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언령의 주인 1권 (23화)
6. 등장 (4)
깔끔하게 차려입은 양복 차림의 남자는 허공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점점이 나타나더니 이내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췄다.
그 신비한 등장에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 있던 찰나.
현우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지만 현우만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행동이 제약 받았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엄청난 언령……! 특별히 마법을 사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저 한마디 말을 한 것만으로도 언령사인 나를 멈춰 세우다니.’
같은 언령사라면 상위의 언령사의 언령에 영향을 받는 건 당연지사.
이곳 세상은 잘 모르겠으나 현우가 알고 있는, 저쪽 세상에선 언령사란 존재는 흔한 게 아니었다.
전체 인구 중 극소수의 천재 마법사, 그런 천재들 중에서도 다시 한 번 걸러져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언령사였다.
물론 이뿐이라면 언령사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언령이 일반 마법보다도 훨씬 어렵다는 데 있었다,
언령 마법은 마법을 만들어내고 발동시키는 말을 단련하는 만큼 보통의 마법보다 강한 힘을 갖지만 그만큼 관리하고 키우기도 힘든 힘이 언령이었다.
거기에 마법 발동 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언령사도, 일반 마법사도 술식, 수식, 룬어, 주문을 공부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
확실한 힘을 보장하지만 언령사의 길은 너무도 험난했다.
그뿐이랴, 보통의 마법사들과 달리 본신의 마나보다 언령이 가지는 마나 지배력이 훨씬 중요한 언령사는 말실수 한 번에 일평생 쌓아온 걸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적 위력만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페널티와 다름없는 언령사에 도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비록 현재 마나 지배력은 4클래스 수준이라고 하지만… 보통 마법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6클래스에 육박하는 언령 수준일 터…. 그런 나를 언령으로 눌렀다는 건 최소 7클래스 급이라는 건가?’
전에도 말한 바 있는 탈 인간의 경지 7클래스.
세상의 규칙을 다루고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내는 신화적 존재였다.
‘그런 인간이 왜 이런 곳에…….’
현우가 그의 등장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이 양복의 남자는 자연스레 박성빈과 정찬수 사이를 걸어와 여전히 누워있고 엎어져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속닥였다.
아니, 정확히는 누워있는 이성희를 향해 질문했다.
“너는… 마법사를 목격한 적 있니?”
“……예?”
신비로운 남자의 등장에 여전히 넋이 나가있던 이성희는 남자의 질문을 잘 못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고 남자는 아차 싶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이런, 질문을 정정하지. 너는 나를 제외한 ‘마법사’를 며칠 사이에 본 적 있니?”
단순한 질문,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언령은 평범한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미증유의 거력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인 이성희는 당연하게도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씨익-.
“그래… 그렇다면…….”
그런 이성희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늘리던 남자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또박또박 이성희에게 질문했다.
“네가 본… 자판기 앞에서 ‘불을 사용해 사람 둘을 죽인 마법사’는 이곳에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이 김현우니?”
흠칫!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실을 생전 처음 보는 낯 선이가 언급한 탓이었을까?
이성희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리고 그런 이성희의 반응을 밀착한 몸으로 느낀 현우는 숙련된 자기 통제로 내색하고 있진 않았지만 정말 크게 놀라고 있었다.
‘설마……! 그때 목격자가 있었단 건가?’
이성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이성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완벽히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한 일을 추적해온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는 걸 보건대… 좋은 뜻으로 찾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법치국가인 한국에서 사람 둘이 죽고 그 살인 용의자라면 현우가 아직 어린 나이를 아무리 어필한다고 한들 크게 참작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언령사로서 진실밖엔 말하지 못하는 페널티를 가진 현우는 그런 싸움에 철저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한민국… 치안제일 국가로군. 아무리 마법이 동원된 살인사건이라곤 하지만 자그마치 7클래스 마법사가 직접 나타나다니…….’
어쩐지 세상에 마법이 이렇게 많이 퍼졌는데 의외로 마법을 이용한 범죄 뉴스 같은 게 없더라며 구시렁거리던 현우는 이미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저 7클래스의 마법사가 현우에게 물어봐도 거부권이 없는 현우로선 끝장이었지만 사실 목격자인 이성희에게 물어본 것만으로도 이미 결과는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성희가 현우를 못 알아봤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거짓말로라도 현우란 사람을 안다면 그 특이한 외모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이내 이성희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듯 마음속의 카운트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던 현우는 모든 걸 포기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성희의 대답은 예상과 좀 다른 것이었다.
“……절대 김현우가 아니에요.”
“……?”
