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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25화)
6. 등장 (6)


다음 날 아침.
현우는 멀쩡히 학교에 등교했다.
사실 딱히 멀쩡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지만 언령으로 묶인 바 있는 현우는 학교는 갈 수 있다면 가는 게 좋았다.
‘이성희는 아무래도 안 나오겠지? 그런 일을 겪었으니 말이야.’
현우에 비한다면야 크게 다친 부분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여자의 몸으로 그런 일을 겪고도 멀쩡하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드르륵!
“안녕!”
“……이상한 거군.”
“……그거 나한테 한 말이야?”
“…….”
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희는 알아들었다는 듯 활짝 갠 얼굴로 말했다.
“하긴, 너한테 인사를 하는 건 이상한 게 맞지.”
“…….”
현우가 생각했던 바와는 좀 다르지만 그녀의 말 자체는 맞는 것이었기에 현우는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이때, 그런 현우의 앞에 불쑥 이성희의 얼굴이 다가왔다.
“하지만 말이야!”
“……뭐냐.”
깡마른 빈약한 손가락으로 그보다 몇 배는 커다란 이성희의 얼굴을 조심스레 밀어내는 현우는 이어지는 이성희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강간당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고작 아침 인사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이상한 거 아니겠어?”
아무리 미수에 그쳤다지만 보통 피해자였던 사람이 저런 단어를 사건이 있은 지 하루 만에 저렇게 입에 올릴 수 있게 되는 게 정상일까. 현우는 고민했지만 사실 정상, 비정상을 따진다면 현우야 말로 자기 코가 석자였다.
“……정신적인 문제라.”
딴엔 맞는 말이었다.
현우 스스로도 느끼기에 예전에 비해 기존의 칼롯 코즈너의 지식과 지혜를 흡수한 지금의 현우는 칼롯 코즈너 시절보다도 유(柔)해진 감이 있었다.
칼롯 코즈너는 상식이나 지식이란 부분에선 언제나 열린 생각을 가진 데 반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선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못해 쌀쌀맞은 편에 속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 당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모두 나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서슴지 않았을 테지.’
만약 칼롯 코즈너가 인간에게 관대하고 모두를 포용하는 너그러운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아마 대륙 공인 절대무적의 전략병기인 그를 차지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파견된 여자들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뭐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인간관계를 갖는 데는 서로 간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 언제나 명확히 정의하는 현우였다.
최소한 현우의 주변 사람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칼롯 코즈너를 포함한 현우의 일생 속에서 유일하게 계약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지지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오직 그의 스승이었던 도나 코즈너뿐이었다.
그에게 칼롯 이란 이름을 주고 코즈너란 성을 물려준.
그의 단 하나뿐인 스승.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스승님…….’
수백 년 세월 속 많은 것이 흐려졌지만 스승인 도나 코즈너의 인자한 웃음만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현우였다.
바쁘고 혼란스러웠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오랜만에 떠올리는 스승의 얼굴에 현우의 얼굴 위로 긴 호선이 그어졌다.
그렇게 현우가 딴 데 정신이 팔린 이때.
현우의 기다랗게 변한 입가로 손가락 하나가 다가와 현우의 오목한 볼을 폭 찔렀다.
“뭐, 뭐 하는 거냐!”
“에엥? 왜 그렇게 정색해? 얼굴 찌르는 건 싫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이성희를 보면서 내심 한숨을 쉰 현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보통은… 싫어하기 마련이야.”
“헤에, 그렇구나. 근데, 근데! 있잖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던 거야? 왜 그렇게 변태처럼 씨익 웃고 있었어?!”
현우의 대답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금세 자신의 관심사로 넘어가는 이성희를 보며 뭐라 대꾸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던 현우는 이어지는 이성희의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으응? 무슨 생각했어? 혹시… 그 생각?”
“그 생각?”
“그 왜 있잖아… 어젯밤에… 우리 둘이… 바람 부는 공사장에서…….”
“야, 야! 그게 무슨!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현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이성희는 재밌다는 듯 짤랑거리는 맑은 목소리로 깔깔 웃어 재꼈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교실로 반 애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창 등교가 절정에 이르는 시간인 탓이었다.
하지만 반에 수많은 이성희의 친구들이 들어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수다는 현우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보다도 훨씬 활기찬 모습을 하고 있으니 모두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평소라면 각자의 이야기로 왁자지껄, 웅성거렸을 교실이 이성희와 현우의 대화로 가득 찼다.
