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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20화)
5. 그로 인해 (5)


‘혹시 반하기라도 한 건가?’
물론 그랬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사랑은 사람의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가장 큰 마약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우도 눈이 있었다.
키만 멀대같이 컸지 비쩍 마른 몸은 흔히 말하는 남자 아이돌 같은 마르고 예쁜 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뼈 위에 가죽을 씌워놓은 모양새였고 얼굴은 몸만큼이나 홀쭉하게 들어간 볼이 인상적인 해골바가지 모양이었다.
뭐, 이 상태에서 살을 찌우고 육체 단련을 하면 어느 정도 봐줄 만한 얼굴이 된다는 것을 다른 세상에서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현재 세상에선 아직 그 얼굴은 공개된 바 없었다.
‘특수한 성적 기호가 있는 건가? 시체를 좋아하는 네크로필리아라든지…….’
시체 같은 현우의 몰골을 생각해보면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진짜 시체 대신 시체랑 비슷한 몰골의 인간을 좋아한다는…….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성희가 그런 특수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할뿐더러 앞서 생각해본 것들 중에서도 정답이라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이때.
현우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갑자기 이성희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현우와 눈이 마주치자……!
홱!
“……?”
마치 못 볼 걸 본 듯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이 모습을 통해 먼저 생각 했던 것들 중 한 가지는 확실히 제외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건 아니군.’
그렇게 현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성희는…….
‘히익! 어, 어떡하지! 계속 노려보고 있는 거 같은데… 괜히 잘못 건드린 거 아니야?’
옥죄어오는 공포심에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 * *

‘이성희… 김현우라…. 무슨 관계지?’
조금 전 이성희와 김현우가 마주봤을 때 이성희가 거칠게 시선을 피한 것을 보면 딱히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그게 어떤 특수한 사인이거나 일부러 티내지 않기 위한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지금 박성빈이 보기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생리인 걸까?’
이번 일에 대해 궁금한 건 현우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반 전체 모두가 궁금해할 것이다.
모두 겉으로 티만 내지 않을 뿐,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리고 대부분 공통적으로 생각해 낸 건 생리에 관해서였다.
반의 여자애들 중엔 이 생각에 동조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남자애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생리를 겪어보지 못한 남자들로선 생리란 것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대충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다였으니 말이다.
그건 평소 똑똑한 척, 잘난 척하던 박성빈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도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정확한건 알 수가 없었다.
박성빈은 수업이 시작하기 전 휴대전화로 정찬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니가 보기에 저년 생리 같냐?]
[그게 아니라면 저게 말이 되냐?]
정찬수의 대답은 즉답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도 같단 말이지.]
[……그게 아니면 뭔데?]
[뭐, 잘 모를 땐…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메시지를 보내며 의뭉스러운 웃음을 짓는 박성빈을 보면서 정찬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박찬수의 모습이 우습다는 듯이 한번 씨익 웃어준 박성빈은 다시 한 번 정찬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끝나고… 이성희랑 김현우 데리고 같이 하교하자고. 직.접. 확.인.하.게.]
“…….”
씨익-.
박성빈의 메시지를 본 정찬수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박성빈에게 답장했다.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이제 곧 시작될 수업을 준비하는 이성희의 등 뒤로 각기 다른 세 남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6. 등장 (1)


오후 수업과 보충수업이 모두 끝나고 난 하굣길.
현우는 의외로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음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점심시간의 사건을 이후로 박성빈 패거리 중 누구도 현우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그런 박성빈 패거리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지 오후 내내 반의 그 누구도 현우한테 시비를 걸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했다.
차라리 제대로 난장판이 벌어졌으면, 혹은 쉬는 시간마다 시비를 걸러 왔다면 이렇게 기분이 싱숭생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유로, 생각지도 않게 괴롭힘에서 벗어나니 도저히 말로 형용하기 힘든 불안감이 자꾸 몸을 덮쳐 왔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야, 김현우! 이리 와라.”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학교 수업이 다 끝나고 딱히 바쁠 게 없는 현우가 느지막이 학교를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학교 정문엔 박성빈과 정찬수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박성빈의 손엔 소매가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이성희도 있었다.
그런 모습에 현우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들이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우를 도와준 탓에 저들에게 잡혀 있는 이성희의 모습이 눈에 거슬린 탓이었다.
‘안 되겠군. 오늘 녀석들 버릇을 고쳐놓는 수밖에.’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4클래스까지의 수많은 마법들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갑자기 저 둘을 없애버린다면 현우 자신이 첫 번째 용의자가 될 게 뻔하니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마법보단 흔적이 남지 않는 마법들을 사용해 사고로 위장하여 한동안 학교에 나오기 힘들게 할 생각이었다.
“따라와라.”
따라오라는 한 마디와 함께 뒤돌아 어디론가 향하는 박성빈을 보면서 현우는 느긋하게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현우의 느긋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현우의 퇴로를 막듯 뒤에서 걸어오던 정찬수가 현우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턱!
“야, 새꺄! 빨리 안 가?”
안절부절.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앞서 박성빈과 걸어가던 이성희는 뒤를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하며 두려워했고 그 모습을 정찬수의 위협 때문이라 오해한 현우는 비록 비루한 몰골으로나마 안심시킬 생각으로 이성희를 향해 씨익 웃어줬다.
그러자.
부르르르.
몸을 잘게 떨며 오히려 박성빈 옆에 딱 달라붙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
‘음… 여자는 역시 알 수가 없군.’
대언령사로 드래곤과 마법 대결을 펼치던 그에게도 여자는 어려운 존재였다.
그리고 앞서 가던 박성빈은…….
‘이년이 왜 이래?’
조금 전까지 무섭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걷던 이성희가 오히려 자신의 팔에 달라붙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까 교실에서보다도 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년 이거… 한번 쓰고 버릴 건 아닌가 본데? 잘만 하면 강제로 안 해도…….’
박성빈은 아랫도리가 뿌듯해짐을 느끼며 미리 정해둔 장소를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 * *

