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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의 품격
1화
01 [1]


〔사소한 일이 발목을 잡는 날입니다. 좀처럼 운이 따르지 않으니 미련을 버리고 깔끔히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모니터 속의 별자리 운세는 지금 재이가 처한 상황과 꼭 맞아 떨어진다. 부서 이동 신청이 반려당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니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없는데, 꼭 나쁜 운세는 잘 맞더라.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 같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재이가 속에 말과 함께 한숨을 삼켰다.
“비가 오려나, 발등이 저리다 못해 쿡쿡 쑤시네.”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건, 박 과장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이다.
“어머, 과장님 큰 병원 가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럴 시간이나 있나, 난 누구처럼 유능하지 못해서 말이야.”
“과장님은 농담두…… 근데 정말 어쩌다 다치신 건데요?”
굳이 재이의 자리 근처까지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겨온 박 과장이 문득 멈춰 선다.
“그게 있지…….”
애써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앙심을 품은 박 과장의 서슬 퍼런 시선이 재이를 훑고 지나가는 게 또렷이 느껴진다.
“나도 정말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지?”
하지만 정말 짜증 나는 부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우리 신입도 조심해. 요즘 세상이 좀 각박해? 호의를 가지고 대해 줘도 바로 발길질이 날아오는 그런 무서운 세상이라고.”
오늘로 꼬박 닷새째. 박 과장은 두 시간 간격으로 재이의 파티션 앞으로 매번 다른 게스트를 데리고 와서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중이다.
“안 그래, 이 대리?”
이 부분이 클라이맥스다. 그리고 이것이 재이가 부서 이동 신청을 하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기도 했다.
마케팅 부서의 외근으로 호텔 풀 파티를 참관하러 갔던 날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박 과장이 주장하는 ‘호의’란 뭣도 모르고 들이켠 샴페인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재이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너도 다 알지 않느냐는 80년대의 레퍼토리를 읊은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재이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건 이 호텔의 디럭스 룸 직원 할인가를 운운한 거였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박 과장이 말한 ‘발길질’ 역시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글쎄요, 전 업무가 바빠서.”
처음엔 가시 돋친 말로 대꾸하기도 했지만, 닷새나 되풀이되는 동안 무시가 최선이라는 걸 체득했다.
이렇게 앙심이 오래가는 타입인 줄 알았다면 정강이를 걷어찬 후, 12센티의 스틸레토 힐로 발등을 꾹 짓밟을 게 아니라 아예 그 풀장에 처박아 버려야 했다. 그것도 영원히.
“하긴, 우리 이 대리는 워낙 유능한 분이니까 더 바쁘시겠지. 그런데 어쩌나…….”
슥, 다가오는 박 과장에 흠칫 놀란 재이가 움찔하자 박 과장의 입가에 띤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제 여기선 할 일이 없을 텐데.”
지난 닷새간은 없었던 노골적인 압박이다.
“참, 부서 이동 반려됐다며? 유감이야.”
제 말처럼 유능하진 않지만, 잔머리는 비상했던 박 과장은 이 순간을 위해 남은 비열함을 아껴 뒀던 게 틀림없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재이를 더 확실히 짓누를 수 있는 이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그럼, 어디 한번 잘 해 봐.”
박 과장이 물러가고도 한참, 재이는 그제야 제 손바닥을 파고드는 아릿한 통증을 자각했다. 손에 들고 있던 펜이 무색할 정도로 손바닥엔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미련을 버리고 깔끔히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별자리 운세의 마지막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오늘은 어찌 참았지만 내일, 모레, 그다음에도 참을 수 있을까.
‘그럼 때려치우면 되잖아?’
어젯밤, 재이의 한탄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친구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래, 사실 이 모든 문제들은 아주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
‘일단 때려치우고, 다른 회사로…… 아. 이젠 좀 힘든가.’
나쁜 운세는 결코 틀리지 않고, 나쁜 일들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재이는 스스로를 낭떠러지에 밀어 넣게 된 마지막 결정타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잘근 손톱을 씹었다.
‘저저번 달에 A코어텍 주식 있잖아.’
‘아, 그거? 샀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지. 나도 혹했다가 재이 네가 말리는 바람에…….’