반 애들은 그런 둘의 대화에 조금씩 흥미를 갖고 조금씩 귀 기울였지만 조금씩 둘의 대화에 빠져들다가도 이내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비록 이야기를 엿듣는 것에 불과 했지만 현우 주변에 있다가 불똥이 튀는 경우는 부지기수였기에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반 애들은 당당히 현우와 대화를 하는, 아니 사실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고 있는 이성희를 보며 용기 있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미련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조금 뒤 ‘폭군’이 등교할 때가 된다면 현우도 그녀도 오늘 하루가 힘들어질 것임을 다른 아이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등교시간이 다 가도록 그들 위에 군림하던 폭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측근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같이 학교를 안 나왔으니 무언가 있으리라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고 아침 조례가 시작할 때까지 속닥속닥 여러 가설들이 오고 갔지만 현우의 귀에 들려오는 것들 중 정답에 근접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마침내 조례시간이 되어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반의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부터 대답해 주었다.
“오늘부터… 성빈이와 찬수는 집안 사정으로 학교에 못 나오게 되었어요. 아마 둘 다 다른 학교로 전학 가게 될 것 같다고 해요. 갑자기 친구 두 명이 반에서 사라져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모두 흔들리지 말고 더욱 공부에 매진해서 모두 좋은 대학에서 같이 만나도록해요. 이상 조례 마칠게요. 반장, 오늘은 바쁘니 인사 생략하고 이따 수업준비 잘 해놓으세요.”
그렇게 자신이 할 말만 투다다 쏟아내면서도 어째선지 반장인 이성희의 눈치를 보던 담임선생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쁜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가버렸다.
그리고 담임이 나가기 무섭게…….
“후후후… 푸히히힛!”
이성희가 정말 대놓고,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반의 친한 친구들을 둘러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순진한 꿀벌들이 꼬여든 건 당연지사.
적당히 관객을 모은 그녀의 입에서 좋은 일이라곤 없었던 어제의 무용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제 말이야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데 정문 앞에……!”
하굣길을 프롤로그로 시작된 무용담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처음엔 그녀의 친한 친구들이 그녀 주변에 모여 듣던 것에 반의 모두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이 반을 뒤흔들던 폭군과 그의 측근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녀의 말에 매료된 탓이 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나 현우에게 있어 좋은 내용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도 모두의 귀를 모을 만큼 쓰잘머리 없이 신나던 이야기가 끝났다.
“와, 개새끼.”
“그런 쓰레기 같은……!”
“그래서? 그래서 깜빵 갔어?”
“으휴, 어쩐지 너무 나댄다 싶었어! 지 아빠가 돈 좀 번다고 유세부리더니… 쯧쯧.”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난들 속에서 눈치를 보던 본래 박성빈의 패거리로 활동하던 녀석들은 한참이나 기울은 여론을 보고 은근슬쩍 시류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야, 니가 그렇게 말해도 돼?”
“걔 따까리였으면서.”
물론 단숨에 면박을 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 별생각 없이 노트를 펼쳐놓고 아직 개량이 덜된 6클래스 마나를 7클래스 급으로 증폭시켜주는 마법진의 수식들을 정리하고 있던 현우는 조금씩 따가워지기 시작하는 시선에 노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라면 현우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을 반 애들이 모두 현우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이성희의 이야기가 시작할 때쯤, 이미 아는 내용을 들을 필요 없다고 판단한 현우였기에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은 현우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현우로선 반 인원 모두가 현우 자신을 주목할 만한 이유를 하나도 떠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제 일중에 한 거라곤 그냥 계속 맞는 것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주목받을 일인가?’
박성빈 패거리에 얻어맞던 일 자체가 일상이었던 만큼 현우로선 대단할 게 없는 내용이었다.
물론 실제로도 그런 이야기는 대단할 게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제 대마법사의 언령으로 암시를 받은 이성희가 양복 남자의 출현을 없애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현우의 대활약상을 각색해 넣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여자를 탈출시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박성빈과 정찬수를 막아섰던 이야기나, 넘어져 위기에 처한 이성희를 몸으로 덮어 지켜준 것이나…. 실상은 모두 그냥 두드려 맞은 것뿐이던 것이 이성희의 입을 거치자 엄청난 활약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경찰에 신고를 한 것도 현우가 기지를 발휘해 컨테이너에서 여기저기로 물건을 집어던져 누군가의 신고를 유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당연히도 현우로선 금시초문이었으니… 자신에게 몰려드는 기묘한 시선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현우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들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지어줬다.
여전히 기괴한 몰골만큼이나 기괴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현우를 향해 뜨거운 갈구의 눈빛을 보내던 이들에겐 충분한 은총이었다.

그렇게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가고.
학교에 학생들 사이에 알음알음 전해져 구전되어질 전설은 그날 그렇게 시작되었다.


<『언령의 주인』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