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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자 어른 남자
2화
[프롤로그-2]
“네.”
“정표도 회사 들어간다니까 같이 가라고. 그나저나 아줌마가 맛있는 거 사 주려고 했는데 아쉽네? 가는 길에 삼촌한테 간식이라도 좀 사 달라고 그래. 그리고 태리야! 졸업 축하한다!”
수옥이 태리를 꼭 껴안았다. 따뜻한 수옥의 품에 안긴 태리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줌마. 고마워요.”
수옥이 태리의 등을 토닥였다.
“나도 끼워 줘!”
모아가 달려와 두 사람을 얼싸안았다. 요란한 인사를 해 대는 여자 셋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정표는 뒤를 돌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말도 없이 먼저 교문을 벗어나고 있는 정표의 뒷모습을 본 수옥이 태리의 등을 떠밀었다.
“저 자식 진짜. 하여튼 성질도 급해. 태리야, 얼른 따라가.”
“태리야! 문자 해!”
모아가 손을 흔들었다. 태리도 마찬가지로 모아와 수옥을 향해 손을 흔들며 정표의 뒤를 쫓아 전력 질주했다.
“앞에 타.”
습관대로 뒷좌석 문을 연 태리를 향해 정표가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태리가 이마를 긁적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딱히 할 얘기도 없고,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던 태리는 들고 있던 바구니 속에서 사탕 한 개를 뽑았다.
바스락거리며 사탕 껍질을 벗긴 태리는 사탕을 입 속에 넣으려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정표와 두 눈이 마주쳤다. 정표의 시선에 민망해진 태리는 입 안에 넣으려던 사탕을 정표를 향해 내밀었다.
“드실래요?”
“너나 먹어.”
“네…….”
거절당한 것이 무안해진 태리는 재빨리 사탕을 입 속에 넣었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오늘따라 차는 왜 이리 막히는 건지. 태리는 속이 탔다.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애쓰던 태리는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놓인 꽃다발을 보곤 재빨리 뒤를 돌았다.
“우와. 예쁘다.”
두 눈을 반짝이며 꽃을 바라보고 있는 태리를 흘깃 보던 정표는 무심한 척 말했다.
“가져 그럼.”
“아니에요! 제 것도 아닌데…….”
너 주려고 산 거니까 가지라고.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정표는 답답한 마음에 차의 속력을 높였다. 어느덧 차는 회사 앞에 도착하고, 태리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문을 닫고 회사 건물로 향하는 태리의 가방을 누군가 잡아당겼다. 정표였다.
그는 태리의 몸을 돌려세운 뒤 꽃다발을 그녀의 작은 품에 안겼다.
자신의 몸통만 한 꽃다발 때문에 얼굴 절반이 가려진 태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정표를 올려다보았다. 정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버릴 거니까 가져가라고.”
“아…….”
뭘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지, 품에 가득 안긴 꽃을 내려다보던 태리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꽃보다 예쁘고 환한 미소가 가득 핀 태리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던 정표는 그만 넋을 잃고야 말았다.
“감사합니다!”
태리는 고개를 허리까지 숙여 가며 정표를 향해 인사했다. 태리의 과도한 인사에 정표의 미간이 구겨졌다.
“인사 좀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냐?”
“네? 그럼 어떻게…….”
“내가 무슨 조폭 두목도 아니고. 너무 예의 차리지 말라고.”
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됐다. 올라가라. 스케줄 있다며.”
“네? 네! 저, 그럼. 안녕히 가세요.”
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려던 태리는 멈칫했다.
어떡하지? 너무 예의를 차리지 않으면서도 예의 있는 인사는 어떻게 하는 거지?
고민에 빠진 태리는 발을 동동거리다가 뒤늦게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그를 향해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녀는 한쪽 팔로 겨우 꽃을 안은 채, 사탕 바구니를 들고 있는 나머지 손을 흔들었다. 눈보다 더 하얀 미소를 지으며, 솜사탕처럼 달콤한 인사를 하는 태리를 바라보던 정표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태리는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는 정표가 무서워 재빨리 뒤를 돌아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정표는 멀거니 서서 한참 동안이나 태리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차에 올라탔다.
급기야 핸들에 머리를 박고 앓는 소리를 하던 정표는 조수석에 태리가 흘리고 간 사탕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인가
그에겐 엄청난 난제였다. 윤태리라는 여자애가.
