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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



이계농부 1권 (1화)
프롤로그


백두산의 은은한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보고 들리는 것은 사람들의 거친 음성과 자욱한 피 냄새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싸움이 한 무리의 승리로 끝났고, 그로 인해 더 이상 백두산이 쿨럭일 일은 없어졌다.
‘이겼구나!’
백두권법의 계승자 중 하나인 을지철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상대편의 중원인들은 모두 쓰러졌지만, 자신 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치기만 했을 뿐 모두가 두 다리를 곧게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권기조차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는 을지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번의 중원인들은 저번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어서 활약할 순간이 더더욱 없었다.
“철아!”
“혀, 형님!”
힘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죽기 직전의 중원인이 을지철을 강하게 밀었다. 상황을 인지했을 때, 을지철의 몸은 이미 지상을 벗어나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절벽이다. 사람들에게는 운치가 있다고 해서 절경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작금의 을지철에게는 전자에 대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마 천운이 있더라도 이 절벽에서 떨어져 살아남기는 힘들 것 같았다.
사형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싸움은 우리들의 승리요, 이 한 몸 사라진다고 해서 백두권법이 계승되지 않을 일은 없으니까. 끝으로, 약간은 어처구니없었지만 미련은 남지 않았다.
스승님은 무엇이든 간에 미련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 해 보는 게 더 낫다는 것이었다.
을지철은 두 눈을 감았다. 저승으로 가면 기억이 모두 지워진다고 하니, 죽기 직전까지 지금까지의 일을 회상하기로 했다.
번뜩.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을지철의 눈은 정말 번뜩이며 떠졌다.
그래도 막상 이렇게 돼니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는지 약간은 멍한 듯한 눈빛도 보인다.
을지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실은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더 다가오는 법이고,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반갑네.”
“반갑습니다.”
누군가의 인사에 을지철은 놀라지 않고 인사를 받았다.
외양을 볼 때 저승사자가 분명하고, 방금 들었던 목소리도 으스스해서 저승사자인 게 확실했다.
“별로 당황하지 않는군?”
“그렇지요.”
을지철은 여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은 ‘분명히’ 죽었고, 그런 상황에서 나타날 사람은 저승사자밖에 없었다.
을지철은 여유롭게 저승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기까지 했다. 그래도 처음 만난 사후 세계의 사람인데 깊게 쳐다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역시 처음에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눈 밑으로 깔린 짙은 어둠과 까만 갓, 그리고 도포까지 갖춘 노인 저승사자였다.
이때 뜬금없는 저승사자의 말이 흘러나왔다.
“축하하네.”
“예?”
을지철은 당황했다.
저승사자가 무심하기로는 제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닌가? 죽은 것을 축하한다니? 을지철은 한참 위의 저승사자지만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얼굴이 빨개지려는 그 시점에서 저승사자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자네는 두 번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
“예?”
“아, 정확히 말하면 두 번의 인생은 아니지, 죽기 직전에 데려왔으니.”
일단 화는 내지 않을 것이다. 죽은 것을 축하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더 이상한 느낌이 든다. 두 번의 인생을 산다니? 아니, 아니 죽기 직전에 데려왔다니? 을지철은 자신이 ‘죽었음’을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승사자는 말을 살짝 바꿔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놀림이 지나치십니다!”
“놀림이라니?”
“저는 죽은 것에 미련은 없습니다. 한데, 그렇대도 놀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승사자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오히려 역공했다.
“싫은가?”
“무엇이요?”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저승사자의 표정은 지극히 평범했다. 너무나 평범해서 도저히 장난을 치는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한데도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죽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가?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 높이가 매우 높고 푸르다 하여 절경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곳이다. 떨어져서 살 확률은 정확히 0할이다. 1푼 1리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저승사자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 있으리.
그때였다. 지금까지의 표정을 지우고 저승사자가 약간의 미소를 띄웠다.
“아, 내 실수했구만. 저승에만 있어서 산 사람의 심경을 잊어 버리고 말았어.”
“…….”
“나는 저승 제7구역에서 저승사자의 직책을 맡고 있지.”
역시나 노인은 저승사자였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자신을 놀린 것도 완전히 사실이 된다.
을지철은 약간 벌게져서는 말했다.
“아무리 저승사자라고 하셔도 죽은 사람을 놀리다니 너무하십니다.”
“놀리다니?”
“제가 살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죽기 직전 데려왔다는 말은 저승사자가 살려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상식적으로 이건 말이 안 된다.
저승사자가 누구인가?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인이다. 그런 안내인이 저승으로의 길을 안내하지 않고, 살길로 사람을 인도하다니? 지나가던 개도 어이없어 오줌을 갈기고 갈 것이었다.
저승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을지철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저승사자에게 이만 화를 풀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저승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을지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놀림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겠구만. 하지만 사실이네. 자네가 죽기 직전 나는 이곳으로 자네를 데리고 왔어. 믿을 수 없지? 죽은 사람을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어째서 죽으려 하는 사람을 살려 주었는지 말이야.”
“…….”
“내가 저승에서 100년 동안 공헌을 했는데, 염라님까지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나의 복수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소원을 하나 빌 수 있는 기회를 주셨네.”
“…….”
“나는 소원을 사람 한 명을 데려오는 것으로 했네. 물론 현실성이라는 것에 만족하기 위해 어떠한 저승법에도 어긋나지 않게 해야 했어.”
눈만 껌뻑거리는 을지철을 바라보면서 저승사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 어려운 일이었네. 사람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으로 나뉘는데, 이 두 가지 경계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야.”
“…….”
“그런데 나는 깊은 고민 끝에 한 가지 빈틈을 찾았지. 바로 ‘죽기 직전’의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야. 죽기 직전의 사람은 아직 살아 있지만 살 의지가 없을 수 있거든. 그러면 나는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거야.”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전면의 을지철을 두고 저승사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곧 어려운 일임을 느꼈지. 아무리 죽을 위기의 사람이라도 반드시 살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네. 말했듯 이런 경우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내가 손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
“뭔가 알겠습니다.”
“알겠다니?”
“저는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살 의지를 1리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죽겠다는 생각만 하고 두 눈을 감았더라지요.”
저승사자가 호호 미소를 지었다. 길게 설명하여 입이 아프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종결이 되니 어찌 미소를 짓지 않으리.
한데, 그때였다. 을지철이 대뜸 노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큰 절을 세 번 올렸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구해 주셔서 다시 백두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드릴 일이겠습니까?”
기쁜 표정의 을지철과 달리 저승사자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이내 그의 고개가 가로저어진다.
“흠… 자네는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어.”
“예? 아… 은혜라면 당연히 갚고 가겠습니다. 설령 그게 몇 년, 몇 십 년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몇 년, 몇 십 년 후에 백두산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너무 늦은 시간이 될 것이다. 하나, 을지철은 이렇게 된다고 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사에서 생으로 오는데 수십의 시간이 무어 아까우랴?
그런데 저승사자의 고개가 또다시 가로저어지는 것이었다.
“몇 백, 몇 천 년을 하더라도 불가능하네.”
“예?”
“자네는 카라파시스 대륙에서만 은혜를 갚아야 해.”
“카라… 파시스……? 대체 무슨 말이십니까?”
발음하기조차 힘든 지명을 대며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저승사자는 붕어마냥 두 눈을 꿈뻑거리는 을지철을 향해 가볍게 입을 열었다.
“난 코드라스라고 하네. 이제부터 자네에게 농사법과 카라파시스 대륙의 100년 전 정보 등 많은 것을 알려 주겠네. 자네는 내가 알려 주는 것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카라파시스 대륙의 벨스로크 왕국의 서쪽 변방에 있는 더트퍼리에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면 되네.”