의외의 대답인 탓에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성희를 쳐다봤지만 이성희도, 양복의 남자도 그런 현우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문답을 주고받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자신에게 던져진 양복 남자의 질문에, 이성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 남자는… 여기 김현우와 꽤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김현우는 아니에요. 그 마법사는 단호하고 과감하게 사람 둘을 흔적도 없이 죽여버렸어요. 비록 상대가 칼을 쥔 강도들이긴 했지만… 제가 그 일이 있은 뒤에 나름대로 알아본 마법들 중엔 그런 엄청난 불꽃을 만드는 마법사라면 얼마든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방법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다는 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건 정말 무서운 사람이란 뜻일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현우를 마주본 이성희가 다시 대답을 이어갔다.
“이렇게 멍청하고, 미련하고, 둔하고, 답답하고,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하고, 약해빠진… 이런 남자랑은 확실히 다른 사람이죠.”
하나하나가 현우를 찌르는 비수 같은 말들이었지만 마주본 눈빛이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한 현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애당초 눈빛을 볼 것도 없었다. 7클래스 급 마법사의 언령에 홀려 대답하는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군.”
그녀의 대답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양복 남자가 이성희에게서 몇 걸음 멀어지며 중얼거렸다.
“역시… 다른 녀석이겠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양복 남자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부하로부터 당시의 비정상적인 수치가 나열된 자료를 보고 받고 자판기 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며칠간 조사했었다.
그 결과 그곳에서 상당히 강한 위력의 마법이 발동했고 그 결과 그곳에 투입되었던 업자 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수년을 기획했던 계획이 다시 몇 달이나 늦춰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7클래스의 뛰어난 마법사로서 완벽을 기하던 계획이 틀어진 것은 단순히 계획한 일의 실패를 떠나서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본래 지나간 일에 의미를 두는 타입이 아닌 그가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선 것은.
만약 찾아서 쓸모가 있다면 인력난을 해소할 겸 그 마법사를 영입할 생각이었고, 만약 쓸모가 없다면 죽여서 화풀이용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주변 CCTV는 물론 마법까지 사용하여 추적하고 보니 용의자로 압축되는 건 단 두 명밖에 없었다.
바로 현우와 이성희.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 봐도, 이 둘이 마법과 관련 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김현우의 경우 특이하면서도 꽤나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특이 사항이 있긴 했지만 그게 마법사란 증거가 될 순 없었고, 무엇보다 이들을 미행하며 확인한 김현우와 이성희의 보유 마나양은 둘 모두 평균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
아마 이 둘이 마나를 한데 모아 마법을 쓴다고 해도 1클래스 마법 하나 쓰기도 벅차 보였다.
하지만 그런 남자도 모르는 게 있었다.
현우가 몸에 마나를 키우는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라, 필요할 때 주변의 일정 영역을 지배하여 그곳의 마나로 마법을 사용하는 언령사라는 점이었다.
언령사들은 자신이 쌓아올린 언령으로 자신의 언령의 힘이 닿는 곳을 자신의 지배하에 넣고 그곳의 마나를 마음껏 사용하는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보통 마법사들의 마법과 언령사의 마법의 위력 차이도 사실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몸에 마나를 모아 써클로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마나를 꺼내 쓰는 마법은 마나를 사용할 때 몸에 부담을 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몸에 부담이 없는 만큼 마법에 마나를 최대한 활용하는 언령사의 마법은 소모된 마나만큼이나 보통의 마법사에 비해 훨씬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만큼 앞서 언급한 많은 단점을 가지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현우가 언령사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보통 마법사인 그의 시각으로 현우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철저한 그의 성격은 만약에라도 현우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을 대비해 여태껏 이들을 미행하며 지켜봤지만.
계속해서 굴욕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 끝끝내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현우의 모습에 결국 아니란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맥없이 추격을 마무리할 수는 없었기에 확실한 목격자인 이성희로부터 무언가 더 얻어낼 정보가 없을까 싶어 지금 이렇게 나서게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효율과 이성을 중시하는 마법사답게 이 둘의 위기를 이용해 최근 부진해진 실적을 올릴 생각이기도 했다.
“흠… 뭐 좋은 대답을 들었군. 그 마법사의 모습에 대해 그렇게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니… ‘수사’에 꽤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둘 다 이 일에 대해 외부에 발설하는 일이 없어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눈을 번뜩이는 양복 남자의 말엔 언령에 의한 묘한 암시가 걸려있었기에 이성희는 저항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우는…….
‘정말 무시무시한 언령이군……!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어.’
암시에 걸린 척, 입으로 대답을 하는 대신 작게 고갯짓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