[1-1]
M 클럽, 룸 안.
쿵쾅쿵쾅.
강렬한 비트가 발밑에서 울렸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조금 전 마신 칵테일 때문일까? 태리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에 속까지 매스꺼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던 언니들이 춤을 추러 나가고, 룸 안에는 태리와 그녀 옆에 앉은 장새결 두 사람뿐이었다.
태리는 자신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새결의 얼굴을 흘끔 훔쳐보다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물을 들이켰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떨려…….
장새결. 그는 최근 몇 개월 동안 각종 영화제에서 남자 신인상을 휩쓴 스물다섯의 영화배우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양주를 마시던 새결은 자신의 얼굴을 훔쳐보던 태리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그의 맑은 미소에 태리는 순간 시선을 피하는 것도 잊고, 두 눈을 깜빡이며 뭐에 홀린 듯 새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무 살. 그녀의 나이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다. 바로 어제 교복을 벗어 던진 솜털이 보송보송한 태리는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앉아 눈을 맞춘 건 태어나서 처음…… 아! 아니다. 대표님이 있었다. 그러니까 구석에 몰려 대표님에게 혼이 날 때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우리 사귈래?”
새결의 낮은 목소리에 태리의 큰 눈이 더욱 크게 번쩍 떠졌다.
뽀얀 피부에 동그란 눈,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의 귀여운 외모를 가진 태리는 이제 막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3년 차 걸그룹 프리티의 막내였다.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난생처음 클럽에 입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 데다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한테 대시를 받다니, 태리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태리는 수줍어서 홍조가 번진 뺨을 식히려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언니들이 왜 안 들어오지…….”
태리는 괜히 문 쪽을 살피며 오늘 이곳에 같이 온 멤버 언니들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새결이 태리의 양쪽 어깨를 꽉 잡았다.
“대답 안 해? 사귀자. 내가 잘해 줄게.”
대답을 종용하는 새결의 행동에 태리는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저…… 기. 그러니까. 대표님한테 허락을 맡아야 하는데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태리를 바라보던 새결이 피식 웃어 버렸다.
“대표?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우리 대표님 무서운데…….”
룸에 도착해서부터 그녀는 계속 대표님 타령을 해 댔다.
‘대표님이 술 먹지 말라고 그랬는데…….’
‘대표님이 통금 시간 지키라고 그랬는데…….’
‘대표님이 남자랑 둘만 있지 말라고 그랬는데…….’
대표님 얘기를 꺼낼 때마다 부들부들 떠는 태리가 귀여웠는지 새결은 손을 뻗어 태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움찔!
놀란 태리가 엉덩이를 뒤로 뺐다. 새결의 손길에 왠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무섭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이 공존했다. 태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 듯 말 듯 복잡하기만 했다.
슬금슬금. 새결에게서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태리는 그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태리가 도망간 쪽으로 향했다.
드르륵드르륵.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태리의 핸드폰이 제 몸을 떨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리는 새결을 지나쳐 재빨리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끅! 따알꾹!”
태리가 갑자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정표 대표님]
화면 위에 뜬 문구가 어지럽게 보였다.
“끅! 어…… 뜩하…… 끄윽! 어뜩해.”
안절부절못하는 태리가 귀여워서 도저히 못 참겠는지 새결이 태리의 얼굴을 잡고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대표가 그렇게 무서워?”
어깨를 들썩이며 딸꾹질을 하는 태리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곤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끅! 근데 지금…… 끄윽! 뭐…… 하세요?”
“딸꾹질 멈추게 해 줄게.”
“네?”
새결의 얼굴이 태리의 얼굴 쪽으로 기울어졌다. 태리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새결이 꾹 다문 그녀의 입술을 혀로 쓸어 그 안을 가르고 들어가려는 그 순간!
쾅!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와 새결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새결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키스를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았다.
집에서 운동을 하다 나온 모양인지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가쁜 숨을 내쉬며 살벌한 눈빛으로 새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남자의 키는 깔창을 여러 겹 장착한 새결보다 훨씬 컸다. 체격도 야리야리한 새결과 달리 크고 단단했다. 남자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버렸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예보를 가볍게 무시한 옷차림의 남자는 외투도 입지 않아 손과 귀가 벌겋게 터 있었다.
모자를 벗은 남자의 얼굴을 새결이 올려다보았다. 다부진 체격과 달리 곱상하게 생긴 남자의 외모에 괜히 기가 죽은 새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누……구세요?”
