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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6화)
1. 꿈 (4)


나무토막에 마법으로 정제한 동물의 굵은 털들이 박힌 칫솔 대신 공장에서 제조된 플라스틱으로 만든 칫솔을 바라보며, 현우는 도저히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런 기분은 이곳에서의 18년 삶 속에서도, 저곳에서의 400년 삶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쏴아아아.
세면대에 차오르는 물 위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물이 떨어져 내렸다.

* * *

깔끔하게 세면을 마친 현우는 곧장 교복을 챙겨 입고 가방을 멨다.
400년 만에 메는 가방이 어색할 만도 하지만 어째선지 한 점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현우는 쓰게 웃었다.
마음속으로 조금은 어색하길 아니, 굉장히 많이 어색하길 빌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400년을 부정당한 현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장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소파에 앉아 TV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현우가 방을 나오는지 어쩌는지, 그런 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역시도 현우에게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우는 또 한 번 쓰게 웃었다.
이젠 진짜로 학교에 가야만 했다.
“불 꺼.”
속닥.
현우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주 작게 맴돌았다.
그리고 세 번째… 쓴 웃음을 지었다.
다시 방문을 열고 켜져 있던 방의 불을 껐다.
딸각-.
많은 준비,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은 준비 끝에 현관문을 연 현우가 집을 나섰다.
아마도… 400년 만의 등교였다.

* * *

현우도, 현우의 동생도 모두가 떠난 집 안.
혼자 거실에 앉아 TV를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껌-뻑.
정전이라고 보기엔 조금 짧게.
형광등의 수명이 다했다고 보기엔 조금 길게.
거실의 불빛이 깜빡였다.
“……?”
TV를 보던 여자의 눈이 빙글 천장을 향했다.



2. 집 밖에는 (1)


