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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24화)
11장―본격 (3)
즈비라 후작은 들고 있던 음료는 모두 비워내고 손이 닿는 곳에 내려놓았다.
“내 진작 물어보려 했지만, 회의에서 국왕의 말과 함께 듣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여태껏 물어보지 않았지. 어쨌든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이따가 회의가 시작했을 때 들어도 괜찮을 것 같으니.”
그러면서 삼 후작은 등을 돌렸다. 삼 후작이 직접 찾아온 것 치고는 짧은 대면이었다. 하나 스케일 남작에게는 1년 같이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또한, 즈비라 후작의 알 수 없는 마지막 말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뭔가 있었다는 건가?’
하나 귀족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서 머릿속이 텅텅 비어 버렸던 스케일 남작이었던지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냥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밖에 없었다.
회의실에 서 있는 사람이 없고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았을 때,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물론 가장 상석에는 당연히 국왕이 앉아 있었고, 그 양옆으로 기다랗게 귀족들이 앉은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끝 줄, 그러니까 국왕과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스케일 남작이었다.
‘후.’
하나 스케일 남작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아무런 반감도 가지지 않았다. 계급도 가장 낮은 데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더구나 앞에 앉더라도 회의에 안건을 내는 입장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이 자리가 적당하다고 느껴졌다.
국왕의 입술은 일단은 회의 밖으로의 말을 시작으로 부딛혔다.
“모두들 그간 안녕했는지 모르겠소.”
“저희야 모두 안녕했습니다. 국왕께서는 어떠셨습니까?”
“본인도 마찬가지라오.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 행동만 맞춰 주었소.”
잘 들어보면 국왕의 말에는 자신의 삶이 조금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귀족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이 시점에서 자신들이 국왕의 삶에 참견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었고, 참견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국왕의 저러한 말을 이번에 처음 들어보는 것도 아니었기에 귀족들의 행동은 오히려 담담하기만 했다.
국왕의 인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 이번 회의에도 모두가 빠짐없이 참석했소?”
“예,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자리했습니다.”
“그것 참 좋은 일이군. 아, 스케일 경도 왔소?”
아무 생각도 없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면 흠칫 놀란다고 했던가. 스케일 남작은 얼떨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그만큼 상황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말을 떠듬거리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부, 부르셨습니까!”
“하하, 그리 놀랄 것 없소. 그저 참석한 소감을 듣고 싶어 그런 것이야.”
“아아, 소, 소감이라면…….”
자신에게 질문이 들어올 수도 있겠다 싶어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정해 놓은 상태였지만, 지금 국왕이 던진 질문은 예상에 없던 것이었다.
스케일 남작은 얼버무리면서 시간을 끌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이렇게 큰 자리에 참석한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다르게 할 말은 없고, 위엄과 긍지가 높은 이 회의에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알겠소.”
하얗지만 머리칼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단순히 ‘노인’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니 그의 위치를 감안해 볼 때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젊은 사람’으로 불리겠지만, 어찌 되었든 확실히 그의 외양은 좋았다. 굳이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옷을 입지 않아도 충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근엄한 위엄의 국왕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겠소.”
“예.”
스케일 남작은 귀족 회의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국왕, 또는 누군가로부터 안건이 나오면 그걸 가지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귀족 회의라 한들 평범한 회의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렇단 얘기는 쓰러져 가는 천막에서 하는 회의나 이처럼 화려한 공간에서의 회의나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국왕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공작에 관한 민원이 들어왔소.”
“흐음…….”
다른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의 생각을 했는데, 스케일 남작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에 관한 민원?’
현재 벨스로크의 왕국에서 공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옛날에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공작이 존재했었다는 얘기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어찌 되었든 특대도시를 운영하는 세 명의 후작은 존재하지만 공작은 없다.
이것은 삼 후작의 힘이 너무 균등한 탓에 공작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명의 후작을 두고 한 명은 공작의 직위로 올려야 한다는 얘기인가?’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현재 시점에서 공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은 결국 삼 후작 중 한 사람. 물론 둘 이상의 후작이 공작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왕국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이례적인 일이라 아닐 듯싶었다. 물론 벨스로크 왕국을 제외한 곳들은 다 공작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미 이례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머리를 굴리는 스케일 남작의 귓전으로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삼 후작 중 하나를 공작으로 올리면서, 도시의 단계도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는 민원이오.”
“도시의 단계까지 말입니까?”
“그렇소. 아무래도 그 공작의 도시는 제2의 휄븐이 되지 않을까 싶소.”
스케일 남작의 짐작은 거의 맞아떨어졌고, 이제야 공작에 관한 민원이 들어온 이유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삼 후작의 영지에서 민원이 들어온 모양이군. 자신의 영주가 공작이 되면 자연스레 살기가 더 편해질 테니. 더구나 도시의 계급이 오른다면 인구와 발전 속도는 말도 안 되게 커질 것이고, 땅 또한 넓어질 것이다. 허… 큐스는 그저 바람 앞의 등불로구나.’
마지막을 한탄으로 장식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스케일 남작의 생각은 틀린 것이 없었다. 자신이 사는 곳의 영주의 계급이 높아진다면 영지 민들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들어오는 예산이 커지면서 보다 더 발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백작 이하의 영주라면 모를까, 삼 후작 중에서 비리가 있는 인물도 없을 테니…….’
