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어린 여자 어른 남자
1화
[프롤로그-1]


“올라갔다 가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의 비음 섞인 목소리에 와인을 마시던 정표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구겨졌다. 회사에선 나름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그는 요즘 들어 제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버거웠다.
스테이크를 썰던 여자가 서둘러 포크를 내려놓으며, 오늘은 기필코 이 남자를 자빠뜨리고 말겠다는 의지를 되새겼다.
“식사 다 하신 것 같은데 일어날까요? 룸 예약했어요. 우리 올라가서 한잔 더 해요.”
여자는 평소답지 않게 허벅지가 다 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입술엔 빨간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다. 정표는 여자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우리 만난 지 두 달도 더 지났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정표 씨랑 저요, 그동안 고작 저녁 식사 다섯 번 했어요. 놀라운 건 그게 전부라는 거예요. 도대체 정표 씨는 날 왜 만나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나는 내 취향에 0.001퍼센트도 부합하지 않는 이 여자를 왜 만나고 있는 걸까? 이유가 뭘까? 정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자는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워져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재빨리 주워 담았다.
“됐어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내가 정표 씨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같이 있고 싶고, 더 많은 시간 같이 얘기 나눠 보고 싶어서 투정 한번 부려 봤어요. 미안해요. 제가 왜 이러는지는 정표 씨도 잘 알죠? 정표 씨도 사랑해 본 적 있을 거 아니에요.”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에 솜사탕처럼 하얀 여자애의 얼굴이 정표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자가 아니라 여자애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작게 한숨을 내뱉은 그는 쓰게 웃으며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제 저녁 내린 폭설로 창밖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고, 비보단 눈을 좋아하는 그 애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젠장. 또 그 애 생각을 하고 말았다.
“정표 씨는 내가 여자로 안 보여요?”
자신의 말에 대꾸도 없고, 계속 딴생각만 하는 정표를 보며 여자는 애가 탄 모양인지 울먹이며 소리쳤다.
“당신 남자 맞아요? 여자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남자로서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혹시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문제?”
그딴 거 없어. 제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코웃음을 치던 정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몇 층?”
“19층요.”
정표가 먼저 일어나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호텔 로비를 런웨이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기럭지에 새삼 또 한 번 반한 여자는 그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며 정표의 뒤를 다급하게 쫓아갔다.
19층을 누르는 여자의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표에게 여자가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숫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내 룸 앞에 도착한 여자가 떨리는 손길로 카드 키로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핸드백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바로 뒤를 돌아 정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정표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여자가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 밤. 정표 씨 마음대로 해도 돼요.”
전혀 도발적이지 않았지만 정표는 예의상 여자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손길에 벌써부터 몸이 달아올랐는지 여자가 뜨거운 숨을 뱉었다.
그런데 여자의 빨간 입술에 얼굴을 기울이던 정표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자는 귓가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와 콧속으로 스며드는 달짝지근한 와인 향에 취해 정표의 허리를 잡아끌어 하체를 밀착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정표가 여자를 밀쳐 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여자는 그를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그런 여자를 향해 정표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지자.”
여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왜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요?”
“아니. 네 말대로 나 문제 있는 것 같아.”
“!”
“그것도 엄청나게 큰 문제. 이 문제 해결해야지 안 되겠어.”
거의 자책에 가까운 답변을 내놓은 정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룸을 나가 버렸다.

내일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연예인들, 누가 있을까요? 아이돌 그룹 멤버로는 ‘프리티’의 막내 윤태리 양이 있습니다. 윤태리 양은 이번에 명문인 한국대에 입학해 화제가 되었는데요.
대리운전 기사가 라디오를 켰다. 잡음과 뒤섞인 연예 뉴스에 정표의 술기운이 단번에 날아갔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기사를 향해 말했다.
“W픽처스로 가 주세요.”
“아. 댁으로 안 가시고요?”
“네.”
W픽처스라면 최근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제작사이자 배우 엔터테인먼트로도 유명한 회사였다. 룸미러를 통해 정표의 수려한 외모를 흘깃 훔쳐보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배우신가 봐요?”
사람이 물어보는데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는 정표의 태도에 무안해진 기사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운전에 열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W픽처스 앞에 도착한 기사는 정표에게 차 키를 넘기고 사라졌고, 그는 뒤늦게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대표님! 이 밤중에 웬일이세요?”
때마침 건물에서 나오던 매니저 성원이 정표를 발견하곤 호들갑을 떨었다. 예상치 못한 성원의 등장에 정표는 애써 태연한 척 그에게 차 키를 건네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정표를 따라 차에 올라탄 성원은 뒤를 돌았다.
“술 드셨어요? 근데 어디로 모실까요?”
“집.”
“집요? 그럼 바로 집으로 가시지 회사엔 왜 오셨어요?”
“넌? 스케줄 다 끝났어?”
정표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걸그룹 프리티의 매니저 성원은 회사 대표인 정표에게 피곤함을 어필하고 싶었는지 두 눈을 비비며 말했다.
“네. 녹화 하나 끝내고, 소윤이랑 태리 숙소 데려다주고 왔어요. 한잔 더 하러 가실래요? 술이 매우 고파 보이는 얼굴이신데…….”
“됐어. 집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야.”
“네네. 알겠습니다.”
성원은 입맛을 다시며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했다. 정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쁘시면 제가 대신 갈까요?”
“어딜?”
“내일 태리 졸업식 말이에요.”
“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누나한테 할 얘기도 있고, 내가 꼭 가야 돼.”
“하긴 대표님 조카랑 태리가 절친이라면서요? 끝나고 같이 자장면도 먹고 하면 되겠네요. 태리가 외롭진 않겠어요.”
“자장면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너 미쳤냐?”
정표가 미간을 찌푸리며 윽박지르자, 성원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왜요? 졸업식 날 자장면 먹는 건 당연한 건데!”
“너 매니저 맞냐? 걔 자장면 싫어해. 그것도 엄청.”
누군가에게 버림받기 전날 먹은 음식이 자장면이라고 했다. 어렸을 적 그 애는 춘장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본인이 버려진 아이라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었다.
“어쩐지 중국 음식 시킬 때 매번 잡채밥만 시키더라. 근데 대표님은 태리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뭐 인마. 운전이나 똑바로 해.”
“아니 왜 별것도 아닌 일로 성질을 내고 그러세요. 쳇.”
볼멘소리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원은 룸미러를 통해 정표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다시 열었다.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성원의 말에 정표는 아무 대꾸 없이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아 버렸다.

