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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21화)
6. 등장 (2)


‘딱히 힘으로 뚫고 나갈 생각은 없지만… 사고로 위장하려면 바깥이 좋을 거 같은데.’
처음부터 이들을 사고로 위장해 혼내줄 생각이었던 만큼 현우는 이런 공사장으로 온 게 내심 반갑던 참이었다.
하지만 막상 컨테이너 안에 들어와 보니 컨테이너 내부는 바깥과 달리 생각 외로 별다른 게 없었다.
고작해야 토막 난 나무들과 양동이 정도.
가장 쓸 만해 보이는 건 지금 박성빈이 앉아 있는 사무용 책상 정도가 다였다.
‘음… 마법으로 넘어뜨린다고 해도 저만한 것에 얼마나 다칠지도 의문이고… 두 녀석 다 책상에 들이받는 상황 같은 건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겠지?’
현우는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에 이럴 줄 알았다면 오는 길에 뼈대가 세워진 건물에서 연장이라도 하나 떨어뜨릴 걸 그랬다며 후회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그렇게 현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현우를 빼고 이야기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 이성희… 오늘 일 말인데.”
박성빈이 가볍게 운을 떼자 이성희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 그게……! 그… 내 말뜻은 이제 친구들이랑… 그, 아무래도…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겠다 싶어서…….”
“푸흡!”
이성희의 말 중 친구라는 대목에서 문 앞에 멀뚱히 서있던 정찬수가 풋, 하고 웃음을 뱉어냈지만 이내 박성빈이 슬쩍 눈치를 주자 헛기침을 하며 잠잠해졌다.
“새꺄, 뭘 봐!”
빡!
“아앗! 그, 그런… 때리는 건……!”
박성빈의 눈치를 보는 정찬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나를 본 정찬수가 욕설을 내뱉으며 내 머리를 때리자 화들짝 놀란 이성희가 주춤주춤 현우의 곁으로 갔다.
그런 이성희의 모습을 보며 박성빈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지만 어두운 컨테이너 안이기도 하고 모두의 시선이 현우 쪽으로 몰려 있어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정말 그것뿐이야?”
다시 한 번 박성빈의 입이 열렸다.
“……응?”
이성희의 반문에 박성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이성희에게 물었다.
“오늘… 네 모습을 보건대 김현우… 저 녀석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특별한 관계?”
언뜻 박성빈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모로 눕히던 이성희는 이내 의미를 파악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전력을 다해 부정했다.
도리도리-.
“아, 아냐! 절대 아냐! 나, 나는 오히려……!”
어두컴컴한 이곳에서도 붉어진 게 느껴질 만큼 얼굴이 새빨개진 이성희를 보면서 박성빈은 슬쩍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곧장 이성희에게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오늘 일은 단순히 변덕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오늘 저 버릇없는 녀석 버릇 고쳐놓는 데 동의하는 거지?”
“어? 아, 아니 그건…….”
“성희야, 나도 가끔 그런 날이 있어 괜히 갑자기 짜증나고 화나고… 이상한데 화풀이하게 되고, 그런데 그런 게 본심은 아니잖아? 네 맘은 다 알아. 그때도 충동적으로 덜컥 일어났는데 분위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 주변 보는 눈도 있고… 그런데 지금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 눈치 볼 필요 없다는 말이지.”
흠칫!
박성빈의 말 중 여기엔 우리밖엔 없다는 대목에서 잠시 몸을 떤 이성희였지만 이내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그래도… 그래도 안 돼. 치… 친구를 괴롭히는 건 절대로…….”
그녀 자신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그러는 것인데, 왜 다들 자신을 몰라주는 걸까.
이성희는 진심을 몰라주는 박성빈의 태도에 답답해졌다.
물론 현우가 손가락 까딱하면 이곳의 모두를 흔적도 없이 태워 버릴 수 있는 마법사라는 걸 아는 건, 현우 본인과 이성희뿐이긴 했다.
하지만 이성희가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서 이렇게 극구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눈치챌 법도 하건만 박성빈은 물론 뒤에 있는 정찬수도 전혀 동의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성희는 남자애들의 눈치 없음을 탓했지만… 사실 이곳에서 가장 눈치 없는 건 이성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놈들 눈치를 보아하니… 어차피 지네들 뜻을 굽힐 생각은 없어 보여…. 이성희가 험한 꼴 겪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긴 한데…….’
녀석들의 욕심에 찌든 눈을 본 현우는 녀석들의 목적을 단숨에 파악 할 수 있었고 이대로 있다간 꽤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엔 마땅히 쓸 만한 물건도 없었고 무언가 격렬한 해프닝을 만들기엔 앉아 있는 박성빈은 물론이고 뒤에선 정찬수도 전혀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어차피 어떻게든 일이 벌어지려면 녀석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터. 기다리는 수밖에…….’
결국엔 오게 될 그 순간을 노리며 현우는 차분히, 둘의 대화를 더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 녀석을 다시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 이거지?”
……끄덕.
