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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3화)
0. 프롤로그 ― 책과 소년 그리고 마법사 (3)


‘이게 뭐지?’
마치 부드러운 털 뭉치가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 깃털보다도 가볍고 부드러운 감각이 소년의 몸을 지배했다.
그렇게 안개가 전해주는 신비한 감각에 몸을 맡기고 있던 소년이 문득 떠올린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안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까지 자신의 잠든 모습을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람에게 있어 아주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물음을 통해 소년이 또 다른 자신을 ‘인지’한 순간, 꿈은 더 이상 소년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쑤와아아악-!
‘어? 어어엇!’
갑자기 소년의 몸이 있는 방에서 어마어마한 흡인력이 느껴지며 소년을 빨아들였다.
지탱할 곳이 없던 소년은 허공에 손을 뻗어 빨려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소년의 힘이 약한 탓인지, 아니면 이 이상한 흡인력이 너무도 강한 탓인지 눈 깜빡할 사이에 소년은 옴짝달싹도 못한 채 자신의 방문에 달라붙어 서게 되었다.
하지만 흡인력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계속해서 소년을 끌어당겼다.
소년은 다급한 마음에 벽을 짚어도 보고, 방문의 손잡이도 잡아보았지만 어째선지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소년의 손이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가르던 이때.
소년의 손에 한 움큼 쥐어지는 게 있었다.
여태껏 아무것도 잡히지 않던 손에서 느껴지는 놀랍도록 선명한 감각에 소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보고자 했다.
그렇게 소년의 시야에 자신의 손이 들어서는 순간.
소년의 의식이 끊어졌다.

다음 날.
소년이 깨어났을 때, 세상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아니, 넓은 세상은 바뀐 게 없었으나 소년의 세상에는 조금 변화가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소년의 모든 것이자 소년의 세상이던 아빠가 더 이상 집에 찾아오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대신 소년에게 엄마가 생겨난 날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수년 후.
소년이 꿈을 꾼 날과 똑같은 달이 뜬 그날 밤.
조금 더 자라난 소년은 지친 몸을 침대에 뉘이며 그간 반복되어온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은 소년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았다.
그에겐 더 이상 그의 모든 것을 대변하던 아빠가 남아 있지 않았고, 그의 대체제로 찾아온 엄마는 소년의 세상이 되지 못했다.
자신이 책을 통해 익혀온 세상과 현실의 괴리는 피폐해진 소년의 정신을 갉아먹었고, 괴리의 간극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소년은 무던히도 많은 핍박을 받았다.
소년은 스스로가 지쳤음을 인정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에 조금은 극단적인 생각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천할 용기는 없었다.
정확히는 극단적인 생각의 결과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용기를 냈을 때,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날 소년을 지탱하던 그의 세상이 완전히 자신에게서 떠나갔음을 확인받게 되는 것. 그것이 소년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창문으로 비쳐드는 슈퍼문의 달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배워온 세상이 괴리를 극복하기를 소망하며.
눈을 뜬 새로운 아침엔 자신의 세상과 현실의 간극이 조금은 좁혀져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소년은 기억에서 잊혔던 수년 전의 꿈을 되풀이했다.
제3자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꿈.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꿈.
그리고 그 꿈이 끝났을 때, 소년은 또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수백 년에 걸친 장대하고 위대한 꿈을 말이다.



1. 꿈 (1)


