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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22화)
6. 등장 (3)


“크, 앙탈이 심하네.”
“이익……! 자! 봐! 보라고! 아무것도 없어!”
휙!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천 조각을 컨테이너 바닥에 집어던진 이성희는 정찬수에게 확인하라고 재촉했지만 정찬수는 그런 것엔 관심 없다는 듯 예의 느물거리는 말투로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니. 내가 확인하려는 건 그게 아니야. 여자들 생리대가 붙이는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 외에, 탐폰…이라던가?”
탐폰이라 하면 여성의 몸에 직접 넣어 사용하는 생리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걸 확인하는 방법은…….
“너……! 너! 미쳤어!”
“엉? 그럴 리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 그 정돈 당연하잖아?”
“꺄아악! 이거 놔! 살려줘! 도와줘, 성빈아!”
갑자기 박성빈을 찾는 이성희의 말에 멀뚱히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박성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 자신을 부른 게 맞느냐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현우는 내심 혀를 찼다.
‘멍청하긴, 도와줄 것 같았으면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이미 자리에서 엉덩일 떼고 일어났겠지!’
박성빈은 그런 현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리에 앉은 그대로 입을 열었다.
“성희야, 우리 약속했잖아? 제대로 확인만 되면 보내준다고 말야. 그리고… 찬수는 그걸 제대로 확인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이… 이이 나쁜……!”
주르륵-.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설마 하던 일이 벌어지게 되자 여태껏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크큭! 그리고 혹시 잊어버리고 안 하고 온 걸 수도 있으니까… 직접 보고, 또 다른 여러 방법으로도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지!”
“개새끼들… 개새끼들아!”
이성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박성빈과 정찬수를 향해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그들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듯 욕망에 가득 찬 시선을 이성희에게 보낼 뿐이었다.

