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언령의 주인 1권 (4화)
1. 꿈 (2)
어둡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느낀 첫 감상이었다.
‘몇 시간을 잔 거지?’
수백 년의 삶을 살아온 그에게 시간의 흐름이 가장 크게 와 닿았던 변화는 잠이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사실 그런 것보다도 인간 한계를 넘어선 강력한 육체가 많은 잠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눈을 뜨면 여전히 밤인 경우가 꽤 잦은 편이였다.
다만 오늘만큼은 다른 점이 있다면…….
‘유달리 어둡고… 몸이 무겁군.’
어두운 것은 여느 때처럼 여전히 밤이거나 구름이 심하게 껴서 달빛조차 가렸으리라 생각했기에 납득했지만, 몸이 무거운 것은 조금 납득하기 힘들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일을 겪어왔지만 병에 걸린 일은 살면서 많지 않았다.
수백 년간 마법을 수련하면서 질병에 저항력이 생기고 몸이 강해졌을 뿐 아니라, 300년 전부터 꾸준히 마셔온 엘프의 차가 육체 자체의 면역력과 생명력을 증대시켰기에 대륙이 초토화될 만한 전염병이 돌아도 그에겐 털끝만 한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물론 엘프의 차가 아니더라도 과연 그의 몸이 질병에 걸릴 수 있는지가 의문이긴 했다.
‘그래도 이런 게 내가 인간이란 증거겠지.’
보통의 인간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세월을 살아온 몸은 가끔 스스로가 인간이 맞는지 의구심을 들게 하던 참이니, 이런 몸의 변화도 인간이기에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 퀴퀴한 냄새는 뭐지?’
일평생 청결이야 말로 무병장수를 위한 첫 번째 실천 덕목이라는 말을 설파하는 것으로 대륙의 질병 감염률을 30%나 떨어뜨린 사람이 바로 그였다.
마법에 능숙지 못하던 때에도 한겨울에 몸을 달달 떨며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던 몸이었다.
그런 사람이 사는 곳에서 이런 퀴퀴한 냄새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방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자신이 잠든 방이 아닐 리 없었기에.
어차피 그에겐 이 상황을 단숨에 정리할 방법이 있지 않던가?
“클린.”
몸 상태가 안 좋은 탓인지 오늘따라 감각에 잡히지 않는 마나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본래 마나를 감지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마법을 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최소한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예외였다.
하지만.
“……?”
퀴퀴한 냄새는 여전했고 발동한 마법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눈앞은 여전히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두컴컴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것일까?
그런 생각도 무리가 아닌 것이, 그의 나이 60 이후로는 마법을 발동하여 실패해본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현상이 그의 실수라기보다는 어떠한 외적 요인으로 인한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소한 것에 긴 고민을 갖지 않았다.
그는 대륙 최고의 언령 마법사이고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풀 때 누군가의 손을 빌려본 역사가 없는 몸이었으니 말이다.
‘몸에 문제가 있긴 한가 본데… 확인을 위해 일단 불이라도 켜볼까?’
“불.”
반사적으로 시동어를 외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응당 있어야 할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실망하지 않는다.
‘뭐, 클린이 발동이 안 되었으니 당연한 건가?’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운 대응책을 생각했다.
‘일단 가장 좋은 방법은 물리적인 불을 찾는 것일 테지만…….’
하지만 이곳 저택에는 단 하나의 촛불도, 단 하나의 마법등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무언가를 덥히기 위한 불도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마다 마법으로 불을 일으키면 되는 것이었기에.
‘오늘 날이 밝으면 촛불이라도 하나 가져다 놔야겠군.’
물론 본인에게 생긴 이상을 해결한 다음의 일일 테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몸의 생체리듬은 지금 시간이 이른 새벽 내지는 아침이라는 것과 곧 밝은 해가 뜰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만 있으면 이곳 저택 꼭대기 층에 미관을 위해 설치해둔 커다란 창문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만약 아까 생각한 대로 구름에 가렸다고 한들 아침의 밝은 햇살은 이 어두운 공간에서 사물을 식별할 정도의 빛은 충분히 제공해 주리라.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올랐다.
그는 눈을 비비고 빛이 든 방 안을 훑었다.
“…….”
불과 약 2~3미터 떨어진 곳, 사람 머리 높이 정도에 위치한 작은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이곳의 처량한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당히 개어져 바닥에 놓인 옷가지.
비좁은 방 안을 채우는 낡은 책상.
그 위로 놓인 어둠 속에서도 땟자국이 선명한, 뒤통수가 툭 튀어나온 오래된 컴퓨터 모니터.
그 주변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각종 교과서를 비롯한 학용품들.
고장 난 채 시간조차 알리지 못하는 낡아빠진 자명종.
그리고…….
마모되어 앙상해진 ‘돌하르방’ 반쪽.
그가 아니, 현우가 현실을 인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꿈……? 아니, 이게 꿈인가?”
400년 전 이 자리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낯선 곳에서 만난 이방인들도,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현우를 친손자처럼 대하며 마법을 가르쳐주었던 스승님도, 종횡무진 대륙을 누비며 마법을 고뇌하고 마법을 연구하고, 수백 년에 걸쳐 마법의 진리를 찾아 헤매던 순간들이… 꿈일 리가 없었다.