01장―건축 의뢰 (1)


놀라운 대륙 카라파시스. 여타의 대륙들의 크기가 1이라면 카라파시스 대륙은 그보다 열 배는 더 크다는 이유로 ‘놀랍다’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물론 타 대륙인들이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러한 수식어를 듣고 약간은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커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대평야의 언덕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는 느낌이랄까? 고로, 좋아서 관광을 가면 갔지 싫어서 카라파시스 대륙을 욕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카라파시스 대륙의 서쪽에는 거대 왕국, 벨스로크가 존재하고 있었다. 대륙의 4할을 차지하는 제국의 영토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여타의 주변 왕국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커다란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게 되었다.
세인들은 벨스로크 왕국하면 다른 무엇보다 삼 후작과 칠색기사단, 그리고 왕권을 떠올린다.
일단 삼 후작은 벨스로크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대항구도시, 대황금 평야, 대군사 지점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이들은 제2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삼후작, 그러니까 후작의 힘이 강해 봐야 공작만큼 강하겠느냐고. 하나 이 말은 애초부터 틀렸다. 벨스로크 왕국에는 공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작이 되기 위해서는 인구가 300만 명, 발전 건물이 3만 개, 연간 소득이 10조 우옴을 넘어야만 가능했다. 백작에서 후작이 되기도 어려운 마당에, 후작에서 공작이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어서 칠색기사단. 벨스로크 왕국의 최상위에 있는 일곱 개의 기사단은 저마다 각 단을 대표하는 색깔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 일곱 색깔을 필두로 총칭 칠색기사단이라 칭했다. 왕조차 칠색기사단이라는 표현을 써서, 이제는 완벽하게 하나의 수식어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칠색기사단은 각 단마다 ‘커다란’ 특징이 있다. 바로, 쓰는 무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적기사단은 검을 사용하지만, 청기사단은 창을 사용한다. 또, 황기사단은 봉을 사용하지만, 흑기사단은 도끼를 사용한다. 한데, 이처럼 쓰는 무기가 모두 다름에도 그 힘만큼은 삼 후작과 마찬가지로 서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칠색기사단은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우스갯소리를 하려는 이만 제외한다면 백에 백은 왕에 소속된다고 말할 것이다. 아니다. 왕에게 소속된 칠색기사단의 수는 단 넷에 불과하다. 나머지 셋은 하나씩 나뉘어 삼 후작에게 각각 소속되어 있다.
사람들이 벨스로크 왕국을 떠올릴 때 ‘왕권’이라는 부분이 빠지지 않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벨스로크의 국왕은 그 힘이 약간은 미미하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어느 이름만 존재하는 왕 정도는 아니지만, 귀족 회의라든지 하는 것을 해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올 때는 늘 삼 후작과 같이 의논해야 했다.
하나 크게 부딪힘은 없었다. 옛날부터 이래 왔고, 또 대대로 벨스로크의 국왕들이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중요시해서 오히려 반대로 삼 후작과 같이 의논해서 결정을 내리는 게 맞다고도 생각할 정도였다. 단지 사람들에게는 벨스로크의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보여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