남자는 대답 없이 살벌하게 굳은 표정으로 새결의 뒷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새결을 소파 위에 패대기쳐 버렸다. 한 방에 나가떨어진 새결은 태리 앞에서 쪽팔리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괜히 콜록거리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다 남자에게 반항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은 모양인지 태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태리는 새결 쪽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울먹이는 얼굴로 남자 쪽을 보며 발만 동동거렸다.
“대표님. 저, 저기…… 그러니까…….”
대표? 저 젊은 남자가 W픽처스 대표라고?
새결은 다시 대표라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 깔아. 뭘 봐?”
남자가 아주 자연스럽게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한 새결은 아까 대표님이 무섭다고 징징대던 태리에게 내가 책임지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던 자신의 입이 저주스러워졌다. 그래도 새결은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무자비한 말을 내뱉은 남자를 향해 소심한 잽이라도 날려야 하건만, 생각과는 달리 남자에게서 나오는 살벌한 기에 눌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태리의 소속사 W픽처스 정정표 대표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했었는데, 그를 실제로 보니 왠지 저 남자는 그 소문보다 더한 놈 같았다.
정표는 테이블 위 술병들과 벌겋게 달아오른 태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움찔. 어느새 딸꾹질을 멈춘 태리는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서 있었다.
정표는 아무런 말 없이 턱 끝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따라 나오라는 거였다.
정표가 성큼성큼 걸어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태리는 조급한 손길로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그러곤 새결을 원망스레 한 번 스윽 보더니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정표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가방을 품에 안은 태리는 운전을 하고 있는 정표의 얼굴을 흘끔 훔쳐보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태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데?”
그가 격앙된 목소리 물었다. 태리는 무서워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내가 뭘 잘못했지?
가만 생각해 보니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 것 같아 더 속이 상했다.
술 마신 거? 나도 이제 성인인데 술 마실 수도 있잖아! 언니들도 다 마시는데…….
남자 만난 거? 나도 이제 성인인데 연애해도 되는 거 아닌가? 언니들도 다 하는데…….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만 못하게 하는 거야? 짧은 치마도 못 입게 하고, 그리고 9시 통금은 너무하잖아?
2화
[프롤로그-2]
“네.”
“정표도 회사 들어간다니까 같이 가라고. 그나저나 아줌마가 맛있는 거 사 주려고 했는데 아쉽네? 가는 길에 삼촌한테 간식이라도 좀 사 달라고 그래. 그리고 태리야! 졸업 축하한다!”
수옥이 태리를 꼭 껴안았다. 따뜻한 수옥의 품에 안긴 태리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줌마. 고마워요.”
수옥이 태리의 등을 토닥였다.
“나도 끼워 줘!”
모아가 달려와 두 사람을 얼싸안았다. 요란한 인사를 해 대는 여자 셋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정표는 뒤를 돌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말도 없이 먼저 교문을 벗어나고 있는 정표의 뒷모습을 본 수옥이 태리의 등을 떠밀었다.
“저 자식 진짜. 하여튼 성질도 급해. 태리야, 얼른 따라가.”
“태리야! 문자 해!”
모아가 손을 흔들었다. 태리도 마찬가지로 모아와 수옥을 향해 손을 흔들며 정표의 뒤를 쫓아 전력 질주했다.
“앞에 타.”
습관대로 뒷좌석 문을 연 태리를 향해 정표가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어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태리가 이마를 긁적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딱히 할 얘기도 없고,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던 태리는 들고 있던 바구니 속에서 사탕 한 개를 뽑았다.
바스락거리며 사탕 껍질을 벗긴 태리는 사탕을 입 속에 넣으려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정표와 두 눈이 마주쳤다. 정표의 시선에 민망해진 태리는 입 안에 넣으려던 사탕을 정표를 향해 내밀었다.
“드실래요?”
“너나 먹어.”
“네…….”
거절당한 것이 무안해진 태리는 재빨리 사탕을 입 속에 넣었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오늘따라 차는 왜 이리 막히는 건지. 태리는 속이 탔다.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애쓰던 태리는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놓인 꽃다발을 보곤 재빨리 뒤를 돌았다.
“우와. 예쁘다.”
두 눈을 반짝이며 꽃을 바라보고 있는 태리를 흘깃 보던 정표는 무심한 척 말했다.
“가져 그럼.”
