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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의 품격
2화
01 [2]
“솔직해서 좋군. 요즘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드물지. 내가 이재이 씨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그런 솔직함이네.”
과연 그럴까. 그 솔직함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떠올리며 재이는 어렴풋이 쓴웃음을 띠었다.
“어디 보자…… 그래, 내 제안은 단순해.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 될 걸세.”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사적인 재이의 모범답안에 이번엔 하 회장이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녹록지 않을 텐데.”
“감수하겠습니다.”
“내가 뭘 제안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하나.”
“무엇이든, 제게 맡겨진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더 적합한 인재를 찾은 걸지도 모른다. 하 회장은 조금도 꺾이지 않은 재이의 눈빛을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말, 절대 물리지 말게.”
“염려치 마십시오.”
똑 부러지는 답이 마음에 든다. 저 정도 당찬 기개가 있어야 기대를 걸어 볼만 하겠지.
“우리 JY는 서울에만 두 개의 호텔을 갖고 있지. 그중에…… 아니, 우리가 가진 모든 호텔 중 가장 중요한 지점에 오늘 날짜로 신임 사장이 임명됐네.”
“본점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JY에 보다 큰 규모의 호텔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본점은 JY의 출발점이자 상징적인 존재였다.
“난, 이재이 씨가 본점 신임 사장의 비서로 가 주길 바라네.”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재이는 의외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외람되지만, 그건 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굳이 따지자면 회장과의 갑작스러운 독대보다 더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었다.
“저는 비서 인력과는 거리가 먼 마케팅 부서 사원이고, 또한…… 본점 비서직은 이미 내정된 지 오래라고 알고 있습니다.”
“내정자라…… 물론 있었지.”
잠시 골치 아픈 생각이 떠오른 듯 하 회장이 관자놀이를 짚는다.
“하나 이변도 있었어.”
그렇기에 눈앞의 당찬 여사원이 필요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인물, 그러나 여태까지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그 이변…… 즉, 새로운 사장의 비서가 되어 달라는 거네.”
“하지만 저는 비서 인력이…….”
“어차피 전문 인력은 따로 있어. 그 정도 염두도 없이 자네를 불렀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비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올곧게 답하는 재이를 보고 하 회장은 피식 웃음을 머금는다. 평소였다면 무례하다 여겼으련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든든할 지경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예측을 벗어난 이변에는 마찬가지의 이변으로.
“그 이유는 자네가 진짜 비서가 되면 그때 말해 주지.”
하 회장이 천천히 손에 깍지를 끼우며 말하자 재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새로운 사장, 즉 자네의 상사가 비서로 받아들여 주면 그때 다시 찾아오란 말일세.”
“그 말씀인즉 그분은 동의한 게 아니라는……?”
“당연히 아니지.”
잠시 뜸을 들이는 하 회장은 아주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추측컨대 아마 자네를 쫓아내려고 할 게야.”
“예?”
“버티면 자네가 이기는 거고.”
하지만 이건 흥미 위주로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하 회장처럼 많은 걸 가진 사람은 모르겠지만 재이에겐 전부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물론, 승자에겐 상이 있어.”
재이의 망설임과 본능적인 두려움을 읽은 건지, 정확한 타이밍에 하 회장의 미끼가 날아들었다.
“기한은 일 년. 딱 일 년만 버틴다면 JY 내에서 자네의 거취를 직접 결정할 수 있게 해 주겠네. 이 정도면 파격적이지 않은가?”
그 말은 옳다. 재이는 쿵쾅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어쩌시려고 그런 약속을 하십니까.”
용기를 짜내 던진 재이의 승부수에 잠시 침묵이 감돈다. 재이에겐 그 짧은 순간이 온 하루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하! 하하…….”
침묵에 마침표를 찍은 건 호쾌한 하 회장의 웃음이었다.
“패기는 높이 사지. 그런 패기라면 조만간 JY 최초의 여자 임원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가슴은 똑같이 뛰는데, 두려움이 물러간 자리에 설렘이 깃들며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감…… 감사합니다.”
