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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농부 1권 (23화)
11장―본격 (2)
‘혹시 큐스를 지원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위 귀족들에게는 흔히 ‘투자’라고 불리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스케일이 작금에 생각하고 있는 지원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눈에 띄는 지역, 즉 발전해서 이득을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일종의 밀어주기식 투자를 하는 것이다.
‘발전에 실패하더라도 아주 나쁠 건 없지.’
만약 투자금을 받았는데 도시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하나 잃는 것은 없다. 애초부터 빌려 줘서 돈을 되돌려 받겠다는 의미가 아닌 단순한 ‘도박성 투자’의 목적으로 돈을 건네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은 있다.
‘다시 또 투자 금이 들어올 일이 줄어들겠지.’
하나 생각해 보면 이 부분도 아주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 고위 귀족들은 그리 바보가 아니다. 나름 고심하고 고뇌하면서 정말로 ‘발전’할 기미가 있을 때에 투자금을 주기 때문이다.
‘웬만한 귀족들도 고위 귀족들의 투자금에 입을 떡 벌린다 하는데…….’
끝으로, 고위 귀족들이 주는 투자금은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는 막대한 양이기 때문에 정말 바보 영주가 아닌 이상은 자신의 도시를 발전시킨다. 단지 문제는 고위 귀족의 마음에 들만큼 발전을 시키는 것뿐이다.
‘아차차,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구나.’
스케일은 두 손을 넓게 펴서 공손히 방향을 가리켰다. 라후엘 자작은 연륜으로도, 지위로도, 명성으로도 한참 위였다.
“혹, 제가 묵고 있는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약소하지만 준비한 것이 있어서…….”
“흐음.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가 보지.”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보통 고위 귀족의 개념은 백작 이상을 칭하는 것이다. 한데, 라후엘은 자작임에도 스케일이 생각하는 투자자의 면모에 적합했는데, 그것은 그와 그의 도시가 ‘부’로서는 백작의 도시 못지않게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신중하자. 조금이라도 밑 보여서는 안 되니.’
혹 많은 시녀를 데려온 것이 귀족들의 눈에 거슬릴까봐 최소한의 시녀만 동행한 스케일은 라후엘 자작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한데, 라후엘 자작을 뒤따르는 시녀들도 그리 많지 않을 걸 보면 그도 누군가에게 잘 보일 마음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사흘 후, 벨스로크 왕국 수도 휄븐의 아침은 유난히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귀족 회의가 열리는 날로서, 자국에 있는 이름 높은 이들이 전부 모이기 때문이었다.
수십 수백의 사람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하루만 열리는 게 어디야?”
“맞아. 이틀만 열렸어도 우린 힘들어 죽을지 몰라.”
“이건 귀족 회의가 아니라 단순히 호화를 즐기려는 게 아닐까?”
“그렇지, 뭐. 그래도 삼 후작까지 오는데 이 정도만 하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
귀족 회의는 왕성 최고로 10층의 제3회의실에서 열린다. 1층과 2층의 회의실이 부지기수로 쓰이는데 반해, 제3회의실은 3개월에 한 번 귀족 회의가 열릴 때만 쓰는 것을 생각하면 ‘공간의 위치’를 짐작할 만하다.
어찌 되었든 제3회의실은 큰 변화를 맞는다. 귀족 회의가 열리지 않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대청소가 열리는 공간이지만, 요 근래만큼은 평소의 곱절에 곱절을 넘는 청소와 꾸미기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쓴소리를 내뱉는 이들은 시녀와 청소부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곳이라면 밖에 안 가도 되겠다.”
“왜?”
“너무 좋잖아.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치우고 꾸몄지만 정말이지 제3회의실은 ‘꿈’을 방불케 했다. 변방 귀족의 내실은 축에도 못 들것이며, 그것은 고위 귀족의 내실을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을 돌리면 보석이 있고, 시야를 넓히면 고귀함이 있다.
존재만으로도 입을 벌어지는 곳.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이 조용해진다. 적막히 흐르고 그것은 확실하게 이 공간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음을 알려 준다.
