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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2화)
0. 프롤로그 ― 책과 소년 그리고 마법사 (2)
만약 엄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이미 옛적에 버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엄마였기에 그런 생각은 금세 잊혀졌다.
애당초 아빠가 아무 말도 안 해줬던 만큼 관심을 둘 필요가 없으리라.
아빠야 말로 자신이 세상을 보는 기준이고 모든 것인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뚝뚝하고 무서운 표정의 아빠지만 소년에게 필요하다 판단되는 모든 것을 제공해왔던 그이기에, 제공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필요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이제 소년은 책을 통해 자신에게도 ‘엄마’라는 존재가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소년에게 있어 아빠는 그 어떤 저명한 학자의 책보다도 우위에 있었기에 그랬다.
소년은 책에서 얻어낸 지식을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얻어낸 사실과 연관 지어 피드백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소년은 한 살을 더 먹었고.
도서관에서 한 해를 또 보냈다.
무심하던 아빠 손에 이끌려 학교에 가고.
학교가 끝나면 다시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소년의 코 밑에 자리한 솜털이 거뭇해질 무렵, 소년은 도서관의 모든 책을 섭렵할 수 있었다.
수년 만에 떠오른 슈퍼문이 세상을 밝히던 어느 날 밤.
소년의 방에 난 작은 창문으로 쏟아져 내린 밝은 달빛이 조금은 야윈 소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깊게 잠든 소년의 방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이 애인가?”
“예.”
낯선 사람들이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않는 소년을 내려다보던 인영이 불쑥 소년의 이불을 치워냈다.
그러곤 유달리 말라 보이는 소년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마나의 흔적이 전혀 없는데?”
소년의 몸을 살펴본 그림자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인영이 조용히 대답했다.
“원래 그런 실험이니까요.”
“음… 그렇긴 하다만… 이렇게까지 평범해선…….”
소년을 살펴본 이후 미간을 펴지 못하는 인영에게 다른 인영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걱정하시는 게 무엇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이만큼 최적화된 실험체도 없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어쨌거나 십 년이나 관리해서 만들어진 실험체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보다 평범할 것이 조건이긴 하지만… 확실히 이런 실험체를 만들어내는 건 힘들었죠.”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소년을 내려다보던 두 인영은 이내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소년을 거실로 들고 나와 구석에 눕혔다. 그러곤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인영이 손가락을 접어 올리다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길, 전용 실험실에서 진행해도 모자랄 판에 아파트 거실 한복판에서 이런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다니.”
“어쩔 수 없죠. 마법이 ‘공인’되지 못한 곳이니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요. 무엇보다 지금은 이 애를 데리고 어딜 갈 수도 없으니까요.”
“후우…….”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 불만스러운 표정의 인영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는 듯 반대편의 인영을 바라보며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눈을 껌뻑이며 박자를 맞추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움직이는 서로를 확인한 그들은 이내 검지를 들어 올렸고 그들의 손가락 끝에 신비로운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빛은 촛불처럼 어른거리는 모양새로, 마치 그들의 손가락을 심지 삼아 타들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인영들은 이내 그 신비한 빛으로 거실 한복판에 정체불명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와도 같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기묘한 그림들이 바닥을 까맣게 메워갔다.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는 그림들은 아무렇게나 널브러트리듯 여기저기 하나둘씩 그려 나갔지만, 시간이 지나 거실 바닥이 새카매질 무렵이 되자 처음의 어지러움이 거짓말인 것처럼 정갈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정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무의미한 낙서와도 같은 외형을 가진 그것들은 신비하게도 하나둘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 모양 자체는 현대의 수많은 언어들과 궤를 달리하는 탓에 뜻을 유추할 수조차 없었지만, 그림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 의미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림들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알리기라도 하듯, 자신들의 의미가 모이기 시작하자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그림을 필두로 조금씩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은은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정렬된 그림들은 그들이 가지는 의미나 외형과는 별개로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그림들이 자신들의 자태를 뽐내던 그때.
그림을 그리고 있던 두 인영 중 한 명에게 이상이 나타났다.
“후으읍!”
“……마나 고갈 증세다! 연습한 대로 호흡을 가다듬어 최대한 버텨라! 어설프게 마법진을 그렸다간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어두운 거실에서도 선명하게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맞은편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다른 인영이 매서운 어투로 창백해진 인영을 다그쳤다.
그가 겪고 있는 마나 고갈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조직원 중 최고 베테랑으로 선별되어 온 그가 왜 저렇게 쉽게 마나 고갈상태가 되었는지, 다그치는 인영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반드시 버텨내야 했다.