“그럼 내 제안을 수락하는 건가?”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이 게임에서 패하더라도 잃어버리는 건 똑같으니까.
“예.”
재이의 분명한 답에 하 회장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위의 내선 전화 버튼을 눌렀다. 채 몇 초가 지나기 전에 회장실에 들어온 건 아까 재이에게 속사포 같은 안내를 했던 그 비서실장이었다.
“지금 당장 비서실에 인사 발령을 내야겠는데, 적당한 직책이…… 실장급은 어떤가.”
“현재 실장급은 저를 포함해서 세 명입니다만.”
“좀 무리인가?”
좀처럼 현실감 없는 대화에 재이는 눈동자만 또르륵 굴렸다. JY에서 실장급이라면 그 씹어 먹을 박 과장보다 몇 계급이나 높은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실질적으로 평사원이 퇴직 전까지 노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위다.
“통상적으로는 굉장히 무리입니다만, 현재 상황으로 보아 감안…… 아니, 적절한 조치라 사료됩니다.”
“역시, 그렇지?”
“예. 모시는 분의 직위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럼 됐구먼.”
명쾌한 답을 뱉은 회장은 다시 재이의 눈을 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눈이다.
“지금 당장 이재이 씨를 비서실장으로 발령 내게.”
“예, 회장님.”
꿈에서도 감히 바란 적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서 너무도 간단히 이루어졌다. 재이는 이 믿기지 않는 광경 앞에서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벗어날 길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뀔 수도 있는 거였나.
“뭘 그리 놀라? 내 말했지 않나, 파격이라고.”
하지만 이건 분명히 현실이다.
“부디 내 기대를 배반치 말게, 이 실장.”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해 버린 현실.
“예, 반드시.”
차분한 미소를 띠는 재이는 더 이상 이 방에 들어설 때의 절망적인 이 대리가 아니다. 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를 알 수 없는 게임에 발을 들여놓았을지언정 가능성을 손에 쥔 터다.
어차피 잃을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이재이는 비서실장이 되기로 했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어쩌면 특별한.
〔지나간 일은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입니다. 당신의 용기와 굳건한 태도로 얻어 낸 행운이 당신을 특별한 인연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자리로 돌아와 가장 먼저 확인한 오늘의 운세는 지금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다.
서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재이는 이렇게 새로운 나날로 첫발을 내디뎠다. 행운이 이끄는 종착지가 반드시 행복은 아니고, 특별한 인연이 꼭 사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는 채로.
◆ ◇ ◆
재이는 벌써 삼십 분째 노려보던 서류에서 간신히 눈을 뗐다. 확실한 결심이 선 것이다.
“날인……하겠습니다.”
그 말에 재이를 주시하고 있던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주를 건넨다. 속칭 ‘비밀 유지각서’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한 여러 장의 계약서들이 재이의 마지막 확답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현명한 결정입니다, 이 실장님.”
낯선 호칭과 함께 페이지를 넘기는 변호사를 보며 재이는 총 다섯 번 지장을 찍었다. 하얀 종이 위에 선명하고 붉은 손도장이 찍힐수록, 멀게만 느껴지던 이야기들이 물씬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순간 이후로는 후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역시.
“절차를 모두 마치셨다고요?”
생전 처음 발을 들여 본 비서실을 가로지르자 김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진다.
“네, 방금.”
“다음은 내 차례군요. 우선 이 대리…… 아니, 이 실장이 숙지할 게 몇 가지 있어요.”
방금 호칭을 잘못 부른 건 우연일까. 의식적으로 말을 멈추고 똑바로 재이의 눈을 주시하는 김 실장을 보면 단순한 피해의식은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 아까부터 비서실의 모든 인력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이를 샅샅이 뜯어보는 중이었다. 이 대리, 라는 김 실장의 실언 부분에서 아주 작지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는 걸 모를 만큼 순진한 재이는 아니었다.
“이제 막 비서실장이 된 이 실장은 잘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비서 인력의 전문성은 하루아침에 갖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물론 이 실장에게 처음부터 무리한 걸 바랄 생각은 없어요. 아마 회장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부하시고픈 마음도요. 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입술은 웃고 있는데, 어쩐지 어금니를 꽉 깨문 듯 딱딱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말이 어려웠나 보군요.”