현우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진짜 꿈이라고 믿고 있었다.
삐이걱-.
현우는 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신음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발을 디뎠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방바닥의 촉감이 지금 이곳이 현실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우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 퀴퀴한 냄새가, 어두컴컴한 방이 현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우는 몇 번이고 지금 순간이 꿈임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때 불현듯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말 만약에라도… 정말 만약이라도 이게 꿈이 아니라면… 그토록 기나긴 꿈을 꾼 현우의 시간은 못해도 몇 달… 아니 몇 년은 지나있어야 했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그게 불가능함을 알기에, 현우는 지금이 꿈임을 입증해줄 ‘불가능’을 찾아 시계를 찾아 나섰다.
‘시계… 시계가 어디 있더라?’
너무 오랜만에 ‘현실’로 돌아온 탓일까?
현우는 고장 난 자명종을 대신하기 위해 학교 앞 문구점에서 구입했던 전자시계를 찾았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정말 여태껏 이곳에 있던 것처럼 한 점의 어색함도, 한 톨의 망설임도 없었기에 현우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계는 찾을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저택 안에 놓인 모든 물건의 배치까지 인지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참 웃기지도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안도했다.
지금 순간이 꿈이었다.
어렴풋이… 아니 떠올리는 순간 생생해지는 400년 ‘이전 날’의 기억과 달리, 이곳에 시계가 없다는 것이 현우를 안도케 했다.
그 순간.
툭.
안도의 한숨과 함께, 힘이 풀린 다리가 헛짚은 곳에 느껴지는 이물감.
이물감이 느껴지는 곳은 언제나 현우가 자기 전, 전자시계를 풀어두던 침대 머리맡 근처의 바닥이었다.
“하… 하하… 설마…….”
조금 낡긴 했지만, 흑백이 선명한 전자시계의 초침은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자시계인 만큼 째깍째깍 소리는 없었지만… 이곳 ‘꿈속’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자시계가 10분을 표시할 때.
“아이 참! 엄마! 왜 안 깨워주셨어요!”
“어머? 엄마는 분명 깨웠거든? 알겠다고 계속 대답만 하고 안 나온 게 누군데?”
“그, 그건… 아무튼!”
투닥투닥, 높은 하이톤의 대화소리.
방문 밖에서 현우가 오래도록 잊고 지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잊고자 했던 것 중 가장 상위에 있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뭐야? 설마……?’
그 목소리에 현우는 귀를 의심했지만 잊었다고 생각한 ‘두 모녀’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현우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비틀.
다시 한 번 힘이 풀린 현우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흠칫!
“……!”
환한 거실의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선 길쭉한 인영은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현우를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너……! 왜 아직도 학교 안 갔어?”
지금 시간은 8시 10분여.
현우의 기억이 맞는다면 고등학교 2학년생인 현우는 10분 전에 학교에 도착해야 했고, 마찬가지로 현우의 기억이 맞는다면 평소의 현우는 남들보다 훨씬 일찍 등교를 했기에 지금 시간엔 집에 없어야 했다.
하지만.
‘이건 꿈이잖아?’
꿈속에서조차 그곳을 가야 한다는 말인가?
현우가 잊고자 했던 것들의 집약체인 그곳에?
아니, 그보다는…….
‘꿈에서조차 이런 상황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방문을 막아선 인영은 슬쩍 거실에 있을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문을 닫고, 거침없이 현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퍽!
“우욱!”
너무 아프다.
꿈속인데.
이곳이 현실인 것처럼 너무 너무 아팠다.
저 조막만 한 주먹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현우는 400년 전부터 의문이었다.
“야! 니가! 학교를! 안 가면! 어떡해! 응?”
퍽! 퍽퍽!
학교를 가지 않은 것.
그것을 이유로 현우는 맞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우보다도 ‘한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맞을 만한 이유인 것일까?
평범한 가정이라면 아들이 늦잠을 자서 학교 등교시간이 지나도록 방에 있다면 엄마에게 등짝을 맞을 수는 있을 것이다.
결코 여자애의 무차별적 구타 같은 게 있을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거부감은 없었다.
마치 이것이 당연한 일상처럼, 현우의 몸 곳곳을 파고드는 고통이 모두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지금이 현실이라고, 현우에게 계속 주지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아파, 왜? 꿈인걸? 이렇게 아픈데 왜 꿈에서 깨지 않지?’
맞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수많은 생각, 400년간 쌓인 지식, 지혜 중에 그 어떤 것도 지금 상황에 대응을 한다는 항목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몸을 동그랗게 말고 머리를 감싸 안는 것.
그것이 현우가 고통에 대응한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 행동은 400년 전보다도 훨씬 일찍부터 현우가 일상에서 해온 행동과 똑같았다.
“헉… 헉… 너! 오늘 일로… 후우… 나중에 집에 전화 와서… 하악… 나랑 같이 산다든지 하는 소리 들리면… 후… 진짜 죽일 거야.”
“…….”
지칠 만큼 한참을 때려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죽인다는 소리를 하는 여자애의 말은 어째선지 너무나도 일상적이게 들려왔다.
‘칼롯 코즈너’라는 마법사, 대언령사라 불렸던 400년 세월 속에서 죽음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서?
아니,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너무나도 일상적이라서… 그야말로 일상이라서 현우에게 그렇게 들린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