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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령의 주인 1권 (18화)
5. 그로 인해 (3)
아주 조그만 그을음 두 개가 묘하게 인상적인 골목.
그곳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슈퍼 앞에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탓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깔끔한 양복차림에 구레나룻으로부터 턱을 뒤덮은 수염이 강한 인상을 주는 멋들어진 모습이었다.
분명 풍기는 분위기가 어림잡아 4, 50대는 되어 보이는데도 지나가는 여성들이 눈을 못 뗄 만큼 멋진 남자는 슈퍼 자판기 앞에 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천 원짜리 지폐를 넣고 캔커피를 뽑았다.
덜컹-!
딸그랑! 딸그랑!
그가 캔커피를 집어든 후 자판기에선 거스름돈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중년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에 들린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듯.
천천히 자판기 주변을 서성이면서.
그리고 마침내 그을음이 있던 곳을 밟았을 때.
그가 우뚝 멈춰 섰다.
“…….”
지-익!
그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두 밑창이 그을음과 마찰했다.
지이이익!
얼마 전 그 골목을 지나던 행인의 발걸음 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익! 지이이익! 지이익!
마치 장난을 하듯, 그 그을음을 발로 지워 보겠다는 듯 구둣발로 그을음을 문지르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발을 비벼도 바닥에 스며든 그을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손에 들린 캔 커피가 그냥 알루미늄 캔이 되었을 때.
중년인이 돌아섰다.
손에 들린 빈 캔을 가볍게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가 중얼거렸다.
“……마법사군.”
골목을 벗어나는 중년인의 발걸음이 더없이 진지했다.
* * *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지 한참이 지난 시간.
조퇴하는 학생이 있다면 있을지언정 학교로 들어오는 학생은 극히 드문 이 시간.
가방을 멘 현우가 교문을 지나 교실로 향했다.
와글와글!
방금 점심을 먹고 한창 신이 난 학생들의 왁자지껄함이 교실 문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현우는 그런 교실의 뒷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드르르륵!
지금이 수업시간이라든지, 혹은 수업 시작 직전이었다면 많은 이들이 문 열리는 소리에 집중해 고개를 돌렸을 테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점심시간.
교실 문이 벌컥벌컥 열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벅- 저벅-
그런 와중에도 그런 것에 눈을 두는 이는 있기 마련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우를 발견한 애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신나게 떠들다가 말이 없어진 친구를 보며, 대화하던 애들 역시 고개를 돌려 현우를 봤다.
그렇게 하나둘, 교실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마침내 정적이 찾아왔을 때.
현우가 누군가 걸터앉은 책상으로 다가가 그 정적을 깼다.
“비켜, 내 자리다.”
현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책상에 앉아 있던 학생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 갈팡질팡하는 눈빛으로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입을 달싹였다.
드르르륵!
아니, 달싹였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
조금 전까지 망설이고 있던 녀석은 이내 문을 통해 들어오는 무리를 보고 작은 경호성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책상에 앉은 녀석이 일어나길 느긋하게 기다리던 현우는 앉아 있던 녀석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말했다.
“고맙군.”
그러곤 주변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런 현우의 행동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교실에 들어온 무리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야……! 저거!”
“……어럽쇼?”
시끌시끌하게 교실에 등장한 그들 무리는 자리에 앉아 있는 현우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선두에 있던 녀석이 뛰는 듯 걸어와 단숨에 손을 날렸다.
퍽!
그다지 아프거나 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모욕적이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무엇보다 뒤통수를 향하는 손은 미리 감지를 해놓고 여전히 신체능력이 낮은 탓에 반응도 하기 전에 맞았다는 게 무엇보다도 기운 나빴다.
“야! 너 이제 학교는 나오고 싶을 때 나오기로 한 거냐?”
“…….”
“엉? 말을 해봐 새꺄. 이 새끼 수 쓰냐? 우리가 너 때문에 최근에 얼마나 기분이 더러웠는지 알아?”
“야야, 왜 초장부터 때리고 그래? 일단 이유를 찬찬히 들어보고… 그리고 시작해도 괜찮잖아. 그치?”
마치 동의라도 구하는 듯,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박성빈은 폭군이라 불리는 평소의 모습과 달리 굉장히 침착해 보였다.
“…….”
“…….”
하지만 현우가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하지 않자.
곧장 폭군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악!
“야, 새끼야. 형이 하는 말이 안 들려? 왜 안 왔느냐고 묻잖아.”
“…….”