하지만 비서실장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비서에게는 지켜야 할 품위와 격이라는 게 있습니다.”
날카로운 인상에 한몫하는 금속 안경을 치켜 올리며 김 실장이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 나간다.
“상사의 직위에 누가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요청하기 전에 필요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하며, 언제나 모시는 분과 같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하지요.”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자세지만…… 과연 노력으로 되는 일일는지는. 아, 미안해요. 속에 말을 한다는 게 그만.”
어련하시겠어요. 재이는 억지 미소로 심경을 대신 전했다. 말로만 듣던 비서실의 텃세는 회장님 직속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도 예외가 아니란 말이지, 라는 생각과 함께.
“비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상사입니다. 상사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게 바로 비서니까요.”
그 말을 하는 당사자는 몹시 얄미웠지만 맞는 말이란 생각에 재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이 노력할 생각이 있다니 하는 말인데, 이것 하나는 잘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실장이 모시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
갑작스럽게 뜻밖의 제안을 받고 고민하면서도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부분이다.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건지, 어떤 대가를 받을 수 있을지, 리스크는 얼마만큼인지 박 터지게 고민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잊고 있었던 거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실장도 나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분들은 달라요. 적어도 자신의 직위에서만큼은 완벽해야만 하는 분들입니다. 비서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고요.”
처음으로 현실적인 부담감이 온몸으로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그 간극을 메우느냐는 전적으로 이 실장의 재량입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이 실장은 본 계약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재이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김 실장이지만 지금의 충고들에선 진정성이 느껴졌다.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회장님과 달리 난 이 실장에 대한 기대치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당부하죠. 이 실장이 비서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한은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처신해 줘요. 그게 단 며칠이라도 말입니다.”
노골적인 불신이지만 이 정도에 꺾일 각오는 아니었기에 재이는 적으나마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기본적인 인사법이나 화법에 대해선 짧게나마 가르쳐서 보내야겠군요. 우선, 그 복장부터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은데.”
“네? 제 복장이 어디가…….”
“방금 말한 건 뭐로 들었습니까? 품위와 격에 맞는…… 아, 잠시 실례.”
타이밍 좋게 걸려 온 전화가 아니었다면 불쾌한 설전이 길어질 뻔했다.
“예, 송 실장님.”
전화를 받는 김 실장을 몰래 노려보던 재이가 슥 제 복장을 훑었다. 정말, 내 복장이 어디가 어때서.
단정하지만 핏이 살아 있는 정장 바지는 트렌드에 민감한 하이웨이스트였고 상의로는 큰맘 먹고 삼 개월 할부로 지른 마르니의 하얀 블라우스를 입었다. 볼드한 스톤 목걸이를 거는 것과 포인트 있는 펌프스를 신은 것까지 마음에 쏙 드는, 심지어 고급스럽기까지 한 내 패션이 어디가 어때서!
“지금 당장은…… 아뇨, 조금 홀드해 주시면……. 역시 안 되겠죠.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 드리죠.”
자기 때문은 아니지만, 김 실장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괜히 고소했다. 재이는 김 실장이 전화를 완전히 끊길 기다렸다가 새로운 잔소리가 날아들기 전에 선수를 쳤다.
“제 복장에 관한 말씀 말입니다만, 저는 어디가 부적절한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김 실장님께서는 남자분이시라서 패션에 대해서 잘 모르시나 본데…….”
“이 실장.”
“물론 그게 중요하다는 말씀은 아니지만, 저도 커리어를 가진 사람으로서 복장을 허투루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 실장, 충고하는데 절대 상사의 말을 이런 식으로 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상사였다면 이 실장은 3초 전에 해고됐어요.”
훅,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치고 들어오는 김 실장은 역시 노련했고, 재이는 아직 조금 서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내가 이 실장을 교육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네?”
“들었잖습니까, 쓸데없이 되묻는 버릇도 고치세요. 그리고 지금 당장 본점으로 가 줘야겠습니다.”
“지금요?”
