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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5화)
1. 꿈 (3)


조용한 현우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마지막으로 현우의 머리를 한번 차는 것으로 구타를 마무리한 여자애는, 휙 돌아서선 조금 전 방에 들어올 때와는 달리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거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현우가 빤히 보는 그 앞에서 현우의 지갑 속 지폐 몇 장을 꺼내 쥐고 재빨리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치 이곳에서 있었던 일과 무관하다는 듯이, 발랄하게.
“…….”
여전히 방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던 현우의 귓가에, 다시 한 번 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너 아직도 학교 안 갔어?! 어쩌려고 그래!”
“아앙! 엄마도! 어차피 지각인데 조금 더 늦는 게 어때서 그래~!”
“어머 어머, 얘 좀 봐! 큰일 날 소리 하네! 너 그러다 학교 가서 혼난다?”
마치 이곳에서의 일은 두 사람 중 아무도 모른다는 듯 이어지는 평범한 대화.
이조차도 현우에겐 일상으로 들려왔고, 실지로도 이것은 일상이었다.
삐빅! 철컥!
그사이 현관 바로 앞에 있는 현우의 방문 너머로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누군가’가 집을 나선 것이리라.
그제야 웅크리고 있던 현우의 몸이 길게 펴졌다.
그러곤 고통을 식히듯,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김… 예린.’
조금 전 현우를 때리고 학교로 출발한 여자.
현우보다 한 살 어리고, 현우와 달리 학교에서 예쁜 외모로 인기 있는 여자애이며.
선생님들에게도 인기 있는 우등생.
누구에게나 친절한… 현우의 여동생.
아니, 실제로 여동생이 맞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아버지의 편지 한 장을 들고 나타난 두 모녀가 각자 자신들을 엄마와 여동생이라고 알려줬기에 여동생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들이 생모도, 친동생도 아니란 걸 현우는 잘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한 말이었기에 현우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 그중 엄마에 대한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역시 현우의 생각대로 엄마란 존재는 포용, 부드러움, 따듯함…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단적인 예로… 조금 전의 상황.
거실의 수다와, 문이 여닫히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저 문을 통해, 현우가 구타당하는 소리가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상이 되었을 때.
현우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견고히 했다.
엄마란 책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생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제 어쩌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생생하게 몸이 느끼고 있었다.
이 등 뒤로 전해지는 차가움이, 몸 곳곳의 얼얼함이.
여전히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시계가.
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현우는 지금…….
“꿈을… 꿨던 걸까?”
대륙을 종횡무진하고, 악을 판별하고, 어려운 이에게 지혜를 나누고, 마법과 언령의 진리와 근원을 찾아 끝없이 탐구했던 400년의 시간.
그 모든 것이 꿈임을… 현우는 점차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학교를 가야 하는 것일까?’
본래의 등교에 비해 이미 많이 늦은 시각.
아마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심란한 마음이라면 한 번쯤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을 고려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벌떡-.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등교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상 속의 현우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최소한 그의 겉모습만을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 눈에 현우는 완벽해야만 했다.
그것은 일종의 괴질.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워온 현우에게 있어 책 속에서 바른 것이라 말한 것을 성심성의껏 행동하는 현우의 괴질이었다.
그리고 현우가 읽은 책 중에 그 어느 곳에도 학교를 가고 싶지 않다고 가지 않는 게 바른 것이라 설명한 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런 괴질의 원인은 단순히 책을 통해 배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우에겐 그보다도 큰 이유가 있었다.
이토록 바르게 생활을 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아버지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주된 원인이었다.
유년시절 현우의 모든 것이었던 현우의 아버지는, 여타의 다른 아버지들과는 다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린 현우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지도, 훈계하지도, 훈육하지도 않았다.
그저 매번 지그시 바라만 볼 뿐.
그럴 때면 언제나 현우는 아버지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일삼았다.
일부러 장난을 쳐보기도 하고, 일부러 혼날 일을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현우의 아버지는 언제고 현우를 지그시 바라만 볼 뿐.
그러던 어느 날, 현우가 주워섬긴 책 속 한 구절에, 현우는 아버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바로 다음 날부터, 현우는 미친 듯이 책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의미도 모르는 단어들의 나열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현우는 아버지와 씨름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그동안 아버지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행동들과 반응을 보였던 일의 차이점.