‘나 그거 샀어.’
수화기 너머로 울리던 침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세금 빼고 전부 다.’
여기까지 떠올리자, 더 이상은 한숨을 감출 수가 없다. 바싹 타들어가는 속처럼 수분을 잃은 재이의 건조한 입술 틈으로 천근같이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날, 재이가 다시 창밖을 봤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정장 차림의 중역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긴 했지만 딱히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고, 오히려 상석에 앉은 하 회장을 중심으로 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중이었다.
“기실, 신임 사장 채용 건은 시기를 언제로 하느냐의 문제였지 더 논의할 건 없다고 봅니다.”
상석의 우측에 앉은 이사회의 우두머리 격인 남자가 입을 떼자 주의가 집중된다. 6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원기가 넘치는 모습의 하 회장은 말 대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감상을 대신하고 있었다.
“유일한 후보자인 하재민 전무는 이미 뛰어난 역량을 입증해 오고 있었으니 이견은 불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언급된 남자는 삼십 대 초반으로, 하 회장의 곁에 선 채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적당히 온화하면서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진중한 태도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임 사장이라는 중책에 썩 어울려 보였다.
“그러면 오늘 안건에 대해 이사회의 최종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의사봉이 허공에 들렸다. 저 작은 나무망치가 명쾌한 소리를 내면 오너가의 젊은 청년이 정식 후계자라는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본 이사회는 JY호텔 본점의 신임 사장으로 하재민 전무를 위촉하는 데에 전적으로…….”
모든 건 예정대로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오랜 염원이 안정적인 착륙을 하려던 찰나, 뜻밖의 돌풍이 불어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으리라.
쾅! 그 돌풍은 단번에 두꺼운 회의실 문을 박차고 기세등등하게 등장했다.
“그 회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겁니다. 주인공이 지금 도착했으니까.”
낯선 남자의 등장에 좌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크게 동요하지 않는 건 상석에 앉은 하 회장과 방금 등장한 장본인뿐인 것 같았다.
“그쪽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여긴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곳이니 당장 끌려 나가기 싫으면…….”
이사회 중 가장 성질이 급한 백 상무가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삿대질을 하는데도 남자는 여유 있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순간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외부인? 내가 외부인이라면, 애초에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할 텐데.”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소매를 걷은 셔츠에 스니커즈를 신은 남자가 피식하고 웃는다. 악의는 전혀 없이, 그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이 새카만 눈동자를 빛내는 웃음이 꼭 소년의 것처럼 천진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안 그래요?”
바로 다음 순간, 상석의 하 회장을 주시하는 눈동자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아버지.”
그 한 마디는 또렷하게 회의장과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울렸다. 그중 더러는 저들끼리 돌아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동안 침묵은 지켜졌다.
“그래…… 그랬었지.”
침묵을 깬 건 하 회장의 묵직한 목소리였다. 이사회에 모인 사람들의 미심쩍은 눈길이 어떠한 확신으로 바뀌는 계기이기도 했다. 하 회장이 방금 내뱉은 답으로 보건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저 기세등등한 불청객은 분명…….
“제 걸 찾으러 왔습니다.”
그의 손짓과 동시에 아직 열려 있던 문으로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 두 명이 들어와 테이블 위로 두터운 서류 뭉치를 늘어놓는다.
“그쪽이 오너가의 일원이라고 해도 경영에 상관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질 않습니까!”
이사들 중에서도 오너가의 충성파, 정확히는 하 전무 옹립파로 유명한 백 상무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한데 이게 다 무슨 무례란 말입니까. 회장님도 뭐라 말씀을…….”
“없을 겁니다, 하실 말씀이.”
처음 이 방을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과 목소리는 상대를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다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생일 선물을 받았거든요. JY의 주식 10%를.”
그제야 몇몇 이사들이 다급히 서류로 눈길을 돌리는데도, 하 회장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서 있는 재민과는 다르게,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뭘 모르나 본데, 고작 10%로는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가 없단 걸 아셔야지.”
코웃음을 치는 백 상무의 발언에도 심각한 분위기는 쉬이 깨지지 않았다.