되묻기 무섭게 김 실장의 서슬 퍼런 질책이 느껴져 재이는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 업무에 대해 숙지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빠른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 아니 이대로 보내는 건 비서실의 수치라고까지 생각하지만, 결정권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서.”
오늘 하루는 모든 일이 너무도 폭풍같이 몰아친다. 그 한가운데 서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재이를 보며 김 실장이 마뜩찮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멍하게 있을 시간 없습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요.”
“기회라니요? 참, 이건 되물은 게 아니라 정보가 누락된 부분을…….”
“됐고, 가세요.”
뾰족한 표정과는 달리 등을 떠미는 김 실장의 손은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힘이 실려 있었다.
“사장님이 다시 호텔을 떠나기 전에 첫 출근을 마쳐야 합니다.”
띵, 마침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떠밀리다시피해서 탄 재이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김 실장을 돌아봤다.
“저…… 사장님은 어떤 분이죠?”
“유감스럽게도, 저 역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스르륵 닫히는 문을 보며 김 실장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행운을 빌죠.”
비서실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를 간신히 떠나보낸 김 실장은 한숨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가 멈칫, 전화로 들었던 송 실장의 당부를 떠올렸다.
“아차, 중요한 말을 깜박했네……. 절대로, 허락 없이 발을 들이면 안 되는데.”
그러나 재이가 이미 떠난 이상, 이젠 별로 중요치 않은 말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빠트린 것이 김 실장의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 역시 더는 중요치 않다.
◆ ◇ ◆
재이가 다급하게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컨시어지가 소리 없이 나타나 안내를 자청했다. 그렇게 호텔에 대한 어떠한 감상을 느낄 새도 없이 재이는 11층에 당도했다.
복도의 끝에 보이는 보통의 객실보다 두 배쯤 넓고 마호가니로 된 문의 너머가 신임 사장의 집무실이라는 말과 곧 송 실장님이 오실 거라는 언질을 남겨 두고, 컨시어지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35분.’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재이가 속으로 되뇌었다. 회사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데 35분이 걸렸다. 김 실장의 말대로라면 재이는 오늘 첫 출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부디, 내 기대를 배반하지 말게.’
하 회장의 목소리와 표정이 떠오르자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다행스럽게도 복도에 깔린 카펫은 두꺼워 재이의 초조한 동동거림을 모두 감춰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재이의 급한 성질이 한계에 임박했을 무렵, 그 눈이 동그랗게 커질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땐 보이지 않았는데, 다가서니 마호가니 문에 손톱만큼의 틈이 보였다. 여기가 호텔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발, 오늘의 운세가 맞기를.’
재이는 여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준 행운을 떠올리고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두 번 노크를 했다. 대답 대신, 뜻밖에도 문이 스르륵 밀려 나간다. 온몸으로 힘껏 밀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고 빠른 속도로 재이의 손을 떠나갔다.
“어……?”
이어서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재이의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그건 풍경이라기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실내임에도 반짝이는 샹들리에, 고풍스럽고 우아한 가구들, 중세 시대의 동화 속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정밀하고 아름다운, 문자 그대로의 스위트 룸. 그 한가운데엔 꽃이 놓여 있었다.
‘파란…… 꽃?’
희미한 푸른빛을 띤 꽃의 이름이 수국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떠올랐다. 그 남자를 처음 본 건, 그 꽃을 넘어서였다. 만개한 수국 너머로 눈이 마주쳤던 순간은 몹시 짧았지만, 동시에 아주 강렬했다.
“아.”
당황한 재이의 입에서 채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은 눈동자와 닫힌 그의 입술이 자아내는 서늘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저, 그러니까…….”
뒤늦게야 그 눈동자에 물기가 맺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실례했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저도 모르게.”
“……가.”
간신히 시선이 떨어진 건 재이가 눈을 돌려서가 아니었다. 먼저 등을 돌린 건 그 남자였다.
“저는 신임 사장님의 새로운 비서로 오게 된 이재이라고…….”
“나가.”