현우들이 지나간 길목 전봇대 그림자에서 불쑥, 양복을 입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아니,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기보다는 마치 본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생겨났다.
그는 현우들이 지나간 길을 쓱 쳐다보면서 멀리 보이는 현우와 이성희를 주시했다.
‘어딜 가는 거지?’
학교 수업이 끝났다면 학생은 응당 집이나 학원으로 가기 마련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일탈 행위를 하는 학생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최소한 그가 조사한 두 학생, 김현우와 이성희는 학원을 다니지도, 딱히 일탈 행위를 즐길 만한 학생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조사 내용에 따르면 이 둘 모두 하교할 때 무리지어 하교하는 학생들이 전혀 아니었다.
사실상 학교 공인 왕따인 현우는 두말할 것도 없고 집과 학교가 꽤 먼 데다 이른 바 ‘못사는 동네’의 학생인 이성희는 친구들과 집에 가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그 둘 모두가, 그것도 한 무리에 속해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변 녀석들에 대해서도 조사해 둘걸 그랬군.’
철저함을 중시하는 그에게 있어서 무엇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번 일은 호기심에 마음이 급하기도 했고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 있던 만큼 주요 인물 둘만을 조사 하고 곧장 이곳으로 온 탓에 준비가 꽤 미흡한 상태였다.
‘뭐… 그렇다고 크게 걱정되는 건 아니지만.’
앞서 말한 바대로 그는 자신의 실력에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어떤 경우가 닥쳐도 그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가 완벽하지 못한 것이 그는 못내 아쉬웠다.
주변 녀석들이 누구인지 알고 녀석들과 무슨 관계인지 정확히 안다면 지금처럼 정처 없이 따라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저 녀석들이 갑자기 외딴 곳으로 가지 않는 다음에야… 나서는 건 좀 기다려야겠군.’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쉰 남자는 품속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다시 공기 중에 녹아들 듯 자리에서 없어졌다.
의외로 그가 원하는 순간이 빨리 올 것이라는 건 모른 채.

* * *

현우들은 계속해서 걸었다.
학교 정문을 나선 지 거의 30분은 된 거 같은데 목적지는 아직도 먼 것인지 박성빈은 걷기만 했고 서로 간에 대화가 필요한 사이가 아닌 만큼 오고가는 대화도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근처 아파트 단지의 재건축 현장에 도착했다.
본래대로라면 철제 펜스로 높다란 담벼락과 중장비 커다란 문이 잠긴 모습이어야 할 테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지금 현우네가 도착한 곳은 그런 게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현우네가 들어온 곳 반대편은 높다란 펜스가 잔뜩 서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조금 특별한 곳이거나 아직 펜스가 설치가 안 된 것이 분명했다.
‘전형적인 양아치들 놀이터군.’
여기저기 널브러진 건축물 잔해들과 아마도 사무실로 이용하기 위해 갖다 놓은 듯한 컨테이너박스 몇 개가 눈에 띄는 이곳엔 이미 누군가 놀고 갔다는 듯 다 마신 술병들과 안주로 추정되는 과자 봉지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박성빈은 그런 광경은 익숙하다는 듯 주변 모습엔 눈길 한번 안 주고 그중 가장 안쪽, 바깥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컨테이너로 모두를 안내했다.
순서대로 박성빈, 이성희, 현우가 안에 들어가자…….
쾅!
“크흐흐흐… 이젠 아무도 못 나가.”
가장 마지막에 따라 들어온 정찬수가 컨테이너의 문을 쾅 닫으며 중얼거렸다.
‘여태 저걸 하려고 맨 뒤에서 따라온 건가?’
컨테이너의 문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문손잡이가 빠져 있어서 잠기지 않았지만 정찬수가 막고 있는 이상 힘으로 뚫고 나가긴 요원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