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언령의 주인 1권 (24화)
6. 등장 (5)


‘그나저나 두 명이라니…….’
현우는 남자의 말 중 문득 떠오르는 부분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인원은 남자를 포함 네 명, 그리고 조금 전 대화는 메시지 마법 같은 특수한 방법을 사용한 게 아니라 일반 육성을 통해 이어졌다.
즉, 현우와 이성희뿐 아니라 뒤에 있던 박성빈과 정찬수도 모두 들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두 명을 언급한다? 살인 멸구할 셈인가?’
하지만 이런 현우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양복의 남자가 조금 전 현우들과 대화하며 섰던 곳보다 딱 한 발자국이 더 멀어지자 현우는 여태껏 그들 주변에 무언가 장막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장막이 대화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있었으며, 지금 그가 멀어지는 것을 기점으로 자연스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마법사들이 나를 봤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현재의 현우로선 꿈도 꾸지 못할 경이적인 마법 경지에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마법적 지식은 현우가 압도하고 있을 게 뻔한 만큼 시간만 주어진다면 해결될 격차지만, 눈앞에서 자신보다 한참 상위에 있는 실력자를 만나고 그의 실력을 체험하고 보니 현우는 자신이 꽤나 자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당장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현우는 스스로 죽음을 각오했기에, 죽음 이상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하며 학교에 왔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현우는 단순히 죽음을 예약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게 아니었다.
얼마 전 3클래스 마법을 발동하여 사람을 단숨에 죽여버렸다는 경험, 이런 마법이 있다면 누구라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이들을 여차하면 손봐 줄 수 있다는 영악한 생각이 있었기에 두렵지 않은 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약자에게 강하다.
‘나는 꽤나 혐오스러운 놈이었군.’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마법을 제한하고 폭력을 억제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애당초 그들을 밑으로 깔아보고 약자에게 아량을 베푸는 듯, 조롱하듯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그간 박성빈 패거리가 현우에게 해온 행위와 다를 게 없었다.
그들 역시도 전형적인 약자에게 강한 양아치들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멀었군. 정말 멀었어…. 수백 년 단련이 무용하다……!’
그렇게 현우가 자기혐오에 빠져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는 사이.
애애앵!
바깥 공사장 쪽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더 지나자 컨테이너의 문을 박차고 총까지 든 경찰 여럿이 뛰어들어 왔다.
그러곤… 들어온 자세 그대로 모두 멈칫했다.
연장을 꼬나 쥔 두 남학생과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덮치듯 여학생을 가리고 있는 또 다른 남학생.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정자세로 누워 있는 여학생의 구도는… 아무리 경력 많은 형사들이라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구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경찰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어느새 모습을 감췄었는지 현우들 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스르륵 등장한 양복 남자는 그 놀라운 등장 방식에 경계하는 경찰들을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의 한 면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수첩이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수첩 위로 선명한 글씨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홀로그램처럼 영어와 한국어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적힌 신분 설명이 떠올랐다.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로 있던 현우는 그 내용을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각국 언어로 동일하게 반복되는 요원이라는 단어와 룬 문자로 큼지막하게 적힌 한 단어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공인 5클래스]

‘거짓말!’
6클래스 마스터라고 해도 믿어줄까 말까 한 판국에 5클래스라니.
사기나 다름없는 자격 증명용 신분증이었다.
물론 현우가 이곳 세상의 마법 수준을 알고 있었다면 7클래스라는 마법 수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며 어찌 보면 숨기는 게 맞는 일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랐지만, 본인이 마법사이면서도 정작 이 세상의 마법사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현우는 아직까지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조금 전을 기점으로 이 세상의 마법사에 대해서도 꽤나 흥미가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남자의 신분이 확인되자 남자를 향해 경례를 한 경찰들은 이내 그 남자로부터 사정청취를 듣기 시작했다.
사건의 피해자, 피의자 당사자들을 놔두고 목격자 진술부터 받아 적는 모습에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양복의 남자는 어찌나 이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지, 과연 현우가 설명했어도 저렇게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상황을 설명 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완벽한 설명을 해나갔다.
그렇게 처음 모습 그대로 멍하니 남자의 말을 듣고 있는 이때, 현우 밑에 깔려 있던 이성희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야?”
“그야 몸이… 응? 아, 미안하다.”
이성희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려던 현우는 그의 밑에서 몸을 뒤트는 이성희를 보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언제…….’
현우의 몸이건만, 현우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몸의 마비는 풀려있었다.
여태껏 계속 감탄해왔지만 사실 지금까지의 마법 실력을 제쳐두고도 지금 몸의 주인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 상대의 몸을 통제하는 언령의 힘만 봐도 저 남자가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현우와 이성희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여태껏 멀뚱히 서있던 박성빈과 정찬수 역시 놀란 모습으로 자신들의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결 편하게, 경찰들 가까이에 선 둘과 달리 박성빈과 정찬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미묘하게 간격을 유지하며 서있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수갑만 차지 않았다 뿐이지 그들은 사실상 체포된 상태나 마찬가지였으니 멀뚱히 서 있는다는 게 굉장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눈을 굴리며 마주하고 있는 데야… 그 어색함이 이루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결국 그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이성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저는 나가 있어도 될까요?”