섬뜩하리만치 낮은 목소리. 아까의 장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저음이 재이 앞에 툭 떨어졌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
2화
01 [2]
“솔직해서 좋군. 요즘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드물지. 내가 이재이 씨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그런 솔직함이네.”
과연 그럴까. 그 솔직함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떠올리며 재이는 어렴풋이 쓴웃음을 띠었다.
“어디 보자…… 그래, 내 제안은 단순해.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 될 걸세.”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사적인 재이의 모범답안에 이번엔 하 회장이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녹록지 않을 텐데.”
“감수하겠습니다.”
“내가 뭘 제안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하나.”
“무엇이든, 제게 맡겨진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더 적합한 인재를 찾은 걸지도 모른다. 하 회장은 조금도 꺾이지 않은 재이의 눈빛을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말, 절대 물리지 말게.”
“염려치 마십시오.”
똑 부러지는 답이 마음에 든다. 저 정도 당찬 기개가 있어야 기대를 걸어 볼만 하겠지.
“우리 JY는 서울에만 두 개의 호텔을 갖고 있지. 그중에…… 아니, 우리가 가진 모든 호텔 중 가장 중요한 지점에 오늘 날짜로 신임 사장이 임명됐네.”
“본점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JY에 보다 큰 규모의 호텔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본점은 JY의 출발점이자 상징적인 존재였다.
“난, 이재이 씨가 본점 신임 사장의 비서로 가 주길 바라네.”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재이는 의외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외람되지만, 그건 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굳이 따지자면 회장과의 갑작스러운 독대보다 더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었다.
“저는 비서 인력과는 거리가 먼 마케팅 부서 사원이고, 또한…… 본점 비서직은 이미 내정된 지 오래라고 알고 있습니다.”
“내정자라…… 물론 있었지.”
잠시 골치 아픈 생각이 떠오른 듯 하 회장이 관자놀이를 짚는다.
“하나 이변도 있었어.”
그렇기에 눈앞의 당찬 여사원이 필요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인물, 그러나 여태까지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그 이변…… 즉, 새로운 사장의 비서가 되어 달라는 거네.”
“하지만 저는 비서 인력이…….”
“어차피 전문 인력은 따로 있어. 그 정도 염두도 없이 자네를 불렀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비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올곧게 답하는 재이를 보고 하 회장은 피식 웃음을 머금는다. 평소였다면 무례하다 여겼으련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든든할 지경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예측을 벗어난 이변에는 마찬가지의 이변으로.
“그 이유는 자네가 진짜 비서가 되면 그때 말해 주지.”
하 회장이 천천히 손에 깍지를 끼우며 말하자 재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새로운 사장, 즉 자네의 상사가 비서로 받아들여 주면 그때 다시 찾아오란 말일세.”
“그 말씀인즉 그분은 동의한 게 아니라는……?”
“당연히 아니지.”
잠시 뜸을 들이는 하 회장은 아주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추측컨대 아마 자네를 쫓아내려고 할 게야.”
“예?”
“버티면 자네가 이기는 거고.”
하지만 이건 흥미 위주로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하 회장처럼 많은 걸 가진 사람은 모르겠지만 재이에겐 전부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물론, 승자에겐 상이 있어.”
재이의 망설임과 본능적인 두려움을 읽은 건지, 정확한 타이밍에 하 회장의 미끼가 날아들었다.
“기한은 일 년. 딱 일 년만 버틴다면 JY 내에서 자네의 거취를 직접 결정할 수 있게 해 주겠네. 이 정도면 파격적이지 않은가?”
그 말은 옳다. 재이는 쿵쾅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어쩌시려고 그런 약속을 하십니까.”
용기를 짜내 던진 재이의 승부수에 잠시 침묵이 감돈다. 재이에겐 그 짧은 순간이 온 하루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하! 하하…….”
침묵에 마침표를 찍은 건 호쾌한 하 회장의 웃음이었다.
“패기는 높이 사지. 그런 패기라면 조만간 JY 최초의 여자 임원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가슴은 똑같이 뛰는데, 두려움이 물러간 자리에 설렘이 깃들며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감…… 감사합니다.”
“그럼 내 제안을 수락하는 건가?”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이 게임에서 패하더라도 잃어버리는 건 똑같으니까.