“아니에요! 제 것도 아닌데…….”
너 주려고 산 거니까 가지라고.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정표는 답답한 마음에 차의 속력을 높였다. 어느덧 차는 회사 앞에 도착하고, 태리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문을 닫고 회사 건물로 향하는 태리의 가방을 누군가 잡아당겼다. 정표였다.
그는 태리의 몸을 돌려세운 뒤 꽃다발을 그녀의 작은 품에 안겼다.
자신의 몸통만 한 꽃다발 때문에 얼굴 절반이 가려진 태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정표를 올려다보았다. 정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버릴 거니까 가져가라고.”
“아…….”
뭘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지, 품에 가득 안긴 꽃을 내려다보던 태리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꽃보다 예쁘고 환한 미소가 가득 핀 태리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던 정표는 그만 넋을 잃고야 말았다.
“감사합니다!”
태리는 고개를 허리까지 숙여 가며 정표를 향해 인사했다. 태리의 과도한 인사에 정표의 미간이 구겨졌다.
“인사 좀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냐?”
“네? 그럼 어떻게…….”
“내가 무슨 조폭 두목도 아니고. 너무 예의 차리지 말라고.”
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됐다. 올라가라. 스케줄 있다며.”
“네? 네! 저, 그럼. 안녕히 가세요.”
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려던 태리는 멈칫했다.
어떡하지? 너무 예의를 차리지 않으면서도 예의 있는 인사는 어떻게 하는 거지?
고민에 빠진 태리는 발을 동동거리다가 뒤늦게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그를 향해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녀는 한쪽 팔로 겨우 꽃을 안은 채, 사탕 바구니를 들고 있는 나머지 손을 흔들었다. 눈보다 더 하얀 미소를 지으며, 솜사탕처럼 달콤한 인사를 하는 태리를 바라보던 정표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태리는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는 정표가 무서워 재빨리 뒤를 돌아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정표는 멀거니 서서 한참 동안이나 태리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차에 올라탔다.
급기야 핸들에 머리를 박고 앓는 소리를 하던 정표는 조수석에 태리가 흘리고 간 사탕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인가
그에겐 엄청난 난제였다. 윤태리라는 여자애가.
[1-1]
M 클럽, 룸 안.
쿵쾅쿵쾅.
강렬한 비트가 발밑에서 울렸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조금 전 마신 칵테일 때문일까? 태리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에 속까지 매스꺼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던 언니들이 춤을 추러 나가고, 룸 안에는 태리와 그녀 옆에 앉은 장새결 두 사람뿐이었다.
태리는 자신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새결의 얼굴을 흘끔 훔쳐보다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물을 들이켰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떨려…….
장새결. 그는 최근 몇 개월 동안 각종 영화제에서 남자 신인상을 휩쓴 스물다섯의 영화배우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양주를 마시던 새결은 자신의 얼굴을 훔쳐보던 태리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그의 맑은 미소에 태리는 순간 시선을 피하는 것도 잊고, 두 눈을 깜빡이며 뭐에 홀린 듯 새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무 살. 그녀의 나이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다. 바로 어제 교복을 벗어 던진 솜털이 보송보송한 태리는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앉아 눈을 맞춘 건 태어나서 처음…… 아! 아니다. 대표님이 있었다. 그러니까 구석에 몰려 대표님에게 혼이 날 때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우리 사귈래?”
새결의 낮은 목소리에 태리의 큰 눈이 더욱 크게 번쩍 떠졌다.
뽀얀 피부에 동그란 눈,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의 귀여운 외모를 가진 태리는 이제 막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3년 차 걸그룹 프리티의 막내였다.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난생처음 클럽에 입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 데다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한테 대시를 받다니, 태리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태리는 수줍어서 홍조가 번진 뺨을 식히려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언니들이 왜 안 들어오지…….”
태리는 괜히 문 쪽을 살피며 오늘 이곳에 같이 온 멤버 언니들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새결이 태리의 양쪽 어깨를 꽉 잡았다.
“대답 안 해? 사귀자. 내가 잘해 줄게.”
대답을 종용하는 새결의 행동에 태리는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저…… 기. 그러니까. 대표님한테 허락을 맡아야 하는데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태리를 바라보던 새결이 피식 웃어 버렸다.
“대표?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우리 대표님 무서운데…….”
룸에 도착해서부터 그녀는 계속 대표님 타령을 해 댔다.