“소액 주주들을 포함한 부동 세력이 13%, 회장님을 포함한 오너가에서 가진 지분이 41%. ……이래도 내가 뭘 모르는 것 같습니까? 뭐,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내가 선물을 받았으니 여러분께도 선물을 드리죠. 자세한 내용은 저와 같이 와 주신 분들이 친절히 설명 드릴 겁니다.”
말투는 경쾌했고, 한 발짝씩 상석을 향해 옮기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입가를 떠나지 않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눈동자가 지독한 위화감을 조성하는 걸 제외하면, 준수한 청년이라는 말이 꼭 맞는 모습이었다.
“신탁 회사가 위임해 뒀던 10%의 주식이 오늘 자로 제게 넘어왔다는 것과, JY의 나머지 36% 지분을 가진 Y물산의 위임장이 선택한 신임 사장이 누군지. 도합 46%의 지분이 지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을 드리죠. 삼십 분이면 충분할까요?”
이쯤 되면 굳이 당사자가 아니어도 뒤바뀐 판도를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서류의 내용은 진실이었고, 동행한 사람들은 공신력 있는 신탁 회사에서 파견된 인물들이다. 무엇보다도 하 회장은 이 상황을 통제하기는커녕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백 상무에게 동조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아까부터 한 마디도 못 한 채 하 회장의 뒤에 서 있던 재민은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불과 몇 분전까지 재민의 미래를 축복하던 이사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흐름의 변화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일단, 회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세요. 어차피 당신들 결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회는 필요하니까.”
싱긋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살벌한 발언이다.
“아, 참. 하 전무.”
그대로 문을 나서려던 남자가 문득 재민의 앞에 멈춰 섰다. 여태 간신히 평정을 가장해 온 재민의 입가가 살짝 굳어지는 걸 즐겁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동안 내 자리 대신 지키느라 수고했어.”
혼란의 장본인은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떠났다. 남은 건 그가 데려온 신탁 회사의 사람들과 이사회의 중역들, 그리고 못 박힌 듯 굳어 있는 재민뿐이다.
“그럼, 이사회를 재개하겠습니다.”
회의는 주어진 삼십 분을 넘기지 않고 끝났다. 모든 건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실을 검증하고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본 이사회는 JY호텔 본점의 신임 사장직에 하민을 임명함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이사회에 이견은 없었지만 이변은 있었다. 돌풍으로 시작해서 태풍을 불러일으킬 거대한 이변이.

◆ ◇ ◆

“네.”
똑똑, 작은 응접실 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하민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성의 없는 대답을 하자, 여비서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건넨다.
“이사회가 끝났습니다.”
하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 사람이 오늘 이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악명의 장본인이란 말인가. 소파 끝에 걸터앉아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모습은 여기보단 대학가에나 더 어울릴 것 같지만, 판단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회장님께서 잠시 찾으십니다만,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난 그보다…….”
잠시 말을 고르는 하민을 두고 비서가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타이밍에 짧게 답한다.
“예, 사장님.”
그 한 마디는 하민이 찾던 대답이었다.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고 바랐던 일들의 시작이자 본래 내 것이어야 했던 것.
“맞아요.”
분명한 답과 함께 하민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자신의 본분과 상대의 신분을 잊을 만큼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남자는 역시 이 삭막한 건물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젠 내가 사장이지.”
그러더니 일어서서 기지개를 주욱 켠다.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운 몸짓에 유독 길게 뻗은 팔다리와 날렵한 하민의 얼굴선이 도드라졌다.
“그럼 사장으로서 첫 명령을 내려 볼까.”
낯선 광경에 정신을 빼앗긴 비서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하민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경쾌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가서 회장님께 전해요. 당분간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마시라고.”
당혹스러운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서는 왜 눈앞의 인물이 악명의 장본인이 됐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죠?”
재차 미소 짓는 하민에게서 짙은 머스크 향이 훅 풍겨 온다. 잠시지만 이성을 마비시키는 매혹에 비서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예…… 사장님.”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한 마디를 잠자코 곱씹는 하민은 어쩐지 묘한 표정이다.
“사장님이라.”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든 하민이 아까까지 보고 있던 화면을 보고는 씩 웃는다.