“예.”
재이의 분명한 답에 하 회장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위의 내선 전화 버튼을 눌렀다. 채 몇 초가 지나기 전에 회장실에 들어온 건 아까 재이에게 속사포 같은 안내를 했던 그 비서실장이었다.
“지금 당장 비서실에 인사 발령을 내야겠는데, 적당한 직책이…… 실장급은 어떤가.”
“현재 실장급은 저를 포함해서 세 명입니다만.”
“좀 무리인가?”
좀처럼 현실감 없는 대화에 재이는 눈동자만 또르륵 굴렸다. JY에서 실장급이라면 그 씹어 먹을 박 과장보다 몇 계급이나 높은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실질적으로 평사원이 퇴직 전까지 노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위다.
“통상적으로는 굉장히 무리입니다만, 현재 상황으로 보아 감안…… 아니, 적절한 조치라 사료됩니다.”
“역시, 그렇지?”
“예. 모시는 분의 직위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럼 됐구먼.”
명쾌한 답을 뱉은 회장은 다시 재이의 눈을 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눈이다.
“지금 당장 이재이 씨를 비서실장으로 발령 내게.”
“예, 회장님.”
꿈에서도 감히 바란 적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서 너무도 간단히 이루어졌다. 재이는 이 믿기지 않는 광경 앞에서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벗어날 길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뀔 수도 있는 거였나.
“뭘 그리 놀라? 내 말했지 않나, 파격이라고.”
하지만 이건 분명히 현실이다.
“부디 내 기대를 배반치 말게, 이 실장.”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해 버린 현실.
“예, 반드시.”
차분한 미소를 띠는 재이는 더 이상 이 방에 들어설 때의 절망적인 이 대리가 아니다. 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를 알 수 없는 게임에 발을 들여놓았을지언정 가능성을 손에 쥔 터다.
어차피 잃을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이재이는 비서실장이 되기로 했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어쩌면 특별한.
〔지나간 일은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입니다. 당신의 용기와 굳건한 태도로 얻어 낸 행운이 당신을 특별한 인연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자리로 돌아와 가장 먼저 확인한 오늘의 운세는 지금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다.
서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재이는 이렇게 새로운 나날로 첫발을 내디뎠다. 행운이 이끄는 종착지가 반드시 행복은 아니고, 특별한 인연이 꼭 사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는 채로.
◆ ◇ ◆
재이는 벌써 삼십 분째 노려보던 서류에서 간신히 눈을 뗐다. 확실한 결심이 선 것이다.
“날인……하겠습니다.”
그 말에 재이를 주시하고 있던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주를 건넨다. 속칭 ‘비밀 유지각서’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한 여러 장의 계약서들이 재이의 마지막 확답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현명한 결정입니다, 이 실장님.”
낯선 호칭과 함께 페이지를 넘기는 변호사를 보며 재이는 총 다섯 번 지장을 찍었다. 하얀 종이 위에 선명하고 붉은 손도장이 찍힐수록, 멀게만 느껴지던 이야기들이 물씬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순간 이후로는 후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역시.
“절차를 모두 마치셨다고요?”
생전 처음 발을 들여 본 비서실을 가로지르자 김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진다.
“네, 방금.”
“다음은 내 차례군요. 우선 이 대리…… 아니, 이 실장이 숙지할 게 몇 가지 있어요.”
방금 호칭을 잘못 부른 건 우연일까. 의식적으로 말을 멈추고 똑바로 재이의 눈을 주시하는 김 실장을 보면 단순한 피해의식은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 아까부터 비서실의 모든 인력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이를 샅샅이 뜯어보는 중이었다. 이 대리, 라는 김 실장의 실언 부분에서 아주 작지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는 걸 모를 만큼 순진한 재이는 아니었다.
“이제 막 비서실장이 된 이 실장은 잘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비서 인력의 전문성은 하루아침에 갖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물론 이 실장에게 처음부터 무리한 걸 바랄 생각은 없어요. 아마 회장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부하시고픈 마음도요. 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입술은 웃고 있는데, 어쩐지 어금니를 꽉 깨문 듯 딱딱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말이 어려웠나 보군요.”