아무리 그들 조직의 조직원을 구하는 게 힘들다고 한들, 10년을 기다린 실험만큼 중요할 수는 없었다.
끄덕.
안쓰러울 만큼 핼쑥한 몰골의 인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지금 자신이 맡은 일이 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후윽……! 후욱!”
조언에 따라 호흡을 가다듬은 인영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맞은편에 있던 인영의 손이 다시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두 인영이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향해있던 그들의 몸이 일으켜진 게 신호라도 된 듯, 그들에 의해 그려진 은은하게 빛나던 그림들이 눈이 시릴 만큼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완성……됐다.”
“우욱!”
그 모습을 보며 땀을 흘리던 인영은 환호했고, 창백한 얼굴의 인영은 토악질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으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화장실로 향했다.
‘이제… 마법이 제대로 발동만 한다면……!’
환호하던 인영은 동료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닥에 뉘어뒀던 소년을 들어 빛무리 한가운데에 ‘배치’했다.
그렇게 10년을 준비해온 그들의 마지막 부품이 자리에 들어가자 바닥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오오-! 오오오오!”
격정에 찬 목소리에 급하게 화장실에서 뛰어나온 다른 인영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빛무리 속에서 몸이 떠오르기 시작한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의 몸이 떠오름과 동시에 바닥에 그려져 있던 그림들 역시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것들은 소년의 몸을 중심으로 어떤 특정한 패턴을 그리며 더욱더 발광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성공해라!”
그 역동적인 모습에 두 인영은 두 주먹을 꽉 쥐며 ‘제발’을 연신 외쳤다.
그런 그들의 간절함에 대답이라도 하듯 마침내 소년의 몸에서 눈을 멀어버리게 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아아앗!
그 강렬한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두 인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으드득.
“실……패로군.”
“이럴… 수가.”
바닥에 가득하던 그림들이 흔적도 없어진 그곳엔 처음 그들에 의해 들려나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년이 있었다.
“이… 이이……!”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허탈한 결과 탓일까.
망연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인영이 이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년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그를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덥석-.
절레절레.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젓는 인영의 모습에 손에 잡혀 멈춰선 인영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 돼. 이곳은 ‘그곳’이 아니다. 이런 녀석 하나 죽여서 흔적을 없애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이곳의 치안력을 생각한다면 어린애가 실종된다면 귀찮아질 것이다. 그런 쓰잘머리 없는 곳에 마나를 소모하느니 차라리 이대로 두는 게 더 좋다.”
“제기랄.”
흥분된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이유에 소년에게 다가가던 인영은 언젠지 모르게 그의 손에 떠올라있던 노란 빛무리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오늘은 무리를 했으니 몸을 추스르고 다음 실험체가 완성되길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어느새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인영은 잠시 소년을 노려보곤 소년의 방부터 시작해서 거실까지 자신들이 있었던 흔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여전히 잠에서 깰 줄 모르는 소년을 내려다보던 다른 인영은 그의 눈에만 보이는, 조금 전 그들에 의해 소년의 몸에 강제로 주입되었던 마나가 천천히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 조그마한 변화라도 있길 바라며 관찰을 했지만, 소년에게선 조금 전 몸속에 거대한 마나가 가득했던 게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어떠한 변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리 끝났습니다.”
“……위쪽엔 어떤 변화점도 없었다는 보고를 더해 실패를 알리도록.”
“……알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그들 간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잠들어 있던 소년을 도로 방에 데려다 놓은 그들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소년의 몸을 방에 들여다 놓던 그 시각.
소년은 신비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하나 더 있는 듯한 기시감.
자기 자신을 또 다른 내가 관찰하는 것 같은 기묘한 꿈이었다.
사실 지금 소년의 정신이 깨어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비록 주변의 상황 같은 건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최소한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상태란 것은 일찍이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의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는 푸른 안개는 현실에선 볼 수 없는 기사(奇事)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순간부턴가 소년은 바닥에 드러누운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꿈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몸이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 들려 자신이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신기한 모습에 소년은 다시 한 번 이게 꿈이라는 것을 느끼는 한편,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유체 이탈이란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남자들에게 안긴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소년의 꿈이 한층 선명해졌다.
아니, 선명해졌다는 느낌이었지만 어째선지 시야는 더 흐릿해졌다.
주변은 파란 물안개로 가득했고 그것이 맨 처음 꿈임을 알았을 때 자신의 시야를 가리던 안개임을 깨달은 소년이었지만 소년의 관심은 그런 것보다 그 파란 안개가 전해주는 기묘한 감각에 마음이 이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