✽✽✽

찰칵 찰칵 찰칵.
여기저기서 스마트폰과 카메라의 셔터음이 울렸다. 아들과 딸의 교복 입은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쁜 가족들로 가득 찬 운동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정표는 마침내 자신의 얼굴보다 더 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마치 작품 활동을 하는 사진작가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사진을 찍어 댔다.
정표의 등장에 여고생들이 술렁였다.
“우와. 잘생겼다. 저 사람 누구 오빠니?”
“몰라. 지금 누구 찍는 거야?”
카메라의 앵글이 향한 곳을 눈으로 좇던 여고생들은 낙담했다. 그의 카메라는 정확히 3학년 1반 윤태리에게 향해 있었다.
“저 비주얼에 프리티빠는 아닐 테고, 기자인 듯. 존잘이다. 진짜.”
주변 잡음들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던 정표는 뷰파인더 너머로 해맑게 웃고 있는 태리를 관찰했다. 졸업식 순서지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는 모습이라든지, 운동화 신발 끈을 조여 매는 모습이라든지,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는 모습이라든지…….
그는 저도 모르게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태리의 실물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태리가 돌연 뒤를 돌았다. 피할 겨를도 없이 태리와 두 눈이 딱 마주쳐 버린 정표는 당황한 나머지 굳어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야 말았다.
이게 아닌데, 표정 풀어야 되는데. 저 애가 겁먹기 전에.
친구들을 향해 밝게 웃던 태리의 얼굴이 정표를 보자 어색하게 굳어졌다.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정표를 바라보던 태리는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히 속이 쓰린 정표는 씁쓸한 표정으로 태리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사진 많이 찍었어?”
갑자기 나타난 누나 수옥이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낚아챘다. 화들짝 놀란 정표가 재빨리 수옥에게서 카메라를 뺏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왜 집어넣어? 사진 좀 보여 달라니까!”
“없어.”
“무슨 소리야. 내가 저 위에서 너 열심히 사진 찍는 거 다 봤는데. 우리 모아 상 받는 거 찍었니? 나 화장실 갔다 오느라 못 봤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카메라 좀 줘 봐. 그 비싼 걸 폼으로 가져온 건 아닐 테고, 보여 줘! 도대체 뭘 찍은 거야? 빨리빨리 이리 내놔!”
카메라가방을 뺏으려는 수옥과 실랑이를 벌이던 정표는 급기야 필사적으로 도망쳐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가방을 내던지던 정표의 시선이 뒷좌석에 머물렀다. 그는 뒷좌석에 놓인 커다란 꽃다발을 바라보며 내적 갈등에 빠졌다.
소속사 대표로서 저 정도는 줘도 괜찮지 않을까?
젠장. 그러기엔 꽃다발이 너무 크잖아. 내가 그 애 남자 친구도 아니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아 버리고 뒤를 돌았다.
벌써 졸업식이 다 끝났는지 학생들이 가족들과 함께 교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정표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런데 그때 빈손으로 교문에 들어서던 그를 상인이 붙잡았다.
“원 플러스 원!”
그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상인이 들고 있는 사탕 바구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지갑을 꺼냈다.
계산을 마친 정표는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사탕 바구니 두 개를 들고 교문에 들어섰다. 그때 마침 그 모습을 본 조카 모아가 정표를 향해 달려왔다.
“이게 누구야? 바쁘신 삼촌께서 어인 일로 이곳까지 행차를…… 으앗!”
정표가 사탕 바구니를 내던지듯 모아의 품에 안겼다. 모아가 입을 삐죽 내밀며 소리쳤다.
“이거 떨이지? 원 플러스 원! 돈도 많은 양반이 진짜 하나밖에 없는 조카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정표는 모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후, 모아 옆에 멀뚱히 서 있던 태리의 품에도 바구니를 안겼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바구니를 내려다보던 태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를 향해 태리가 활짝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작은 사탕 바구니에 비해 너무 과분한 미소라 괜히 머쓱해진 정표는 태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수옥을 향해 물었다.
“점심은?”
“아버지가 사 준다고 회사로 오라는데? 너도 같이 가자.”
“됐어. 바빠.”
“바쁘긴. 야! 적당히 좀 해라. 아버지랑 좀 풀라고.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법이 어디 있냐?”
“싫다고.”
“하여간 저 성깔머리하고는. 그나저나 태리도 스케줄 때문에 회사 들어가 봐야 된다는데, 그럼 네가 태리 좀 회사까지 태워다 줘. 아무리 바빠도 그건 할 수 있지?”
“그러든지.”
“태리야!”
수옥의 부름에 태리가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