하지만 비서실장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비서에게는 지켜야 할 품위와 격이라는 게 있습니다.”
날카로운 인상에 한몫하는 금속 안경을 치켜 올리며 김 실장이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 나간다.
“상사의 직위에 누가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요청하기 전에 필요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하며, 언제나 모시는 분과 같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하지요.”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자세지만…… 과연 노력으로 되는 일일는지는. 아, 미안해요. 속에 말을 한다는 게 그만.”
어련하시겠어요. 재이는 억지 미소로 심경을 대신 전했다. 말로만 듣던 비서실의 텃세는 회장님 직속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도 예외가 아니란 말이지, 라는 생각과 함께.
“비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상사입니다. 상사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게 바로 비서니까요.”
그 말을 하는 당사자는 몹시 얄미웠지만 맞는 말이란 생각에 재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이 노력할 생각이 있다니 하는 말인데, 이것 하나는 잘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실장이 모시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
갑작스럽게 뜻밖의 제안을 받고 고민하면서도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부분이다.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건지, 어떤 대가를 받을 수 있을지, 리스크는 얼마만큼인지 박 터지게 고민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잊고 있었던 거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실장도 나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분들은 달라요. 적어도 자신의 직위에서만큼은 완벽해야만 하는 분들입니다. 비서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고요.”
처음으로 현실적인 부담감이 온몸으로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그 간극을 메우느냐는 전적으로 이 실장의 재량입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이 실장은 본 계약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재이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김 실장이지만 지금의 충고들에선 진정성이 느껴졌다.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회장님과 달리 난 이 실장에 대한 기대치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당부하죠. 이 실장이 비서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한은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처신해 줘요. 그게 단 며칠이라도 말입니다.”
노골적인 불신이지만 이 정도에 꺾일 각오는 아니었기에 재이는 적으나마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기본적인 인사법이나 화법에 대해선 짧게나마 가르쳐서 보내야겠군요. 우선, 그 복장부터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은데.”
“네? 제 복장이 어디가…….”
“방금 말한 건 뭐로 들었습니까? 품위와 격에 맞는…… 아, 잠시 실례.”
타이밍 좋게 걸려 온 전화가 아니었다면 불쾌한 설전이 길어질 뻔했다.
“예, 송 실장님.”
전화를 받는 김 실장을 몰래 노려보던 재이가 슥 제 복장을 훑었다. 정말, 내 복장이 어디가 어때서.
단정하지만 핏이 살아 있는 정장 바지는 트렌드에 민감한 하이웨이스트였고 상의로는 큰맘 먹고 삼 개월 할부로 지른 마르니의 하얀 블라우스를 입었다. 볼드한 스톤 목걸이를 거는 것과 포인트 있는 펌프스를 신은 것까지 마음에 쏙 드는, 심지어 고급스럽기까지 한 내 패션이 어디가 어때서!
“지금 당장은…… 아뇨, 조금 홀드해 주시면……. 역시 안 되겠죠.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 드리죠.”
자기 때문은 아니지만, 김 실장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괜히 고소했다. 재이는 김 실장이 전화를 완전히 끊길 기다렸다가 새로운 잔소리가 날아들기 전에 선수를 쳤다.
“제 복장에 관한 말씀 말입니다만, 저는 어디가 부적절한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김 실장님께서는 남자분이시라서 패션에 대해서 잘 모르시나 본데…….”
“이 실장.”
“물론 그게 중요하다는 말씀은 아니지만, 저도 커리어를 가진 사람으로서 복장을 허투루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 실장, 충고하는데 절대 상사의 말을 이런 식으로 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상사였다면 이 실장은 3초 전에 해고됐어요.”
훅,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치고 들어오는 김 실장은 역시 노련했고, 재이는 아직 조금 서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내가 이 실장을 교육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네?”
“들었잖습니까, 쓸데없이 되묻는 버릇도 고치세요. 그리고 지금 당장 본점으로 가 줘야겠습니다.”
“지금요?”