다른 귀족이라면 모를까, 삼 후작은 절대로 ‘머리가 나쁘지 않다’. 굳이 뒷돈을 받거나 지나치게 세금을 올려 받지 않아도 충분히 호화스런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게 아니더라도 삼 후작의 영지 민들은 민원을 넣는 게 가능할 정도로 꽤 권리가 높아서 비리를 저질렀다간 그 날로서 귀족의 생명은 끝이었다.
첫 번째 안건이지만 공작에 관한 것은 꽤 중요한 문제였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즈비라 경.”
“이번 회의는 이전처럼 그 민원에 대해 토론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공작을 뽑는 것입니까?”
“흠… 전자와 후자의 중간쯤으로 생각하시오.”
“알겠습니다.”
사실 국왕도 입장이 난처하기는 했다. 현 시점에서는 삼 후작의 균형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데, 계속해서 들어오는 민원 때문에 회의가 열릴 때마다 이 안건을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권의 권위가 평민의 민원 권리보다는 충분히 세지만 국왕의 곧음이 그것을 받아 주지 않았다.
한데, 이번만큼은 이전처럼 민원에 대해 토론하는 식으로는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래 들어 언제까지 공작을 뽑는 것을 미룰 것이냐는 민원이 속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국왕은 뜸을 들이면서 입을 열었다.
“내 이번 회의가 열리기 앞서 즈비라 경의 쿠바크, 샤라 경의 옐도르, 마우전트 경의 포르텡까지 세 특대도시의 재정과 발전을 포함에 여러 가지를 두루 살펴보았소.”
“…….”
“그리고 나온 결론은…….”
국왕은 놓여 있는 차를 두어 모금 정도 마신 후, 적신 입술을 열었다.
“마우전트 경이 현 시점에서 공작에 가장 가깝고, 또 포르텡이 제2의 수도로 이룩될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다는 것이오.”
“…….”
공간에 적막이 흘렀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적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들리지 않을 뿐이지 여러 귀족들이 저마다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마우전트 후작님이 공작이 되는 모양이야.”
“아직 확실시 된 건 아니잖은가?”
“그도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놀랍구만.”
“군사 도시의 영주가 공작이 된다는 것이?”
“그렇네. 사실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이례적인 일이지.”
“하지만 마우전트 님이 후작이 된 것부터가 이미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기는 하지. 군사를 제외한 사람으로 인구 300만을 채우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니…….”
“그뿐인가? 연간 소득도 거의 10조 우옴에 다다랐다더군.”
“허, 정황상 공작은 거의 확실시 된 것 같구만.”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즈비라 후작의 쿠바크나 샤라 후작의 옐도르는 각각 곡물과 해양으로서 발전했기에 저만큼의 인구와 소득을 채우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발전될 요소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 마우전트 후작의 포르텡은 주된 요소가 ‘군사’이다. 모름지기 군사 도시라 하면 병사는 많을지라도 민간인은 적은 법인데, 포르텡은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오히려 인구는 왕국 최대였고, 소득은 수도 다음으로 두 번째를 차지했다.
“역시 병사와 민간인을 잘 구분지어 놓은 게 영향이 컸어.”
“맞네. 병사를 전면 배치해 놓고 그 뒤로는 사람이 살 수 있게 했으니… 평민들이 이주권이 나오면 모두 포르텡으로 가는 게 그런 이유지. 그리고 소득이야 사람이 늘어나니 당연히 커졌던 것이고…….”
“거기에 땅은 오죽 넓어?”
“평균 도시 면적의 열 배쯤 된다더군, 포르텡이.”
“허허, 거 참, 부럽구만. 더구나 군사가 세서 전쟁이 일어날 리도 없으니…….”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땅이 넓고 좋아도 사람들이 모일 까닭은 없겠지.”
귀족들은 대략 이런 식의 귓속말을 주고받았고, 은연중에 마치 마우전트가 벌써 공작이 된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시점에서 애가 타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즈비라 후작이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가.’
사실 즈비라 후작도 마우전트 후작이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다. 30년 전, 지금은 세상을 떠난 샤라의 부친과 이(二) 후작을 형성하고 있을 당시, 마우전트 후작의 포르텡은 그저 중도시에 불과했다.
중도시는 영주의 계급이 자작밖에 되지 못하며, 인구와 연간 소득 역시 10만 명과 1,000억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이다. 한마디로 주시할 필요도,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는 그저 그런 ‘상태’인 것이다.
한데, 30년이 흐른 지금 포르텡은 벨스로크 왕국의 최강 도시로 군림했다.
정책을 바꿔, 군사를 전면에 배치하고 최대한 땅을 넓힌 뒤 이주권이 생긴 평민들을 모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 누구도 코웃음을 쳤었지만, 그 당시의 마우전트 ‘자작’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보다 평민들을 더 아껴줄 정도로 사랑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서 마우전트 자작이 벌인 또 다른 일은 땅을 넓히는 일이었다. 근처에 귀족 소유의 영지는 없었고, 단지뿐이었는데 마우전트 자작은 그곳의 촌장(반귀족)들과 합의를 보았다.
“포르텡과 힘을 합치는 게 어떻겠소?”
“흠…….”
사실 땅을 팔면 팔았지 힘을 합치는 경우는 제로에 가까웠다. 평민으로서 땅을 소유해서 이제 겨우 반 귀족에 올랐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남작의 직위를 가질 수도 모르는 입장에서 땅을 합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나 포르텡의 근방에 있는 단지도시 촌장들은 생각을 달리했다. 해가 지날수록 늘어나는 포르텡의 인구와 급속도로 치솟는 연간 소득. 그것은 억 소리가 날 정도가 아니라, 조 소리가 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