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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25화)
11장―본격 (4)


‘마우전트 자작님이 백작만 되더라도 우리에겐 손해가 없다.’
백작 밑으로 들어가게 되면 비록 귀족이라는 신분은 얻을 수 없지만, 편안한 삶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촌장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지에 살고 있는 모든 단지민에게 해당된다.
쉽게 말하자면, 타지에서 들어온 이주민들은 똑같은 ‘평민’의 위치에 서게 되지만, 힘을 합쳤던 단지민들은 그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행동이 자유로워질 뿐더러 내는 세금의 양도 현저히 줄어든다.
더구나 마우전트가 결정적으로 한 말이 있었다.

“땅의 소유권을 드리리다.”

사실 자유 영토 혹은 귀족이 아닌 이상은 땅을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은 법이요, 법칙이기 때문에 어겼을 시 그에 마땅한 벌을 받게 된다. 한데, 귀족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소유권을 주는 것은 가능한데, 그것이 마우전트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태에서 결국 저 말은 하겠다는 의지의 신호탄이 되었다.

“좋습니다.”
“흠… 그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씩 합쳐지는 단지들. 보통 중도시의 면적에 불과했던 포르텡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새로이 제2의 수도로 군림하려는 포르텡인 것이다.
국왕은 어지러운 분위기 속에 텁텁한 음성을 내뱉었다.
“경들도 잘 알 것이오. 제2의 수도, 그러니까 초특대도시의 조건은 인구 300만, 연간 소득이 10조 우옴, 토지가 평균 도시 면적의 열 배를 넘어야 하오. 한데 마우전트 경의 포르텡은 이 조건을 거의 만족했소.”
“…….”
샤라 후작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보여지지 않았지만, 즈비라 후작에게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맴돌았다.
보다 더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다.
‘진작 수를 써야 했어. 이 일을 어찌 한다…….’
즈비라 후작의 걱정을 뚫고 국왕의 텁텁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그의 음성이 텁텁한 까닭은 삼 후작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싶은 마음에서 이리라.
“고로, 투표를 할까 하오.”
“투표요?”
“그렇소. 공작을 뽑아야 한다는 민원이 많기에 이 자리에서 공작을 뽑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절대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공작을 뽑아야 할 것 같소. 아, 그리고 마우전트 경, 이렇게 투표를 해야만 하는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겠소?”
국왕의 앞선 말처럼 포르텡은 초특대도시의 조건을 거의 만족한 상태였다. 당장 도시 단계가 상승하더라도 문제가 없고, 마우전트 후작의 계급이 공작으로 직위가 상승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사실 굳이 공작이 필요 없다면, 국왕의 입장에서는 삼 후작의 경계가 나을 테니…….’
마우전트도 이런 부분에서는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현 시점에서 벨스로크 왕국은 공작이 크게 필요가 없다. 그 까닭은 지금까지 공작이 없었음에도 왕국에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왕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삼 후작이 지금처럼 경계를 갖추고, 서로 친우처럼 지내는 게 나은 것이었다.
마우전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투표가 어찌 되든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소.”
국왕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우전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그 누구라도 우정과 신분 사이에서 갈등을 하라고 한다면 모두가 신분을 택할 것이었다. 더구나 신분이 후작에서 공작으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더더욱 갈등하지 않을 것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공작은 왕 바로 아래의 ‘최고’이기 때문이다.
‘샤라 경이라면 모를까, 즈비라와 마우전트 경이 진실된 친우가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실상은 이런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삼 후작이 모두 ‘친하다’라는 것으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국왕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만약 마우전트 경이 공작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조건이 맞아서 간신히 거짓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인데 그중 누구 하나가 계급이 올라간다면 어찌 되겠는가?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하다.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국왕은 일단 ‘투표’에 관해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했다. 말은 당장이라도 투표를 할 것처럼 말했지만, 행동으로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누누이 말했듯이 삼 후작의 경계를 최대한 지켜야 하니까.
“투표는 다음 회의에 하도록 하겠소. 모두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마우전트 후작에게는 쓴소리였지만 즈비라 후작에게는 단 소리였다. 그는 이것은 기회로 삼고자 했다.
‘다음 회의까지 3개월. 그때까지 방도를 마련해야겠군.’
이후 회의는 매끄럽게 흘러갔다. 사실 첫 번째 안건이 제일 신중하고 고뇌스런 문제였고, 나머지는 별 다를 게 없었다.
한데,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첫 번째 안건에 비등하는 안건이 터지게 된다.