이성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박성빈은 허탈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러곤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이성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네 말이 진실이라곤 믿기지 않아. 넌 여태껏 저 녀석을 무시해 왔잖아? 이제 와서 그럴 이유가 없을 거 같은데… 게다가 뭔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이에 대해선 따로 말할 바가 없는 이성희였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본 박성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이지… 나는 네가 오늘 ‘평소랑 다른 무언가’ 때문에 신경이 예민한 탓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제대로 진실된 말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무슨……?”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성희를 보면서 박성빈이 이번엔 아주 징그럽게 웃어 보였다.
씨이익-.
“증명해봐.”
“……에?”
“네 말이 진정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증명해봐.”
“그… 어떻게……?”
“후후…….”
의뭉스러운 웃음을 짓는 박성빈을 보며 당황해 하는 이성희였지만 떠오르는 건 없는지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정찬수가 조금은 답답하다는 듯이, 그리고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빈이는 말이야, 니가 오늘 생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새, 생… 그! 그게 무슨!”
“그러니까 너는 오늘 니가 생리를 하는 게 아니란 걸 증명하면 되는 거야! 여자들은 생리 때면 정신이 나간다고 하잖아? 그런데 니가 오늘 생리를 하는 게 아니라면 니가 한 말은 진심이겠지?”
느물거리는 정찬수의 말에 박성빈이 거들었다.
“그래 맞아. 만약 네가 정말 진심으로 너의 ‘친구’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면… 나는 저 녀석한테 손대지 않을게.”
“……정말?”
이들의 싸움을 말리고 누군가 죽는 걸… 특히나 그중에서도 박성빈이 죽는 걸 막기 위해 이곳까지 온 그녀에겐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려줘?”
“그야 간단하지. 팬티를 벗어.”
“……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박성빈의 말에 경악성을 내뱉은 이성희였지만 이내 뒤편에서 박성빈의 말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당연한 거 아니야? 니가 생리대를 차고 있으면 생리를 하는 것이고, 생리대가 없다면 생리를 안 하는 거잖아? 안 그래?”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돼? 이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나?”
“…….”
확실히 지금 당장 이곳에서 증명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밖엔 답이 없었다.
이성희는 내심 차라리 병원을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박성빈이 이곳으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성희는 결심했다.
‘그래… 팬티… 조금 보여주는 걸로 죽는 걸 막을 수 있다면… 그리고… 성빈이한테만이라면…….’
“그… 그럼 성빈이한테만…….”
“무슨 소리! 여기 나도 있다고! 나라고 이 자식 안 패버리고 싶은 줄 알아?!”
수치스러움에 줄어든 목소리가 모기 날갯짓 소리처럼 작았지만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정찬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고 곧장 반박했다.
‘……정찬수한테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애당초 여기에 온 것도, 이런 결심을 한 것도 모두 성빈을 위한 일이었다.
정말 솔직히, 정말로 솔직한 심정만을 말하자면 정찬수 정도는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박성빈을 안 좋은 길로 ‘이끄는’ 정찬수는 없어지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그녀는 스스로 합리화하기로 했다.
‘모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벗은 속옷을 보여주는 정도라면… 그 정도라면…….’
그리고 설마하니 이 이상의 무언가를 당하기야 하겠는가 하는 심정에서였다.
그렇게 결국. 그녀의 손이 치마 밑, 양옆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빠드득-.
이가 갈리는 흉험한 소리에 이성희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곳엔 어느새 꿇려 놓았는지 무릎 꿇고 앉은 현우가 있었다.
그리고 이 갈리는 소리는 그런 현우에게서 난 소리였다.
‘저 애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자기 때문에 희생하는 모습이니… 화가 날 법도 하지.’
잠시 현우의 분노에 찬 눈을 마주한 이성희는 이내 손길을 빨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끝내자는 생각도 있었고, 조금 전 현우의 눈을 보건대 당장에라도 폭발해 이곳을 불바다로 만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스르륵-.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컨테이너 안에, 스르륵 얇은 천 조각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이성희의 가느다란 손에 새하얀 순백의 천 조각이 걸렸다.
“흐으음~ 팬티 안쪽을 보여주겠어?”
“…….”
수치심으로 벌게진 얼굴 어디에 더 달아오를 곳이 남았었는지 좀 전보다 훨씬 빨개진 얼굴로 이성희는 손에 든 옷감을 벌려 안쪽을 확인시켜 줬다.
생리대도, 생리의 흔적도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준 셈이었다.
“이… 이제 됐지? 그, 그만 괴롭히는 거야?”
이성희는 박성빈을 향해 그렇게 외쳤고 이내 현우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너, 너도 이제 가… 아니!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며 현우의 어깨를 잡아가는 이성희였지만 그 행동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덥석!
“어딜! 아직 확인이 덜 됐다고.”
“이익… 방금 성빈이가 제대로 다 확인했어!”
정찬수의 손에 반대로 손목이 붙잡힌 이성희가 팔을 흔들며 반항해 봤지만 그렇다고 정찬수의 억센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짜로 아직 다 확인 못했는걸~?”
느물거리는 말투를 하며 손목이 잡힌 이성희를 확 잡아당기자 이성희의 작은 몸이 단숨에 정찬수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이성희도 바보는 아닌지라 질색을 하며 정찬수를 밀쳐 냈다. 그렇지만 이성희의 온 힘을 다한 반항도 정찬수의 품에 안기는 걸 막았을 뿐, 잡힌 손목을 빼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