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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19화)
5. 그로 인해 (4)
그렇기에 현우는 더욱 정신을 단단히 했다.
몸이 무너지면 다시 고치면 되지만 마법사는 정신이 무너지면 죽는 것이다.
정신이 무너져 자존감을 잃으면 마법사로서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현우는 자신의 정신이 이런 폭력에 굴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꾸 마음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려는 트라우마를 억누르며 자신을 조절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스로를 관조하고 있노라니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단순히 저런 양아치들에게 몸을 내주고 맞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전까지 겨우 저까짓 주먹 따위에 벌벌 떨었다는 게 한심했다.
현우는 저쪽 세상에 칼롯 코즈너로 있으면서 저런 주먹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수많은 위험과 직면해봤다.
그중엔 저보다 훨씬 강맹한 주먹도 있고, 주먹보다 날카로운 칼과 창이 있었으며, 미증유의 힘을 담은 마력과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빠져들 것 같은 흉악한 괴물들이 있었다.
그때의 칼롯 코즈너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단 한 번도 겁을 내지 않았다.
아니, 설령 겁이 나더라도 절대로 밖으로 드러내 스스로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정신이 무너지면 마법사는 죽는 것이기에 언제나 스스로가 넘어지지 않게 다잡고, 다시 일으켜 세워왔다.
그런데 그런 칼롯 코즈너의 전신이 겨우 저런 양아치들 주먹 몇 개에 잔뜩 쫄아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언제 끝나려나.’
고통을 잊고 조금 떨어져 관전을 하고 있는 입장이 되니 지루할 지경이었다.
물론 지금 상황과 상태가 끝나고 나면 꽤나 큰 고통에 시달려야 할 테지만 어차피 순식간에 마법으로 치유할 거, 그 정도는 걱정할 것도 못되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게 수업 시작 종소리가 울리는 방식이든, 아니면 녀석들이 나가떨어지는 방식이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찬찬히 보고 있노라니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시간은 앞으로 10분가량이나 남았는데 여태껏 현우를 구타한 녀석들은 그렇게 실컷 때려놓고 얼굴이 시뻘겋게 돼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미 처음 때리던 녀석들 중 아직까지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건 녀석들의 리더 격인 박성빈과 조금 전 현우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정찬수라는 일진 녀석뿐이었다.
‘주제에 돈 있는 집 아들이랑 일진이라고 운동 조금 했나 보다만… 거기까지군.’
애당초 사람을 때리는 데 쓰는 힘과 체력은 단순히 평소에 러닝머신을 달리고 근력 운동을 해서 키운 힘, 체력과는 다른 법이었다.
누가 뭐래도 살아있는 것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굉장히 피곤한 일이니 말이다.
‘슬슬… 끝나려나?’
녀석들의 주먹이 눈에 띄게 느려진 걸 보고 현우는 끝날 때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현우의 예상은 틀림없이 들어맞았다.
“……야! 너희……! 그, 그만둬!”
“…….”
“……?”
“……?”
예상과는 꽤 많이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 * *
부들부들…….
학급의 반장 이성희는 현우가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현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고, 현우가 자기 책상을 찾을 때는 손발이 떨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박성빈 패거리가 현우를 집단 구타하기 시작했을 때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왔다.
이제 곧 펼쳐질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서.
당장에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그녀는 미치도록 두려웠다.
그래서 고심 끝에 용기를 냈다.
이대로 있다가 사람하나 잡는 건 시간 문제였으니 말이다.
“……야! 너희……! 그, 그만둬!”
“…….”
“……?”
“……?”
그녀의 용기 있는 외침에 모두가 그녀를 쳐다봤다.
특히나 계속해서 현우를 구타하고 있던 박성빈과 정찬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성희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간신히 눈만 웃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 그만해… 이제 그만…. 더 이상한다면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에 앵앵거림에 가까운 모기만큼이나 작은 소리였지만 반에 있는 모두에게 의사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반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었지만, 의외로 의미는 잘 전달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설령 그녀가 직접 선생님께 말씀드린다고 해도 큰 파장은 일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학교 선생님들 중 수업시간 내내 바름을 따지는 현우를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현우의 담임선생님도 마찬가지.
선생님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판을 깎아먹는 현우를 학생 이하 원수 미만으로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반장인 이성희가 직접 나서서 말하는 데야 아무 것도 안 할 리는 없지만 선생님 앞에서라면 언제나 착한 아이가 되는 박성빈과 학교 최고의 문제아 김현우가 상대라면 박성빈의 손을 들어줄 건 뻔했다.
그러니 이런 뻔한 상황,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곳에 무리수를 두고 끼어든 이성희의 말은 모두를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 효과 역시 꽤나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푸……!”
“흐… 흐흐……!”
갑자기 박성빈과 정찬수가 조금씩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댔다.
“푸하하하하핫! 크크크큭! 끄흐흐흐……!”
