨거운 물을 틀었다.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할 것 같더니 이런 면도 있네. 졸지에 이다는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치고 욕조 앞에 멍하게 서 있게 되었지만, 멜로디아가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아까 같은 앞뒤 없는 불쾌감은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금방 배울게요.”
복도 청소나 방 정리, 주방 보조 같은 일에는 익숙해졌지만 아무래도 이쪽에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피곤할 이다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다는 생각 외로 너그럽게 대답했다.
“괜찮아.”
욕조 안에 손을 넣어 보려던 멜로디아는 고개를 들어 이다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고 이다는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귀족이었다니 이런 건 잘 모를 수도 있지. 나도 몰라.”
멜로디아는 빙긋 웃었다. 자기와 동갑이라는 아가씨와,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가씨는 사려 깊은 분이네요. 곧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할게요.”
이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을 다시 따뜻하게 한 뒤, 멜로디아는 이다의 가운을 받아 다른 곳에 걸었다.
이다는 욕조로 들어가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그리 큰 욕조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다는 머리를 감겨 주려는 멜로디아를 보고 물었다.
“머리는 감길 줄 알아?”
“아, 해 본 적은 없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이다는 약간 의구심이 일었다. 어머니는 왜 이 사용인에게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걸까. 급하게 결정된 사항이라는 걸 모르는 이다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도와줄 사람을 불러. 그게 더 빠를 테니까. 난 어서 씻고 쉬고 싶어.”
“네, 아가씨.”
막막하긴 했는지 멜로디아가 사양 없이 일어났다. 멜로디아가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이다는 물에 떠 일렁이는 제 적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새 사용인에 대해 생각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유형이었다. 얼굴이나 몸짓은 수도 아가씨들 같으면서……. 마음이 복잡했지만 멜로디아의 세심한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이다는 긴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하녀일 뿐인걸. 열다섯 살 아가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평민들은 상상한다. 어린 귀족 아가씨는 하루 종일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를 것이며, 화창한 날에는 유화를 그릴 것이고, 어려운 셈을 하고 책을 읽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했다. 지방 남작의 딸인 이다 트리톤은 가정 교사를 여럿 부를 정도로 좋은 환경에 있지는 못했다. 비용 문제도 있지만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귀족 출신의 가정 교사가 많지 않다는 문제가 더 컸다.
그렇기 때문에 이다는 악기도 그림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니, 수도로 올라가기 전까진 분명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다의 실력은 수도 귀족들의 수준에 댈 것은 못 되었다.
“피아노, 치워 버려.”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날 아침 이다는 내뱉듯 지시했다. 멜로디아는 이다의 침실 한쪽에 놓인 피아노를 보았다. 계속 덮개를 치우지 않기에 피아노에는 취미가 없나 보다고 짐작하긴 했지만, 치워 버리라고 할 줄은 몰랐다. 피아노는 귀족 아가씨들이 필수적으로 배우는 악기 중 하나였다.
“네, 아가씨.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
“싫어해.”
이다는 딱 잘라 말하고 멜로디아를 거울 앞으로 불렀다. 멜로디아는 이다의 머리를 다시 만져 주고 드레스를 바로잡아 주었다. 곧 오찬이었다. 이다는 식사 때마다 아이처럼 침대에서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남작 부인이 불러 그녀의 방으로 가야 했다.
“멜로디아와는 잘 지내니?”
식사 도중, 남작 부인이 이다에게 물었다. 이다는 곁에서 시중을 드는 멜로디아와 아르디온을 흘끗 바라보았다. 대답은 짧았다.
“네.”
“배울 점이 많을 거야. 서로 친구처럼 지내면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면 좋겠구나.”
그때 이다는 멜로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곁에 서 있던 멜로디아는 이다와 눈이 마주치자 습관처럼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멜로디아는 이다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었는데,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알았어요.”
이다는 다시 짤막하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트리톤 저택에서 멜로디아의 위치는 애매했다. 멜로디아는 남작가 안주인의 총애를 입었으며, 그 덕에 이다의 시녀가 되었다. 특별히 귀족 출신 시녀를 두지 않는 가풍임에도 남작 부인은 이다와 멜로디아가 서로 친구처럼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곧 시선을 멜로디아에게로 돌렸다.