그 차이점은 단순히 책만이 아니라는 것이 어린 현우의 결론이었다.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나쁜 행동과, 모두가 칭찬하며 관심을 주는 바른 행동의 차이.
현우는 그 차이를 인식했고, 그 이후로 현우의 행동은 ‘바름’을 중심으로 했다.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할 일에 대해서도 책을 기준 삼아 옳고 그름을 따졌다.
누군가 상세히 가르쳐준 사람이 없기에 현우의 기준은 언제나 책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현우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없었다.
현우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그가 가진 지식을 쏟아내기 시작했을 때는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그를 천재라 추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는 현우가 생각한 ‘바름’이 효과를 내는 것이라 본인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한 해, 두 해… 계속해서 이어지고 현우의 객관적 지식이 여타 다른 어른을 한참 압도할 때쯤, 현우는 그들의 시선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 짜증, 경멸.
이젠 익숙해진 시선들이 언제나 현우를 향했다.
하지만 현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행하는 일들은 모두 ‘책’이 알려준 ‘바른’ 행동이기에.
이를 이상하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것은 그들이 가진 인간적 결함 때문이라고 치부했다.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책이 알려준 인생 ‘매뉴얼’의 내용대로 행동하는 자신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지낸 것이 10년이었다.
현우는 처음과 다름없이 행동했고, 나이를 먹을수록 풍족해진 지식은 현우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머릿속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현우는 그의 아빠 앞에서 완벽하고 바른 사람이어야만 했다.
현우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학교… 가고 싶지 않아…….’
학교에 가면 400년 전… 아니 ‘지금’ 시간으로 따지면 약 10시간 전까지 겪었던 일들이 되풀이될 것이다.
주섬주섬-.
그럼에도 현우의 몸은 정직하게 가방을 챙긴다.
현우의 이런 바름, 정직한 행동 등은 꿈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모를 400년의 세상에서 그를 최고의 자리로 이끈 일등공신이었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지금 이 순간은 여태껏 그를 괴롭혀온 괴질이었다.
물론 이런 행동이 몸에 밴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현우 스스로가 명확히 인식하는 남들과 다른 부분임은 틀림없었다.
‘출발 전에 가볍게 씻어야겠군.’
시간은 이미 늦었고 한시라도 빨리 학교에 가야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현우는 바름이 판단의 기준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청결은 학교의 지각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바름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런 것보다도 현우의 바름의 판단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았다.
현우가 읽어온 많은 책들에선 다들 같은 주제를 두고도 여러 가지 다른 말을 했었다.
보통의 결론은 비슷비슷했지만 그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관점은 대부분 달랐고, 간혹 결과도 다른 경우가 있었다.
즉, 현우 역시 어떠한 상황, 사물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이 언제나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평소라면 절대 없을 ‘지각’이라는 상황에 닥친다면, 곧장 학교로 가거나 혹은 씻고서 청결한 상태로 학교에 간다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보통이라면 학교를 가지 않는다 등의 선택지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은 애당초 ‘바름’에서 어긋나 있었기에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선택에 있어서 현우는 더 많은 것을 얻는 쪽을 택했다.
전자의 경우 불결함과 지각을 얻는 결과가 생기지만 후자의 경우 최소한 불결함을 떨어낼 수가 있었다.
현우의 선택은 언제나 이런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융통성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현우에게 있어서 응용이었다.
융통성과 응용은 엄연히 다른 것.
융통성은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으로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라면, 현우의 응용은 이미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상황에 대입시켜 최대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아직까지도 뭐라 확답할 수 없는 400년을 만들어준 힘 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행동 루트를 정한 현우는 곧장 방문을 열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곤 세면대 앞에 섰다.
“……정말 그때의 나로군.”
거울 안에는 고집 센 인상의 얼굴을 찌푸린 늙은이도, 선 굵은 얼굴에 강인한 몸을 가진 중년인도 없었다.
그저 그들과 비슷한 멀대같은 키를 가진 유약해 보이는 소년이 있을 뿐.
큰 키와는 별개로 비쩍 마른 몸은 바람에 날려갈 듯 보였고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는 눈가를 가리며 한층 어두움을 자랑했다.
끼릭-.
쏴아아아.
오랜만에 혹은 어제 저녁 이후 처음으로, 마법으로 불러낸 물이 아닌 현대 기술에 의해 정수 과정을 거친 물이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보며 현우는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시간이 촉박함을 알지만 왠지 쉽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