하지만 이번에도 현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한 바였던 탓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들 역시 학생 신분인 이상 이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니 녀석의 주먹이 이전처럼 매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몇 주 전 그토록 공포스럽던 녀석의 손찌검이 마치 아이들의 투정 어린 두드림으로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까지 바뀌어도 되는 걸까?
칼롯 코즈너에서 김현우가 되어 버렸던 현우는 어느샌가 기존의 김현우와는 다른, 또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만 처음 칼롯 코즈너에서 김현우가 될 때처럼 지금의 현우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추궁과 폭력에 시달린 지 몇 분여.
녀석들도 오랜만에 나타난 현우의 분위기가 이전과 다른 탓인지 저번과 같은 무차별 폭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것보다도 현우의 몸이 너무 약해 보여서 함부로 때릴 수가 없었다는 게 맞겠지만… 어쨌거나 아무리 봐주고 있다고 한들 아프고 기분 나쁜 것은 사실.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듬성듬성 난 녀석의 얼굴을 보며 현우는 지금이라도 꺼내든 펜으로 녀석의 이마를 장식해줄까 생각했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단숨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뀔 것이기에 이내 생각을 지웠다.
물론 간단한 방법으로 마법으로 녀석을 골탕 먹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마법의 경지가 오르고 불과 3일 전 자신의 마법 위력을 다시 한 번 확실히 목격한 후 현우는 마법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위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폭력성이 문제였다.
현우의 마법은 이 녀석들이 행사하는 폭력보다도 몇 배는 아프고, 몇 배는 수치스럽고, 몇 배는 위험했다.
그게 아무리 단순한 마법이더라도 강자의 작은 장난은 약자에게 있어서 폭력일 수 있는 법이었기에 현우는 민간인에 대한 마법 사용을 자제할 생각이었다.
이런 단순한 폭력 정도는 강자의 넓은 아량으로 덮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현우에겐 그만한 아량을 보일 만한 여유가 있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참다가 끝내지는 않을 테지만…….’
여차하면 마법을 쓰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도 있었다.
현우는 외부로부터 도움을 구할 생각으로 현우를 노려보고 있는 녀석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지만,
지금껏 현우와 녀석들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다른 애들은 현우의 시선이 가까이오자 다들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모습에 현우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주변엔 금세 박성빈 패거리가 몰려들어 현우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중 어느샌가 현우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현우와 얼굴을 맞대고 있던 녀석은 조롱하듯 웃던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라? 이 새끼 지금 내 눈을 피한 거냐?”
“낄낄, 이 새끼 이거 몇 주 학교 안 나오더니 완전 컸네? 찬수가 웃고 있는데 얼굴을 돌리고.”
“것 봐, 아직 정신개조가 덜 돼서 때려서 키워야 한다니까?”
녀석들의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말에 현우는 여태껏 혼자 잘 커왔고 그동안에도 키는 니들보다 조금 더 컸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조용히, 평소처럼 지내기로 미리 결심한 바가 있는 만큼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아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 이 녀석들도 언젠간 흥미를 잃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무관심이란 한쪽이 시작하면 다른 한쪽도 자연스럽게 무관심해지는 마법 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현우의 명백한 착각이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400년 전 그 옛날에도 이런 일이 비밀비재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뻐억!
“이 새끼가 진짜! 오냐오냐 해주니까!”
“야야, 참아. 여기 교실이야.”
“야, 놔봐! 저 새끼 저거 오늘 버릇 좀 고쳐놓게!”
‘방법이 틀린 건가?’
조금 멍해진 머리로 녀석들에게 대응하지 않는 방법 외의 다른 방법을 고민하던 현우는 녀석들 중 한 녀석이 현우의 팔뚝을 때리면서 시작된 무자별 구타에 생각하기를 접었다.
대신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퍼억! 퍽!
현우의 몸 위로 떨어지는 주먹들은 비록 양아치들의 막 던지는 것들에 불과했지만 빈약하다 못해 동급생 여자애들만도 못한 육체가 고통을 호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현우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녀석들의 폭력에 굴하며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우습거니와 그런 행동을 한다고 이미 시작된 폭행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법을 제한하기로 마음먹은 지금 육체의 힘으론 녀석들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기에, 현우는 자신의 육체를 잠시 잊기로 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주먹과 발길질이 몸을 병들게 하고 있었지만 현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물론 고통을 못 느낄 뿐, 맞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만큼 빈약한 몸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설령 그들이 현우의 몸을 많이 다치게 한다 해도 현우에겐 치료마법이 있었고 혹여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들과 현우 둘 중 누구라도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학교에 다니겠다는 언약은 깨어질 테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파기였기에 현우가 잃는 건 없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