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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



언령의 주인 1권 (1화)
0. 프롤로그 ― 책과 소년 그리고 마법사 (1)


책.
현재의 지식과 감성을 글로 남겨 다음 세대로 전하는 도구.
누군가에게는 지루함을,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을,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을 전하는 물건.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있어선 인생…이기도 했다.

“어머, 오늘도 책을 읽으러 온 거니?”
도서관 사서 아줌마의 친절한 목소리가 사람이라곤 사서 몇 명뿐인 도서관에 울렸다.
그에 반응하는 것은 탁자에 가려 머리끝만 간신히 보이는 소년.
끄덕-.
“호호호, 그래~ 오늘도 재밌게 읽다 가렴.”
끄덕-.
소년의 무뚝뚝한 반응에도 한가한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인지 사서 아줌마는 생글생글한 웃음으로 소년을 맞이했다.
그러곤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한 소년이 도서관의 깊숙한 곳, 제목만 보아도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마침 오늘 아침부로 일반도서 열람실에 배정된 신입 사서가 소년에게 목소리가 안 닿을 때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시는 앤가요?”
“그러엄~ 우리 도서관에서 일하면 모를 수가 없지. 도서관 최고의 단골 고객이거든.”
“저렇게 어린애가요?”
신입 사서는 이젠 책장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 소년의 체구를 떠올리며 되물었다.
“그래, 대충 봐도 유치원생 나이로밖엔 보이지 않긴 한데… 딱히 보육원 같은 곳에 다니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부모님 교육관이 남들과 좀 다르신가 보네요.”
“음… 그렇다고 해야 할까? 저 애를 몇 년이나 봐왔지만 아직 저 애 부모님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걸.”
“네에? 그럼 저렇게 쪼그만 애가 혼자 도서관에 온단 말이에요? 책을 읽으러? 아니, 그보다 몇 년이라고요?”
말도 안 된다는 듯 큰 목소리로 반문하는 신입 사서의 모습에 선임 사서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제야 신입 사서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곳이 도서관이란 걸 자각한 듯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썰렁한 도서관의 작은 소동이 가라앉은 뒤 선임 사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한 3년… 정도 된 거 같네. 처음 봤을 때는 진짜 이 애가 한글은 제대로 아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어렸거든. 그땐 아동용 열람실에 있기도 했고 말이야.”
“헤에~ 저 애도 대단하지만 그 부모도 대단하네요.”
“그래, 집안 문제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부모의 교육관이 특이한 건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린 저 애한테 꽤 기대하고 있거든.”
“예? 기대요?”
“그래, 저 애가 여기 온 지 3년 정도 됐다고 했지?”
“그랬었죠.”
“저 애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뭔지 알아?”
“으음… 저는 잘…….”
“자, 저 애가 들어간 책장 번호를 봐봐. 저기 C…….”
마침 잘됐다는 듯 선임 사서는 신입 사서에게 책들의 위치를 숙지시키며 소년이 들어간 책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물었다.
“……세상에! 사회과학?”
“그래, 저 애가 3년 전에 아동용 열람실에서 동화책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3년 만에 2층에 있는 이 일반 열람실의 책들을 읽어나가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만… 저 애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는 하고 있는 걸까요? 성인들도 읽기 힘든 책들이 많을 텐데.”
“당연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 몇 년 동안 지켜봤는데 저 애는 딱히 어떤 책을 가려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책장의 책을 순서대로 독파하는 중이거든. 하지만 고작해야 초등학교에 들어갈락 말락 한 정도의 아이가 여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오고, 심지어 책의 종류도 가리지 않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잖아? 그래서 우린 저 애가 혹시 천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천재라…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치?! 그치!”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신입 사서의 모습에 흥분한 선임 사서는 조금 전 자신이 후임에게 했던 경고도 잊은 것인지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어쩌면 지금 우리는 미래의 위인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 그런가요?”
자신의 자식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흔히 갖게 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떠한 기운에 밀린 신입 사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선임 사서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생 나이의 꼬마가 3년을 꼬박 도서관에 다니면서 수많은 책을 독파해 나가고 있다니…. 당장 신문의 한 면을 차지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기이한 열기를 담은 두 쌍의 눈동자가 책장 옆에서 묵묵히 책을 읽어나가는 소년을 향했다.