* * *

‘제발… 제발… 구해줘……!’
이성희의 시선이 현우를 향했다.
눈물 가득한 눈 너머로 보이는 이성희의 구조신호를 현우는 확실히 받았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현우에겐 보다 확실한 타이밍이 필요했다.
현우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현우의 모습에 이성희는 절망했다.
‘설마… 마법사가 아니었던 거야?’
이들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현우가 마법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던 이성희였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을 담아 현우를 바라본 것이었다.
며칠 전 보았던 그 마법사라면… 현우가 그 마법사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 당연히 분노하고 이 둘을 그때의 불꽃으로 죽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믿음은 다시 한 번 깨어졌다.
마지막 보루였던 현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지금 그녀는 정찬수의 징그러운 손이 그녀의 치마를 들추려 용쓰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지금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미 이보다 더 심한 꼴을 당했으리라.
‘그치만… 그것도 이젠…….’
이성희로선 정찬수의 힘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이 이상 심한 꼴을 당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현우가 마법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니 여태껏 자신이 해온 행동이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들은 처음부터 죽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현우는 이들을 죽일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 불과 몇 분 전 박성빈의 음흉한 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좋아했던 그가 혹여나 죽을까 봐 나섰던 행동이 모두 오지랖이었던 것이다.
주르륵- 주륵-
툭! 투둑!
얼굴을 타고 내려 턱에 고인 눈물들이 끊임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박성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우의 눈이 빛났다.
“이런, 이런. 그렇게 슬퍼만 할 게 아니라 좀 즐기는…….”
슈슈슉!
찰나지간 현우의 손을 떠난 손바닥만 한 나무 파편이 박성빈이 내디딘 발밑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조금 전 바닥에 무릎 꿇으며 몰래 챙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극적이지 못할 테지.’
나름 쓸 만하다고 생각하고 집어던지긴 했지만 그게 나무조각인 이상, 현우가 계획한 시나리오대로 거하게 넘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제 마법을……!’
사물의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들어 버리는 1클래스의 마법 ‘그리스의 수식’이 순식간에 완성되고 목표를 향하려는 순간.
퍼억!
“크헉!”
“이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성빈아! 발 밑 조심해!”
기습적으로 날아든 발길질에 현우가 배를 움켜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덕분에 신중히 타이밍을 재고 있던 그리스는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현우로선 재수가 없었고 박성빈은 운이 좋았다.
정찬수의 경고에 방금 바닥에 닿으려던 발을 다시 들어 올린 박성빈은 자신이 밟으려던 자리에 있는 나무 조각을 보고 악귀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곤.
타다닷-!
뻐억!
“크흑!”
배를 움켜쥐고 있는 현우의 배 위로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렸다.
분노한 박성빈이 도움닫기까지 해가면서 차올린 덕분에 배를 감싸고 있던 손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사이 지금껏 이성희를 주무르느라 정신없던 정찬수가 가세했다.
퍼억! 빠악! 퍽퍽!
교실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분노에 가득 찬 주먹질과 발길질이 웅크린 현우의 등판에 무차별적으로 작렬했다.
도대체가 얼마나 온 힘을 다해 때리는지 그 파열음만으로도 현우가 이미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도 느닷없이 기습을 받은 탓에 아직 관조 상태에 들어가지 못한 현우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현우의 눈이 빛났다.
현우의 앙상한 두 팔이 각각 다리 하나씩을 잡았다.
“지금! 빨리 도망가!”
“이 새끼가!”
“이 새끼! 뒈지려고!”
자신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이성희를 도망치게 할 생각이었지만 역시나 힘의 차이 때문에 큰 시간은 벌지 못했다.
하지만 그사이 정신을 차린 이성희가 탈출을 시도했다.
‘도망쳐! 너만 도망친다면……!’
마법으로 정리해 버릴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녀석들을 간단히, 현우가 6클래스를 준비하는 몇 달간만 병상에 있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법으로 사고를 위장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니 현우는 도저히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최소한 반신불수, 아예 평생 침대 신세를 지게 만드는 게 사회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마법에 당했다고 말도, 생각도 못하게 철저하게 부숴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목격자가 없어야 가능 한 일.
현우는 처음부터 이성희의 탈출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딜……!”
덥석!
“꺄아아아악! 놔! 이거 놔!”
벌어놓은 시간이 워낙 짧기도 했고 정찬수의 대응이 워낙 빨랐던 탓에 이성희는 몇 걸음 못 가 정찬수에게 잡히고 말았다.
꼬집!
꽈악!
하지만 이성희, 그녀 역시도 필사적이었다.
정찬수의 머리며 팔뚝을 마구잡이고 잡아당겼고 손을 깨무는 등 정찬수의 손길을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으아아악! 이 미친년이!”
후웅~ 콰당탕!
“아아아악!”
이성희의 가소롭지만 짜증나는 반항에 이성희를 품에 안고 있던 정찬수는 이성희를 컨테이너 안쪽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덕분에 허공을 날아간 이성희가 구석에 놓인 집기들과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퍽퍽!
“이익… 젠장!”
쏟아지는 주먹을 맞으며 이성희 쪽을 살피던 현우는 그녀의 탈출이 확실히 물 건너갔음을 알았다.
이성희가 위치한 곳이 문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반대편인 것도 있었고 이미 한번 탈출을 시도한 이상 녀석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벅- 저벅-.
“이 씨벌년이! 감히 주제 모르고 대들어? 오늘 시발 몸으로 몽땅 갚아야 할 줄 알아라, 쌍년아!”
거친 욕설을 하며 이성희에게 다가가는 정찬수를 보면서 현우는 일단 이성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이상 위험하게 된다면 이 컨테이너를 날려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마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대형마법의 폭발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면……!’
현우는 웅크려 있던 자세에서 옆으로 굴러 떨어져 내리는 주먹을 피해냈다.
요행에 가까운 수였지만 여태 한자리에서 맞고 있던 현우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피할 수 있었다. 박성빈의 주먹은 현우를 따라오지 못했고, 이에 곧장 분통을 터뜨렸다.
“이 자식이! 피해?!”
박성빈은 현우가 문으로 도망치리라 생각하고 재빨리 달려가 컨테이너의 문을 막았지만 현우는 그런 박성빈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이 난 곳의 정반대인 이성희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정찬수를 지나쳐 그대로 이성희의 위로 엎어졌다.
“하이구? 아주 쌍으로 지랄이네.”
그런 현우의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 툭 내뱉은 정찬수는 눈짓으로 박성빈을 옆으로 부르고 각자 주변에 떨어져 있던 도움이 될 법한 연장들을 집어 들었다.
그러는 사이, 현우 밑에 깔린 이성희가 현우를 향해 마구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바보야! 빨리 도망가서 신고를 했어야지!”
“멍청아,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어.”
‘어……? 이건… 왠지…….’
이성희로선 정말 예상치 못하게 침착한 현우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런 현우의 목소리를 듣자 어째선지 이런 위급한 와중에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저 가만히 누워 위험을 기다리는 꼴임에도 어쩐지 이대로 있으면 모두 괜찮아질 것이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조용히 현우 밑에 부동자세로 누워 있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현우의 말에 녹아있는 언령의 힘 탓이었지만 이성희가 그런 걸 알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보다는 몸을 겹친 채 현우가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에 더욱 집중했다.
“--! ---!! ----…….”
난생처음 들어보는 언어에 이런 와중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우를 쳐다보던 이성희는 본능적으로 이제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만.”
우뚝-!
멈칫!
“…….”
“…….”
낯설기 짝이 없는 목소리의 말 한마디에 컨테이너 안의 모든 게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각목 조각을 들고 가던 박성빈도.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명패를 집어든 정찬수도.
그리고… 현우 밑에 깔린 이성희와 제대로 큰 한 방을 준비하며 주문을 외우고 있던 현우도…….
모든 게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