〔오늘은 당신에게 특별한 날입니다. 특별한 시간, 특별한 상황, 특별한 물건, 그리고 곧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별자리 운세라는 거, 항상 뜬구름만 잡는 줄 알았더니 가끔은 맞기도 하나 보다. 마지막 문장은 확실히 틀렸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론 썩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럼 어디, 특별한 사장이 되러 가 볼까.”
특별한 날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되찾는 것도, 전부 지금부터 시작이다.

◆ ◇ ◆

좀처럼 개질 않는 창밖을 보는 재이의 얼굴 역시 흐리다.
“이 대리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코스피 창을 끄고 돌아보자 의외의 인물이 재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입사 동기로 함께 신입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후에 비서실로 발령이 난 터라 한참 못 보던 얼굴이다.
“어? 지현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은요. 마침 재이 씨한테 간다기에 내가 낚아챘죠. 근데 어디 안 좋아요? 안색이…… 마케팅 부서는 많이 힘든가 봐요.”
그냥 내 인생이 힘든 거겠죠. 재이는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삼키고 애써 웃어 보였다.
“그보다 비서실에서 나한테 올 일이라는 게…….”
“맞다, 별건 아니고 저희 실장님이 재이 씨를 잠깐 봤음 하셔서요. 유선상으로 할 얘기는 아니라는데, 저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실장님이면…… 비서실장님이오?”
“네, 일단 가면서 얘기해요.”
너무 뜻밖의 대상이라 선뜻 따라나서기가 망설여지는 재이를 지현이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어, 재이 씨도 이거 봐요? 왠지 이런 거 안 믿을 거 같았는데.”
모니터의 별자리 운세를 발견한 지현이 남의 속도 모르고 까르르 웃는다.
“믿는 건 아니고, 그냥 재미 삼아서요.”
“난 이거 은근히 잘 맞더라고요. 생각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근데 이거 어제 거네?”
“네?”
“봐요, 어제 날짜잖아요.”
“어, 정말이네.”
여태 어제 운세를 보며 한탄하고 있었던 거다. 하긴, 어제든 오늘이든 별로 달라질 것도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어마어마한 사건은 현실에서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제가 이재이 대리입니다. 어떤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그 생각은 불과 얼마 후 비서실장의 눈앞에 섰을 때 깨졌다.
“이 대리를 찾은 건 내가 아니라 회장님이십니다.”
“……네?”
“벌써 기다리고 계시니 이동하며 간단히 설명하죠.”
누가 어마어마한 사건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나. 회사에서 정년까지 버틴대도 회장과 독대를 할 기회는 제로에 수렴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건 분명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그게 행운이든, 불행이든 간에.
“도대체 무슨 일로 회장님이 저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을 땐 이미 비서실장을 따라 걷고 있던 차였다.
“특수한 인재가 필요해서 인사과에 문의를 하던 중에 이 대리가 얼마 전, 부서 이동 신청을 냈다가 반려당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당연히 그게 이유가 되진 않았고, 필요한 인재상에 이 대리가 가장 부합한다는 판단하에 회장님께서 독대를 청하신 겁니다. 이를 테면, 최종 면접이라는 거죠.”
비서실장은 절도 있는 걸음걸이와 속사포같이 빠른 말투로 다시 한 번 재이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 특수한 인재라는 게 뭔지…….”
“본론은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실 겁니다, 그럼.”
어느새 멈춘 발걸음 끝엔 회장실로 가는 조용한 복도가 나타났다.
“말씀 나눠 보시죠.”
재이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그러나 곧은 자세로 나아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케팅 부서 이재이 대리입니다.”
반쯤 허리를 굽히며 꺼낸 첫 마디가 제법 또렷하게 회장실 안을 울린다. 밖보다 조금 더 어둡고 고풍스러운 가구로 채워진 회장실 특유의 분위기가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내 본론만 말하지.”
상상했던 회장의 이미지와는 달리,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거의 재이의 아버지 또래로 보인다. 그 목소리도 상상하던 것보단 조금 소탈했다.
“내가 아주 중요한 일에 쓸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자네가 거기에 딱 부합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난 그 일을 이재이 씨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 내, 외부를 통틀어 수많은 사람들을 고려해 봤지만 내 눈엔 자네만 한 적임자가 없더군.”
“높이 사 주시니 영광입니다만,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하 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재이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