* * *

책을 읽어나가던 소년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딱히 책의 내용이 슬퍼서, 혹은 갑자기 떠오른 어떠한 감성적인 생각 탓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 오랜 시간 책을 읽어온 탓에 몸이 눈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으로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것엔 개의치 않는 듯, 단 한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책에 너무 집중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모른다기보단 책에 중독되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결국 눈물이 너무 가득 차서 책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한 손으론 한쪽 눈을 닦고, 다른 한쪽 눈으론 책의 글씨를 읽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 모습은 도저히 어린아이의 행동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몸이 신호를 보내어 눈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에 따라야만 했다.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의 욕구는 인간이 가지는 스스로에 대한 보호 본능을 넘어설 수는 없었었다.
이는 말 그대로 본능이기에, 아이든 어른이든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여러모로 덜 성숙된 아이라면 더욱 본능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이를 거부하며 오직 기계적으로 책 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인간의 본능이란 욕구를 뛰어넘는 또 다른 욕구 충족의 행동.
예로부터 이런 행동을 해온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천재들.
나머지 하나는 보통 사람들이나 천재들과도 완전히 다른, 그야말로 미친 사람들.
스스로의 몸보다 연구에 매진한 천재, 혹은 스스로의 목숨보다 쾌락과 같은 욕망에 몸을 맡긴 미친놈들만이 생존이라는 절대적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책을 읽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본능을 벗어난 행동을 보이는 소년은… 그 어떤 부류에도 속한다 말하기 힘들었다.
여태껏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수많은 책을 읽어왔다곤 하지만, 도서관 사서의 평가가 그랬듯 소년은 모든 내용을 이해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에 욱여넣고 있을 뿐.
만약 저 아이가 진짜로 천재였다면 같은 책장의 같은 주제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책을 읽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소년은 미친 것이었을까?
어찌 보면 그렇게 보는 게 타당했다.
수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에서 폐관 시간까지 책을 읽는 소년의 행동은 미친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소년에겐 남들이 모르는, 책을 읽는 너무나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사락-.
‘아빠의 웃음을 보겠어.’
언제나처럼 책장을 넘기며 떠올리는 그것.
소년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절대 명제.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책의 한 구절을 심심파적으로 아빠 앞에서 읊었을 때, 그때 보았던 난생처음 본 아빠의 비틀린 웃음은 소년에게 있어서 충격 그 자체였다.
박장대소도, 껄껄껄 호탕한 웃음도, 길게 호선을 그린 미소도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의 아빠가 처음 보인 웃음이자 여태까지완 다른 새로운 표정이었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어디론가 사라져, 밤늦게 집에 들어와선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런 대화도 없이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다 잠자리에 드는 행동만을 반복해오던 소년의 아빠.
그런 아빠가 소년에게 해주는 것은 오직 만 원짜리 몇 장을 머리맡에 두는 것이 전부였었기에, 소년은 그 비틀린 웃음조차도 기뻤다.
그래서 소년은 또 책을 읽었다.
다시 한 번 아빠를 웃게 해보이겠다는 생각으로 또다시 책을 읽고 매일 밤 아빠에게 검사라도 받듯 그날 읽은 것을 한 구절, 한 구절 읊고는 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소년의 아빠가 소년이 읊어대는 책 구절에 반응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도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읊은 내용이, 주저리주저리 떠든 내용이, 그날 자신이 처음 읊었던 내용과 달리 흥미를 끌지 못했을 뿐이라 위안하며 그렇게 몇 번이고 책을 읽고, 또다시 읊어댔다.
다른 또래 아이들과 달리 유치원도, 학원도, 보육원도, 부모와의 소풍도… 그 어느 곳에도 가지 않는 소년에게 있어 시간은 얼마든지 쓰고 또 써도 될 만큼 많은 것이었기에.
소년은 매일을 그렇게 보냈다.
그렇게 매일매일, 수년을 책만 읽다 보니 비록 많은 것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소년은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은 소년이 여태껏 해왔던 가장 즐거운 놀이인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지지직대는 브라운관 TV의 화면을 바라보는 일’과, ‘어느 날인가 주웠던 동강 난 돌하르방의 구멍을 세는 행위’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 되어있었다.
단순히 책이 소년에게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탓은 아니었다.
책을 통해 책에 적힌 게 정답이라는 진리를 알게 된 탓도 아니었다.
소년에게 책이 재밌는 이유는 책이 매번 같은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말을 하고 있어도 쓰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달랐고, 같은 사람이 쓴 책들도 책마다 내용이 달랐다.
앞서 말한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느니, 정답을 알게 된다느니 하는 것들은 그저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된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물론 그렇다 한들 소년이 책을 읽는 진짜 목표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소년이 책을 읽는 최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빠의 웃음이었다.
언제나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빠였지만 소년에게 있어 아빠란 존재는 모든 것이었다. 아빠가 웃기만 한다면 소년은 책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여전히 주머니에 소중히 품고 다니는 돌하르방도, 소년이 5살이 된 이후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TV도 모두 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이나… 소년은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