비록 미수로 그쳤지만 강간을 시도한 녀석들과 함께 있는 건 화가 나기도 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성희의 목소리를 들은 경찰 한분이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그녀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아참! 학생은 피해자지! 미안해요! 그래, 고생했어요. 지금 바로 앞에 앰뷸런스랑 같이 왔으니 가서 진료 받고 아픈 데 약 같은 거 바르고 있어봐. 이것만 끝나면 저 녀석들 데리고 나갈 테니까.”
범인들이 검거된 이상 본래대로라면 피해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그들이 힘들지 않게 이런저런 도움을 줘야 하는 게 경찰이 우선해야 할 일이었지만 남자의 생생한 이야기에 빠져든 경찰들은 자리를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하루 현우들이 겪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남자가 워낙에 달변이기도 했거니와 7클래스에 달하는 언령의 힘이 그의 이야기에 어우러져 자연스레 경찰들이 본분을 잊을 만큼 매혹당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현우는 그런 경찰들의 모습에 한편으론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경찰이 자신들이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일을 망각한 것에 대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다 이때.
현우는 컨테이너 바닥에서 눈에 띄는 물건을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그러곤 조금 전 이성희가 그랬던 것처럼 말하고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답답하던 컨테이너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세상은 아까보다 훨씬 깜깜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뀐 것은 하늘의 색만이 아니라는 듯 공사장 펜스를 넘지 못한 저녁의 쌀쌀한 바람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깡마른 현우의 몸을 강타했다.
몸 자체가 외부의 무언가에 저항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 만큼 찬바람은 현우에게 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더 아픈 것은 따로 있었다.
후우우웅~!
펄럭~!
“…….”
“……봤어?”
“음… 자, 이게 얼마나 보온 효과가 있을진 모르지만… 입어라.”
순간 바람에 휘날려 완전히 뒤집히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치마 자락을 붙잡고 묻는 이성희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현우는 손에 쥔, 조금 전에 컨테이너에서 주워온 순백의 천 조각을 내밀었다.
“바닥에 장시간 있었으니 위생상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없는 것보단…….”
짝!
“……나쁜 놈!”
“…….”
찬바람에 볼이 언 탓인지 유달리 아프게 느껴지는 따귀에 할 말을 잃은 현우는 자신이 준 팬티를 손에 쥐곤, 현우를 가림막 삼아 재빨리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는 이성희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사각지대에 들어서기 직전.
휘이잉~!
펄럭! 펄럭!
“…….”
“…….”
홱!
홱!
마치 짠 것처럼 이성희의 시선이 그녀의 바로 뒤에 있던 현우를 향할 때, 현우의 고개 순식간에 돌아가며 멀리 떨어진 쓰레기를 응시했다.
……물론 현우의 경우 성능 나쁜 몸뚱이의 몸은 고개보다 훨씬 느려서, 몸은 이성희 쪽을 향하고 고개만 거의 부러질 듯 꺾여서 바닥의 쓰레기를 쳐다보는 기괴한 꼴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잠시간 의미 불명의 대치가 지나고 다시 몸을 돌려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이성희를 감지하면서 현우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현우의 등 뒤로 커다란 그늘이 졌다.
툭-!
흠칫!
현우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생소한 감촉에 흠칫 놀라 어깨를 두드린 손을 찾았고 이내 그 손의 주인이 현우와 이성희를 구한 자칭 5클래스의 7클래스 대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는 무언가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처음으로 현우가 보는 정면에서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딴엔 기분 좋다는 듯, 혹은 기분 좋아지라는 듯 웃은 것 같아 보였지만.
어째선지 현우는 그 웃음이 마치 놀리는 듯해 썩 유쾌해 보이지 않는 비틀린 웃음으로 보였다.
“…….”
게다가 현우는 어째선지 그런 남자의 웃음이 익숙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그런 걸 본 것만 같은, 마치 데자뷔 같은 그런 기묘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 남자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해해야 하는 현우로선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터덜터덜-.
그의 뒤편, 좀 떨어진 곳에선 수갑을 찬 교복차림의 남자 둘이 컨테이너에서 나와 경찰차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현우가 이전부터 오래도록 봐왔던 언제나 자신감이 과도하게 넘치던 녀석들의 발걸음이라고 생가 못할 만큼 한줌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부턴… 조금 조용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겠군.’
오늘 점심때였던가.
그 일을 계기로 둘 중 하나가 학교에 안 나올 만한 핑계가 생길 수도 있을 거라는 현우의 예상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휘영청 달이 밝았다.
며칠 전 보름달이 떴었는지 오늘은 상현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