***

더트퍼리의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육묘장에서 들여온 모는 조금씩 그 크기를 키워 노란 미래가 보였다. 그리고 마치 그 모를 따라가듯이 하늘은 보다 푸르게, 새들은 보다 높이, 나무는 보다 더 튼튼하게 모양을 갖추었다.
이제 그 누구도 더트퍼리를 폐허라 부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저주 따위, 적어도 이 근방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 되어 버렸다.
‘후.’
퓨리스는 덩키 산맥에 올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바쁜 터라, 이렇게 수련에 열중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주먹.’
이 세계 무술에서 주먹을 이용한 것은 전무하다. 모든 것이 무기에 관해 전투와 수련을 하게 되어 있다. 마법사라는 존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형상이 없는 무기를 소유하고 있으니 제외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주먹으로 싸운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이상한 소리 그 이상밖에 되지 못한다.
처음 퓨리스의 무술을 보았던 더트퍼리민들의 반응은 사뭇, 아니, 심각했다.
“주먹……?”
“주먹으로 싸운다 하였는가?”
“허허…….”
모두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퓨리스라고 해도 주먹으로 싸운다는 그의 말에 기쁘게 웃음을 터뜨릴 이는 없었다. 물론 뒷골목의 불량배가 주먹을 쓰기는 하나, 퓨리스는 그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지 않는가?
하나 퓨리스는 주먹을 제외한 것으로는 수련해 본 적이 없었다. 검을 몇 번 써 보기는 했지만 손에 맞지도 않고 흥미도 생기지 않아서 당장 내려놓았다. 더구나 퓨리스의 스승이 권사였으니 더더욱 다른 것을 쓸 일이 없다.
‘상관없다.’
처음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싸운다고 생각해서 고민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이전 세계에서 주먹으로 충분히 검을 상대할 수 있었고, 그것은 무기가 활이 되던 창이 되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권사는 첫인상으로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었다. 흔히들 권사는 일대일의 대련에서만 좋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다수의 적을 맞는 대결에서도 충분히 위용을 뽐낼 수 있다.
‘기권을 이용해서 각(角)을 쓴다면 날카로운 ‘가짜 화살’을 날릴 수 있다.’
날아가는 모양이 뿔의 형상을 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각권은 그야말로 다수의 적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아니, 위협을 넘어 치명타도 입힐 수 있는 기술이다.
또한 기를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수도 있다. 퓨리스는 팔을 접어 교차시켰다.
파리릿―
번쩍번쩍하는 기(氣)가 그의 손에 그대로 형상이 되었다. 퓨리스는 생각했다.
‘이곳에도 기를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 많다 하셨다.’
그들은 기를 신체에 쓰는 것이 아니라 무기에 사용했다. 즉, 기를 검에 씌워서 기검을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놓고 보면 열에 열 모두가 기검이 기권을 이길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것은 불변이다.
‘조선에도 기검을 쓰는 자는 있었다.’
퓨리스는 이곳에 오기 전 기검인과 겨루었다. 동료가 있었고, 기검인들도 동료가 있었다. 쉽게 밀리지 않았다. 호각이면 호각이지 어느 한편이 밀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퓨리스는 싸우던 도중 운명을 달리했을 뿐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조선과 이곳은 확실히 다른 세계지만 검사 자체는 똑같다. 만약 이곳에서 기검인과 싸울 경우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것이다.
퓨리스는 번쩍이는 주먹을 커다란 바위의 전면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합!”
계란으로 바위치기. 바위 앞에서 사람의 주먹은 계란과 같다. 한데 이 말이 퓨리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산산이 부서진 바위를 두고 주먹이 계란이라는 말을 어찌할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법은 딱 두 가지.’
퓨리스는 스승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바위를 계란보다 무르게 하거나, 계란을 바위보다 강하게 만들면 된다. 퓨리스는 후자대로 수련에 임했다. 그것이 눈앞의 자글자글한 바윗 조각을 만든 것이었다.
옆에 있던 바위도 퓨리스의 주먹을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다. 아직 퓨리스는 기를 완벽하게 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기는 충분하지만, 쓰고 싶을 때 쓸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곳에서도 싸우겠지.’
싸우기 위해 수련을 한 것은 아니다. 수련을 해서 싸운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이 악이었기 때문에 수련했고, 그래서 싸웠다.

***

귀족 회의는 매우 매끄럽게 진행됐다. 하지만, 딱 한 번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하는 일이 한 번씩 있었으니 그 주인공이 스케일 남작이다.
일단 시작은 좋았다. 스케일이 밝게 미소 지었다는 얘기다.
“변방 지역의 발전의 표본이오, 큐스는.”
“가, 감사합니다.”
중요 안건이 넘어가고 분위기가 조금 풀리면서 흘러나온 국왕의 음성이었다. 하나, 스케일은 이때까지도 말을 더듬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고, 국왕에게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은 여전히 주눅을 들게 했다.
그래도 칭찬인지라 스케일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한데 말이오.”
“예……?”
“사실 스케일 경은 어찌 되더라도 귀족 회의에 참석은 하였을 것이오. 내 경의 노력을 알고 있고, 또 큐스가 나날이 발전하고 발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오. 하나, 그게 지금은 될 수 없었을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스케일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국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더트퍼리가 경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소.”
“…….”
스케일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뭔가 불안했다. 더트퍼리라는 네 글자에 불과한 단어가 이상하리만치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한데, 이상한 일로만 느낄 것은 아니었다.
공간 전체에 일렁임이 있었다. 본 모습을 유지하는 사람은 국왕과 삼 후작뿐이었고, 스케일을 비롯한 모든 귀족들의 만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 떠올랐다.
적어도 더트퍼리라는 지명은 이곳에서 나올 이유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날카로워진 눈빛의 국왕이 말했다.
“더트퍼리에 대해 몇 가지만 묻겠소.”


≪이계농부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