그때였다.
“오오, 오랜만일세, 라후엘 자작.”
“아, 브롬 자작. 잘 지냈는가?”
“나야 물론. 그러나 저러나 자네 소문이 좋더군.”
“소문이 좋아?”
브롬 자작은 모르는 척하느냐는 투로 가볍게 뱉었다.
“땅을 더 매입했다면서?”
“아아, 땅?”
“쇼스라스 남작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얼마에 샀는가?”
“그리 비싸게는 안 샀어.”
예끼, 하는 표정이 브롬 자작의 얼굴에 드리운다. 라후엘 자작의 크헨 중도시의 남쪽에 자리 잡은 소도시 퍼벌티.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상단보다도 못한 곳이었다.
이르자면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땅이라는 소리다. 근방의 크헨이 부자 도시로서 손꼽히는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나, 이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후엘 자작이 퍼벌티 소도시의 땅을 샀다는 데에 있다.
그 도시가 가난에 허덕일지라도 그 도시의 땅이 쌀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변두리 땅이 아니라야, 땅값이 금값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라네.”
“흐음, 거 참.”
“크헨 근방의 땅은 기름지거나 물과 근접해 있지는 않지만 왕국의 중심부에 있어. 고로, 빈말으로라도 땅을 싸게 샀다는 말을 나올 수 없는 걸세. 그리고 뭐 또 어떤가? 친우끼리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 않은가?”
보통 땅값을 책정하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얼마나 땅이 기름졌나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땅이 얼마나 물에 가깝냐는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앞선 브롬 자작의 말처럼 얼마만큼 중심부와 가깝느냐에 있다.
이밖에도 기후나 환경도 영향을 받기는 받지만 저 세 가지만큼 확정적이지는 못하다.
어쨌든 이 시점에서 라후엘 자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업은 혼자 하는 맛인데.’
물론 지금 대화를 나누는 이가 백작 이상급의 귀족이라면 라후엘 자작은 망설임 없이 얼마에 땅을 샀는지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면 즉각 말해 주는 것이 보다 낮은 귀족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하나, 친우까지 운운하는 상황에서 이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다.
소곤소곤.
그래도 끝까지 공간을 울리게 겉으로는 내뱉지 않는 라후엘 자작. 브롬 자작도 이 부분에서는 무어라 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사업은 혼자 해야 제 맛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들 그리 속삭이시는가?”
“아아, 즈, 즈비라 후작님, 그,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말까지 더듬고. 내 욕이라도 했나?”
“아, 아닙니다. 이리 일찍 오실 줄 몰라서…….”
대화를 나누다가 걸음이 늦어져서 뒷사람에게 따라잡힌 것은 둘째치더라도 후작 즈비라가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의 귀족 회의만 보더라도 그는 다른 두 명의 후작들과 거의 마지막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라후엘 자작이 말까지 더듬으며 놀란 기색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허, 험. 한데 즈비라 후작님의 용모는 갈수록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런 칭찬이라면야 곱씹어 들어야지. 어쨌든 나 먼저 가 보지.”
“예에.”
제3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들어올 수 있는 시녀의 수에도 제한이 있는지라 즈비라 후작의 뒤를 따르는 이들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기가 풍기는 듯했다.
‘특대도시의 영주의 기운은 역시 놀랍군.’
처음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번 드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자신도 저러한 기운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나의 크헨 중도시도 대도시를 넘어 특대도시로까지의 발전을 이룩하겠다.’
이번에 땅을 사면서 더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땅을 사면서 들어오는 이익이 얼마나 많던가? 인구, 건물, 발전 그 모든 것이 향상된다. 비록 크헨이 이렇다 할 특출 난 것은 없지만 그것도 ‘이것저것 합쳐지는 힘’이 있다면 그리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즈비라 후작을 앞서 보내고, 브롬 후작이 숨 막힌다는 말을 내뱉었다.
“매번 느끼는 건데 자네는 말을 참 잘해.”
“내가?”
“그래. 나는 목이 졸려 말도 나오지 않더군.”