“흐하하핫! 끄윽! 끅… 크흐흑…….”
그런 그들의 반응에 반 분위기는 대번에 반전됐다.
“흐… 흐하하하…….”
“아하하하!”
“오호호호호홋!”
“꺄르륵! 깔깔!”
어째서 웃는지도 몰랐다.
그저 박성빈이, 박찬수가, 그들의 폭군과 그의 측근이 웃기 시작하자 반의 모두가 그들을 따라 웃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건 이성희도 마찬가지였다.
“호… 호호호홋!”
잔뜩 굳은 얼굴로 처음과 같이 눈만 웃으며 웃어댔다.
그리고 이건 반에서 현우를 제외한 모두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어색한 웃음으로 웃어대는 그 모습은 어설픈 연극 내지는 표정이 하나밖에 없는 가면을 단체로 둘러쓴 가면극을 보는 듯 흥미롭지도, 재밌지도 않은 그런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다 이내.
“흐흐하핫----!”
뚝!
박성빈이 교실이 떠나가라 허리까지 접어가며 크게 한번 웃어재끼고 웃음을 뚝 그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반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그런 반 애들의 반응에 박성빈은 만족한 듯 싱글싱글한 얼굴로 반 전체를 쓱 훑어보고는 이성희에게 말했다.
“그래, 그만해야지! 우리가 뽑은 반대표, 반장이 하시는 말씀인데 말이야!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지!”
그렇게 말하곤 박성빈은 곧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찬수 역시 마찬가지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현우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말하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웃고는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허무한 결말.
싱겁게 끝나버린 상황에 주변 모두가 놀랐지만 가장 놀란 것은 이성희였다.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버렸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쉽게 결론이 날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였다.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거나 심한 꼴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그런 걱정은 기우라는 듯 아무 일 없이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나름 안심했다.
최소한 이제 그녀의 눈앞에서 다시 사람이 ‘소거’되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됐으니 말이다.
털썩!
긴장감에 온몸에 땀이 맺혔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의자에 앉은 그녀의 엉덩이와 등허리가 축축했다.
굉장히 기분 나쁠 만도 하건만, 그녀는 ‘반 친구들을 살렸다’라는 뿌듯함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의자에 주저앉는 것을 기점으로 현우네 반은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분주해졌다.
* * *
“……운 좋은 줄 알아라.”
소근.
‘어차피 체력 달려서 곧 끝날 거였으면서 허세부리기는.’
현우는 자리로 돌아가며 자신의 귓가에 속닥이는 정찬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구시렁거렸다.
한참 헉헉거리던 녀석들의 몰골을 보건대 아마 이성희가 말리지 않았다면 몇 분 뒤엔 거품 물고 쓰러졌을 녀석들이었다.
‘그나저나…….’
파아앗!
남몰래 수식을 만들어 단숨에 몸에 피어나기 시작한 멍들을 지운 현우가 이성희를 쳐다봤다.
‘느닷없이 날 도와줬단 말이지?’
사실은 현우가 아닌 그를 때리던 박성빈 패거리를 도와준 것이지만 외견상으론 현우를 도와준 모습이었다.
그래서 현우는 고민이었다.
왜 그랬을까?
현우로선 당연한 의문이었다,
반장인 이성희로 말할 것 같으면 현우의 동생 김예린과 같은 화려한 미인은 아니지만 지적이고 단정한 용모에 우수한 성적을 가진 반의 꽃으로, 선생님들에게도 귀여움 받아 반 안에서는 나름 영향력 있는 여학생이었다.
그런 이성희가, 한 학기 내내 현우가 맞는 모습을 보고 있던 그녀가 이제 와서 현우가 맞는 걸 보고 분노했다는 건… 어쩐지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물론 사람의 심리란 게 언제나 절대적일 순 없으니 아예 말이 안 되는건 아니지만…….’
하지만 확실히 뜬금없긴 했다.
‘혹시 생리 중인가?’
생리 중에 여성의 행동이 감성적으로 변한다는 건 꽤나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의, 아니 이 학교의 실세인 박성빈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는 행위가 단순히 생리로 인한 심리적 영향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전까지는 왜 아무 말도하지 않았으며 이제 와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런 행동을 했냐는 의문이 남았다.
박성빈에 대한 반기는 학교생활의 불편을 초래하는 지름길인 만큼 이성희처럼 똑똑한 인물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뭐 저 녀석한테 박성빈 이상 가는 대단한 배경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정말 그런 게 있었다면 애당초 학기 초에 박성빈이 깽판을 부리는 걸 두고 봤을 리가 없었다.
물론 ‘현우가 싫어서 그냥 괴롭히게 뒀다’라는 가정도 있지만 이 반에서 박성빈의 괴롭힘을 받은 건 현우뿐만이 아니었다.
여자애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이성희는 평소에 충분히 박성빈을 불편해했었다.
‘그렇다면 왜지?’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이성희가 이제 와서 현우를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