‘대표님이 술 먹지 말라고 그랬는데…….’
‘대표님이 통금 시간 지키라고 그랬는데…….’
‘대표님이 남자랑 둘만 있지 말라고 그랬는데…….’
대표님 얘기를 꺼낼 때마다 부들부들 떠는 태리가 귀여웠는지 새결은 손을 뻗어 태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움찔!
놀란 태리가 엉덩이를 뒤로 뺐다. 새결의 손길에 왠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무섭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이 공존했다. 태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 듯 말 듯 복잡하기만 했다.
슬금슬금. 새결에게서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태리는 그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태리가 도망간 쪽으로 향했다.
드르륵드르륵.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태리의 핸드폰이 제 몸을 떨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리는 새결을 지나쳐 재빨리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끅! 따알꾹!”
태리가 갑자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정표 대표님]
화면 위에 뜬 문구가 어지럽게 보였다.
“끅! 어…… 뜩하…… 끄윽! 어뜩해.”
안절부절못하는 태리가 귀여워서 도저히 못 참겠는지 새결이 태리의 얼굴을 잡고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대표가 그렇게 무서워?”
어깨를 들썩이며 딸꾹질을 하는 태리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곤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끅! 근데 지금…… 끄윽! 뭐…… 하세요?”
“딸꾹질 멈추게 해 줄게.”
“네?”
새결의 얼굴이 태리의 얼굴 쪽으로 기울어졌다. 태리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새결이 꾹 다문 그녀의 입술을 혀로 쓸어 그 안을 가르고 들어가려는 그 순간!
쾅!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와 새결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새결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키스를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았다.
집에서 운동을 하다 나온 모양인지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가쁜 숨을 내쉬며 살벌한 눈빛으로 새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남자의 키는 깔창을 여러 겹 장착한 새결보다 훨씬 컸다. 체격도 야리야리한 새결과 달리 크고 단단했다. 남자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버렸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예보를 가볍게 무시한 옷차림의 남자는 외투도 입지 않아 손과 귀가 벌겋게 터 있었다.
모자를 벗은 남자의 얼굴을 새결이 올려다보았다. 다부진 체격과 달리 곱상하게 생긴 남자의 외모에 괜히 기가 죽은 새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누……구세요?”
남자는 대답 없이 살벌하게 굳은 표정으로 새결의 뒷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새결을 소파 위에 패대기쳐 버렸다. 한 방에 나가떨어진 새결은 태리 앞에서 쪽팔리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괜히 콜록거리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다 남자에게 반항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은 모양인지 태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태리는 새결 쪽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울먹이는 얼굴로 남자 쪽을 보며 발만 동동거렸다.
“대표님. 저, 저기…… 그러니까…….”
대표? 저 젊은 남자가 W픽처스 대표라고?
새결은 다시 대표라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 깔아. 뭘 봐?”
남자가 아주 자연스럽게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한 새결은 아까 대표님이 무섭다고 징징대던 태리에게 내가 책임지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던 자신의 입이 저주스러워졌다. 그래도 새결은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무자비한 말을 내뱉은 남자를 향해 소심한 잽이라도 날려야 하건만, 생각과는 달리 남자에게서 나오는 살벌한 기에 눌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태리의 소속사 W픽처스 정정표 대표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고 했었는데, 그를 실제로 보니 왠지 저 남자는 그 소문보다 더한 놈 같았다.
정표는 테이블 위 술병들과 벌겋게 달아오른 태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움찔. 어느새 딸꾹질을 멈춘 태리는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서 있었다.
정표는 아무런 말 없이 턱 끝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따라 나오라는 거였다.
정표가 성큼성큼 걸어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태리는 조급한 손길로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그러곤 새결을 원망스레 한 번 스윽 보더니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정표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가방을 품에 안은 태리는 운전을 하고 있는 정표의 얼굴을 흘끔 훔쳐보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태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데?”
그가 격앙된 목소리 물었다. 태리는 무서워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내가 뭘 잘못했지?
가만 생각해 보니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 것 같아 더 속이 상했다.
술 마신 거? 나도 이제 성인인데 술 마실 수도 있잖아! 언니들도 다 마시는데…….
남자 만난 거? 나도 이제 성인인데 연애해도 되는 거 아닌가? 언니들도 다 하는데…….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만 못하게 하는 거야? 짧은 치마도 못 입게 하고, 그리고 9시 통금은 너무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