그렇다. 즈비라 후작의 기운에 목이 조여 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비단 라후엘 자작의 경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3회의실은 속속들이 도착하는 귀족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고귀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개개인이 범인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풍겨내고 있었다. 그리고 스케일 남작 역시 회의실에 도착한 상태였다.
‘심장이 떨리는군.’
크게 긴장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오랫동안 염원했던 귀족 회의의 참석이었고, 또 막상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에 대해 되레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뛰었다.
‘자작분들께도 주눅이 든다. 즈비라, 샤라, 마우전트 후작님들의 얼굴은 어찌 볼지.’
아무리 자신이 남작이라 한들, 삼 후작과 대면할 일이 한순간도 없음은 말도 되지 않는다. 지나가다 마주칠 수도 있고, 바로 이 자리에서 마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무념의 상태에서 대면할 수밖에.’
스케일 남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의실이 넓은 까닭에 각 귀족들은 ‘같은 급’의 동료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손에는 고급 차가 들려 있었으며, 지척에 음식이 올려진 이동식 진열대가 있었다.
‘후우.’
하나 스케일 남작은 우물쭈물한 자세로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남작급의 귀족이 없는 까닭이었다.
말했듯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권력·부·명성 중에서 어느 한 개라도 특출 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보통 남작급의 귀족이 저 셋 중에서 하나라도 높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고로, 이 공간에서 스케일 남작과 담소를 나눌 만한 위인이 있을 리 없었다.
‘페리우스 국왕님이 서둘러 오시길 빌 수밖에 없겠군.’
하나 계속해서 진열대가 들어왔다 나갔다 것으로 보아 국왕이 빨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라면 비워진 진열대를 다시 채워 올 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스케일 남작의 얼굴이 더더욱 굳는다.
‘이거 참 곤란한 상황이군.’
사흘 동안 여러 귀족들과 말을 틈으로서 어느 정도는 친분을 쌓았지만, 저리 모여 있는 귀족 사이를 뚫고 말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되는 것이다.
‘누가 말이라도 걸어 주면 좋으련만…….’
염원하고 노력하면 헛된 꿈은 없다 했던가. ‘세 명’의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쿵쾅쿵쾅.
대지가 울려 느껴지는 소리가 아닌, 스케일 남작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막상 염원이 현실로 되니 당황스러웠다. 사실 스케일 남작이 바라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자작이나 최소 백작급의 귀족이 오길 바랐다.
즈비라. 샤라. 마우전트. 삼 후작을 상대하기엔 아직 마음을 준비가 온전하지 못했다.
“자네가 스케일 남작인가?”
“…….”
“허, 귀가 안 좋은가, 자네?”
말하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걸 행동으로 나타낼 수 없었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즈비라 후작의 음성은 그만큼 스케일 남작을 목 졸랐던 것이다. 스케일 남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간신히 생각했다.
‘무념. 그 상태로 어떻게든 입만 열어 보자.’
부르르 떨리듯이 스케일 남작의 입술이 열렸다.
“아, 아닙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즈비라 후작님. 그리고 샤라 후작님과 마우전트 후작님도 안녕하신지요.”
“네, 반가워요.”
“반갑구만.”
고혹적인 자태의 샤라와 사나운 인상의 마우전트가 인사를 받아 주었고, 즈비라 후작이 다시금 내뱉었다.
“남작으로서 귀족 회의에 참석하다니. 대단하군, 자네.”
“대, 대단하다니요, 아닙니다, 절대로.”
사실 남작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스케일 남작 스스로도 놀랍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니까 들을 칭찬은 맞는데 막상 들으니 이상하달까.
한데, 즈비라 후작이 돌연 딱딱한 기색으로 스케일 남작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자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보는가?”
“예?”
“남작이기에 권력도 없고, 소도시로서 부와 명성도 없지. 한데 어찌 올 수 있었던 겔까?”
“…….”
분명 귀족 회의의 초대 서신에는 지금까지의 공을 높이 사 참석하기를 원한다고 쓰여 있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물론, 요 근래 도시의 몇몇 부근에서 발전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참석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조금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