되묻기 무섭게 김 실장의 서슬 퍼런 질책이 느껴져 재이는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 업무에 대해 숙지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빠른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 아니 이대로 보내는 건 비서실의 수치라고까지 생각하지만, 결정권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서.”
오늘 하루는 모든 일이 너무도 폭풍같이 몰아친다. 그 한가운데 서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재이를 보며 김 실장이 마뜩찮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멍하게 있을 시간 없습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요.”
“기회라니요? 참, 이건 되물은 게 아니라 정보가 누락된 부분을…….”
“됐고, 가세요.”
뾰족한 표정과는 달리 등을 떠미는 김 실장의 손은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힘이 실려 있었다.
“사장님이 다시 호텔을 떠나기 전에 첫 출근을 마쳐야 합니다.”
띵, 마침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떠밀리다시피해서 탄 재이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김 실장을 돌아봤다.
“저…… 사장님은 어떤 분이죠?”
“유감스럽게도, 저 역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스르륵 닫히는 문을 보며 김 실장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행운을 빌죠.”
비서실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를 간신히 떠나보낸 김 실장은 한숨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가 멈칫, 전화로 들었던 송 실장의 당부를 떠올렸다.
“아차, 중요한 말을 깜박했네……. 절대로, 허락 없이 발을 들이면 안 되는데.”
그러나 재이가 이미 떠난 이상, 이젠 별로 중요치 않은 말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빠트린 것이 김 실장의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 역시 더는 중요치 않다.
◆ ◇ ◆
재이가 다급하게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컨시어지가 소리 없이 나타나 안내를 자청했다. 그렇게 호텔에 대한 어떠한 감상을 느낄 새도 없이 재이는 11층에 당도했다.
복도의 끝에 보이는 보통의 객실보다 두 배쯤 넓고 마호가니로 된 문의 너머가 신임 사장의 집무실이라는 말과 곧 송 실장님이 오실 거라는 언질을 남겨 두고, 컨시어지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35분.’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재이가 속으로 되뇌었다. 회사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데 35분이 걸렸다. 김 실장의 말대로라면 재이는 오늘 첫 출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부디, 내 기대를 배반하지 말게.’
하 회장의 목소리와 표정이 떠오르자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다행스럽게도 복도에 깔린 카펫은 두꺼워 재이의 초조한 동동거림을 모두 감춰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재이의 급한 성질이 한계에 임박했을 무렵, 그 눈이 동그랗게 커질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땐 보이지 않았는데, 다가서니 마호가니 문에 손톱만큼의 틈이 보였다. 여기가 호텔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발, 오늘의 운세가 맞기를.’
재이는 여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준 행운을 떠올리고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두 번 노크를 했다. 대답 대신, 뜻밖에도 문이 스르륵 밀려 나간다. 온몸으로 힘껏 밀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고 빠른 속도로 재이의 손을 떠나갔다.
“어……?”
이어서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재이의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그건 풍경이라기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실내임에도 반짝이는 샹들리에, 고풍스럽고 우아한 가구들, 중세 시대의 동화 속 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정밀하고 아름다운, 문자 그대로의 스위트 룸. 그 한가운데엔 꽃이 놓여 있었다.
‘파란…… 꽃?’
희미한 푸른빛을 띤 꽃의 이름이 수국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떠올랐다. 그 남자를 처음 본 건, 그 꽃을 넘어서였다. 만개한 수국 너머로 눈이 마주쳤던 순간은 몹시 짧았지만, 동시에 아주 강렬했다.
“아.”
당황한 재이의 입에서 채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은 눈동자와 닫힌 그의 입술이 자아내는 서늘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저, 그러니까…….”
뒤늦게야 그 눈동자에 물기가 맺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실례했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저도 모르게.”
“……가.”
간신히 시선이 떨어진 건 재이가 눈을 돌려서가 아니었다. 먼저 등을 돌린 건 그 남자였다.
“저는 신임 사장님의 새로운 비서로 오게 된 이재이라고…….”
“나가.”
섬뜩하리만치 낮은 목소리. 아까의 장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저음이 재이 앞에 툭 떨어졌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