“멜로디아, 악기나 그림은 얼마나 배웠지?”
“부족한 실력입니다. 그저 교양 수준이에요.”
“이다와 함께 해 보렴.”
“네, 부인.”
멜로디아는 또 그 선한 웃음을 띠우며 대답했다.
식사가 끝나고 이다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멜로디아는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솔직한 표정이네, 하고 이다는 생각했다. 악기나 물감을 다시 만져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기쁜 것 같았다.
“저어, 아가씨. 정말 피아노를 치우실 건가요?”
이다의 머리 장식을 바꿔 주다가 멜로디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다는 거울을 통해 멜로디아의 얼굴을 보았다. 기대감이 서린 얼굴. 멜로디아가 자기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기묘한 우월감이 이다의 가슴을 채웠다.
‘그래, 마음을 좁게 먹으면 안 돼. 어차피 시녀 아이일 뿐인걸.’
“쳐 보고 싶어?”
“네.”
“좋아, 쳐 봐.”
“아가씨는 참 친절하세요.”
멜로디아는 누가 봐도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이다는 종달새 모양 핀과 보석으로 새롭게 장식된 자기 머리를 한 번 확인하고 피아노 옆으로 갔다. 멜로디아가 피아노 건반 뚜껑을 열고 의자에 앉았다.
“어떤 곡이 좋으세요?”
“글쎄, 칠 수 있는 걸 쳐 봐.”
멜로디아는 잠시 앉아서 곡을 골랐다.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몇 달은 지나, 제대로 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곧 멜로디아는 건반 위에 부드럽게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왼손 반주부터 시작해 감각을 익히고, 두 박을 쉬고 바로 연주로 들어갔다.
이다는 잠시 듣다가 멜로디아가 연주하는 곡이 엘가의 ‘사랑의 인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율한 지 오래된 피아노라 음색이 완벽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다는, 눈을 살짝 내리뜨고 건반을 바라보는 멜로디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힘 있게 건반을 누르고 또 가볍게 떨어졌다. 손목부터 느리게 올라오며 차례로 건반을 짚어 가는 두 손. 드러난 목부터 허리까지의 선이 무척 곧았다. 연주에 맞춰 페달을 밟을 때도 허리와 두 팔의 균형은 그대로였다.
소리가 점차 작아지며 연주가 끝났다. 소리가 완전히 멈추기를 기다려 건반에서 손을 뗀 멜로디아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이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라 실수가 많네요. 아가씨도 쳐 보실래요?”
물론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다. 이다는 피아노를 잘 치진 못했지만 잘 들을 줄 알았다. 이다가 듣기에도 멜로디아의 연주에는 빈틈이 많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멜로디아의 연주는 듣기 좋았다. 스스로를 다그치는 연주가 아니라 느긋하게 즐기며 만드는 연주였다.
“난 됐어.”
이다는 고개를 저었다. 보는 사람은 없지만, 멜로디아가 연주한 다음 바로 연주하고 싶지 않았다. 수도 사교계에서 받은 은밀한 멸시와 비웃음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다는 피아노 앞에서 비켜선 멜로디아를 바라보았다. 너도 내 연주를 들으면 비웃을까. 난처하다는 듯 입을 가리고 속닥거릴까. 연주 도중 노골적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신호하듯 눈을 찡긋거릴까.
울컥, 오기가 치솟았다.
이다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멜로디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악의 없는 얼굴인 건 알지만 마음이 한번 뒤틀리자 모든 것이 다 거슬렸다.
멜로디아와 같은 곡을 골랐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멜로디아가 실수한 부분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손가락이 엉키고 페달을 밟을 때마다 박자가 어긋났다. 멜로디아의 시선을 의식한 상태로 그런 실수를 반복하자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연주한 건, 정말로 자존심 때문이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이다는 한동안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심하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어쩐지 몸이 뜨겁고 숨이 가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