현우가 집을 나섰을 때.
현우는 아주 기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분위기가… 묘하다.’
말로는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가 현우가 기억하고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세상에 괴리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현우가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순간 명확해졌다.
츠즈즛-.
흠칫!
현관을 지나는 순간 몸을 쓸어내리는 마법의 기운에 현우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엔 잘못 느낀 줄 알았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내내 느껴지는 규칙적인 파동은 현우를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현우는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고, 그런 현우를 보고 아파트 앞을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았지만 현우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냐! 대체 어디서 마나 디텍트를!’
마나 디텍트라 하면 말 그대로 마나 감지였다.
보통 수준이 있는 마법사들은 이 마법을 이용해 다른 마법사 혹은 기사의 마나 수준을 측정하여 능력을 가늠하곤 했고, 경우에 따라선 알람과 함께 경보용으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마법이었다.
물론 지금 현우가 느낀 마나 디텍트는 마나 사용자와 비사용자 정도를 감지하는 아주 낮은 수준의 마나 디텍트였다. 그 수준이면 질이 굉장히 낮았기에 현재 제대로 마나를 느낄 수 없는 현우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자연계의 마나가 아주 우연하게도 마나 디텍트의 수식과 비슷한 형태로 밀집한 것이 아니라, 분명 완성된 수식에 의한 마법의 발현이라는 점이었다.
‘대체 어디……. 저건?’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길 한참.
현우는 아파트 현관문 양옆으로 설치된 아주 얇고 기다란 막대기를 볼 수 있었다.
마치 공항의 검색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 자체는 아파트 현관의 모습과 어우러져 마치 원래부터 거기에 서 있던 것처럼 보이게 되어있었다.
‘아티팩트다……!’
아티팩트란 어떠한 물건에 마법 수식과 주문을 새겨 넣음으로써 마법을 모르거나 혹은 해당 마법을 발휘할 수 없는 마나의 소유자도 마법을 사용하게 하는 마법 물품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런 아티팩트는 만드는 데 있어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데다, 하찮은 마법일지라도 만드는 데는 높은 마법 수준을 요구했기에 굉장히 비싸기 마련인지라 굉장히 귀중하게 보관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결코 이렇게 아파트 현관 앞에 멀뚱히 서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라는 의미였다.
‘이, 이게 대체……?’
당황스러운 마음에 주변을 좀 더 자세히 훑어보니 주변 모든 현관 앞에는 같은 아티팩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이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400년의 꿈…으로 추정되는 것에서 깨어났을 때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현우는 자신이 마나를 예민하게 감지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 세상엔 원래 마법이란 게 있었던 걸까.
현우는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이전 18년의 기억 속엔 이런 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만 비켜줄래요?”
“네? 아, 예.”
뚜벅뚜벅-.
“…….”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곳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현우뿐인 듯, 그 누구도 아티팩트에 신경을 쓰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파트 현관 앞을 막고 선 현우가 등교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혹시 착각은 아닐까?’
현우가 급기야 자신의 감각을 부정하며 마나 디텍트가 걸린 아티팩트를 만져봤지만 그것은 분명 지정된 수식에 따라 마법을 발동시키고 있는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이 괴현상에 당황한 현우가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현관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등 뒤로 지나가는 무언가가 현우의 감각을 건드렸다.
흠칫!
두리번두리번!
하지만 현우의 뒤에는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와 단지의 정문을 향하는 한 대의 차량뿐, 이상할 것은 전혀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렇기에 현우의 시선을 더욱 잡아끌었다.
비현실이 가득한 곳에 존재하는 평범하고 현실적인 풍경이 조금이지만 현우를 진정시켰다.
물론 정말 조금뿐이었지만…….
우-웅!
보통의 사람은 전혀 들을 수 없는 소리가 현우의 귓가에 진동했다.
옅은 떨림.
마법이 발동하기 전 마나가 공명하는 아주 작은 소리.
평범하기 짝이 없던 자동차에서 울려온 그 소리는 조금 안정되어가던 현우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현우는 혹시나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은 아닐까,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싶어 자동차를 면밀히 살폈지만 자동차가 굉장히 비싼 외제차라는 것을 제외하곤 알아낸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전기를 생산하는 마법 장치가 되어 있다!’
정확히 어떤 마법이 사용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동차가 정차했다 움직이는 순간 울리기 시작하는 마나의 파동음은 마나가 전기의 형태로 재배열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기가 동력원이 되어 자동차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 역시 알려주고 있었다.
‘굉장히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분명히 마법이야!’
우리가 흔히 아는 전기자동차라면 코드를 꼽고 충전해서 사용하는 형태여야 했지만 현우의 눈앞에 보인 것은 분명 마법으로 전기를 생산해서 움직이는 전기자동차였다.
‘내가 미친 걸까?’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현우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가 진짜 꿈은 아닐까?’
사실 가장 유력한 부분이었다.
아직까지도 현우는 자신이 칼롯 코즈너의 세상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칼롯 코즈너가 되는 400년짜리 꿈을 몇 시간에 걸쳐 꾼 것인지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마법이라니!
마나라니!
이건 꿈이 아니고선 설명이 불가능했다.
“…….”
마법을 인지하는지 아니면 못하는지, 아무렇지 않게 아티팩트 사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과학기술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사용하는 것인지 평범하게 운전을 하는 사람들.
너무도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현우는 난생처음으로 생각을 함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언령사 칼롯 코즈너가 마법에 대해, 언령에 대해 연구하면서 전인미답의 경지에 오르며 새로운 지식에 대한 답을 결정해 나가던 순간에도 이만한 혼란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은 언제나 책이라는 지표가 현우에게 바름을 인도했고, 가장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은 그 어느 책에서도 대답해준 적 없는 경우였다.
‘내가 김현우이던 시절의 기억이 칼롯 코즈너의 꿈과 결합된 것일까?’
지금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답안이었다.
‘그렇다면 여긴 꿈인가?’
현우는 조심스레 아파트 화단의 흙을 쓸어 보았다.
도심의 흙답게 큰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거칠고 뿌옇게 묻어나는 질감은 꿈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그다음엔 길가에선 표지판을 손으로 짚었다.
쇳덩이의 차가운 감촉이 손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다음엔 시멘트 바닥을, 옆의 가로수를, 그 잎사귀를.
만지고, 부비고, 핥아서 맛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현우를 봤지만, 현우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바름’에 대해 잊고 자신이 해보고 싶은 모든 것을 하고 있었다.
‘이 감각이… 모두 꿈이라고?’
이토록 선명하고, 생생한 감촉이 과연 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현재 있는 이곳이 진짜 현실이라고 조금씩 마음을 기울여가던 중이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 유달리 남들보다 생각이 많다는 점과 그런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는 점을 제외하곤…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현우였다.
그런 현우가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마법을 배워 그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꿈같은 얘기,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현우도 다르지 않았다.
수백 년분의 칼롯 코즈너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엔 생생하지만 그런 게 현실이라고 믿는 것보단 당장 전자시계의 숫자가 차분히 올라가는 쪽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합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마나.
아파트 입구에 줄줄이 선 아티팩트들.
이젠 차라리 지금 이곳이 꿈이라고 믿는 게 더 현실감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