말.
오늘도 역시 그것에 대해 의문을 던져봤다.
말의 기원은 무엇일까? 처음 말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의사소통의 필요성이었을 것이다.
원시시대, 인류가 유인원으로서 존재하던 시절에도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의사소통법과 언어체계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나은 인류로 진화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옛날 옛적에 멸종하여 ‘인류’라는 단어 자체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대의 유사인종과 관련한 역사적 자료 정도로밖에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지금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나약했다. 하지만 언어와 그들만의 의사소통 체계가 생겨난 이후 그들은 힘을 갖게 되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아닌 정신적인 힘.
그들은 소통을 통해 부족한 힘을, 부족한 지혜를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법에 대해 점차적으로 생각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매 세대를 반복하며 그에 유리한 형태로 스스로의 몸과 정신을 진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류는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칭할 만큼 위대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였고 그들과 비슷한 유사인종을 자신들보다 하위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의 오만함을 갖췄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 이외의 존재를 눈 아래로 여길 만큼, 진짜로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강해졌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현 인류가 가진 육체적 힘은 극소수의, 극도의 수련을 거친 이들을 제외하곤 오크라 불리는 ‘유사인종’만도 못하며 그 지혜로움 역시 소수를 제외하곤 엘프라는 ‘유사인종’만 못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유사인종’들이 가진 특징과 현 인류를 비교한다면 인류는 더욱 초라해진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 인류는 그들을 ‘유사인종’이라고 부를 만큼 오만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것이 ‘말’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유인원 시절 그들의 진화는 스스로, 혼자만의 필요와 생각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들이 의사소통 방법을 갖춘 뒤 그들은 무리의 필요와 무리가 가진 생각 속에서 진화를 해나갔다.
그리고 진화를 거듭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들을 완성시켜 나갔고 그 긴 세월에 의해 만들어진 게 지금의 인류이리라.
수많은 진화의 흔적은 아직도 현 인류의 몸에 남아있으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리라.
물론 이런 내 생각을 설파하고 다닌다면 교황청에서 암살자를 보낼 테지만… 나는 이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뿐만이 아니다.
단언컨대 지금의 인류는 옛날에 비해 진화했지만 이 진화는 완전하지 못했고, 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인류는 오크만도 못한 육체, 엘프만도 못한 두뇌를 가지게 되었고, 그 외의 다양한 유사인종만도 못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물론 지금의 모습이 구시대 인류에겐 완성판일지도 모르지만.
생각을 해보라.
그 어떤 존재가 자신들보다 나은 존재가 있음에도 그보다 못한 진화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화를 해왔다면 지금의 인류는 오크보다 강력한 육체와 엘프보다도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어야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진화 상태는 불완전한 진화임이 틀림없다.
‘어쨌든…….’
이 인류는 이렇게 불완전한 진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추켜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행동을 가능케 한 모든 것의 중심에는 역시 ‘말’이 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스스로의 말로써 스스로를 추켜세우고, 누군가의 업적을 대대로 기리며, 그런 누군가의 후손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를 반복한 끝에 그들은 지금의 오만함을 갖추었으리라.
그리고 이런 행동을 가능케 한 ‘말’이 있었기에 그들은 현존할 수 있었으리라.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큰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말.
자신이 가진 부족한 면모를 알고 있음에도, 명백히 자신보다 뛰어난 다른 존재를 짓밟고, 그 위에 서서 콧방귀를 뀔 수 있게 하는 엄청난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이 가진 무궁무진한 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이 무궁무진한 힘을 연구하는 학자로, 아까 말한 바 있는 신인류 급 극소수 중 한 명에 해당했다.
“올해로… 정확히 400년째.”
나의 나이 올해로 400하고도 18살.
여태껏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이곳, 낯선 곳에 떨어져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의 일을 짧게 회상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힘과, 이 힘의 원천이 되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수백 년에 걸쳐 말에 대해 연구했지만 아직도 나는 부족함을 느낀다.
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고 또 연구했지만 그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알지 못한다.
‘연구 방향을 잘못 잡은 걸까?’
수백 년 연구 끝에 이제 와서 회의감이 든다.
나는 말이 가진 힘의 기원을 쫓는 게 아니라 어쩌면 말 자체의 힘에 더욱 집중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런 연구 역시 병행하고 있기에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동시에 둘을 진행하는 것보다는 한 번에 하나의 일을 하는 것이 효율은 더욱 좋지 않겠는가.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집필 중이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배치된 침대로 곧장 걸어갔다.
그러자 언제부터였는지 내 머리 위에서 빛을 밝히던 조그만 빛덩어리가 나를 졸졸졸 따라온다.
내가 자리에 눕자 아까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처럼 내 머리 위에 고정되어 내 앞을 밝혀준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혀준다는 것은 설령 맹인에게라도 고마운 일이다.
본인은 보이지 않지만 남들에게 스스로를 알릴 수 있으니 보이지 않는다고 한들 남들이 그 맹인에게 부딪힐 일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앞의 저 빛 덩어리의 호의가 아니었다.
“불 꺼.”
나의 말 한마디에 단숨에 아스라한 빛으로 점멸하다 사라지는 빛 덩어리를 보면서 나는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고 갈구하던 말이 가진 힘의 원천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꿈.
그 원천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는 꿈이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온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