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수줍은 뺨 1화
1.
“이 그림은 언제 보아도 멋지군요. 자기 얼굴보다 큰 꽃으로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여자의 작은 얼굴은 상당히 무표정합니다만, 검은색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어요. 언뜻 새침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서 불안함도 보이고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얇은 입술은 한쪽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 있어 억지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이는 건 자신을 보는 타인에게는 자애롭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윤 기자의 말에 나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캔버스에 시선을 내려놓았다. 새하얀 블라우스를 목 끝까지 여민 여자는 언뜻 보면 우아해 보이지만 옷깃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불안했다. 마치 누가 쫓아오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동자도 그렇고…… 호화로운 저택 앞 잔디에 앉아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차가운 커피를 따라 주지만 그것은 안중에도 없다.
저택을 감싸는 창살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듯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을 뿐.
내가 이걸 그렸을 때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고민이 몰려왔을 때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자 하면 주입식으로 그려야 하는 틀에 갇힌 미술 자체에 지쳤달까. 그래서 화실에 틀어박혀 무작정 그렸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이 가는 대로. 한겨울, 그 추운 날 나는 온몸이 땀에 젖은 줄도 모른 채 나도 몰랐던 열정을 작은 화폭에 쏟아 냈었다.
그 당시에는 완성된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었다. 아무렇게나 잡은 붓에 묻은 유화 물감 냄새에 취해서 그리는 내내 보지 못했던 진짜 내 모습이 캔버스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나는 남들에게는 잘 다듬어지고 예쁜 그림만 보여 주고 싶었지만 속으로는 굉장한 불안감을 떠안고 있었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나의 현실이 그녀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이 그림의 어떤 점이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하하, 하연수 씨는 굉장히 겸손하시네요.”
수첩에 인터뷰 내용을 적으며 윤 기자가 말했다. 윤 기자의 웃음에도 같이 웃을 수 없었던 건 정말 이 그림이 왜 높게 평가되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요즘은 통 그림을 내보이지 않으시던데 혹, 다른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중이신가요?”
“아뇨.”
“하연수 씨의 최신 작품도 1년 반 전에 그린 순수가 끝입니다. 다들 당신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어요.”
씩, 웃은 윤 기자가 수첩을 닫았다.
“빨리 다음 작품을 뵙고 싶네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내민 손바닥을 마주 잡으며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1년 반 동안 붓을 들지 못한 이유.
사실, 붓을 잡는 게 무서워졌다.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내 속마음이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밝은 것이 아닌, 우울하고 침울한 그런 나쁜 색들까지 모두. 내 마음 깊숙이 담겨져 있는 것까지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
어렴풋이 느껴지는 햇살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제저녁, 늦은 저녁을 먹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으쌰, 하고 바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몇 번을 뒤척인 끝에 움직이는 걸 포기했다. 대신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자니 정 대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학교에 가 보는 게 어때?’
내 그림을 후원해 주는 정 대표의 말에 처음에는 무슨 학교냐며 손사래 쳤지만 그곳은 풋풋한 열정이 가득해서 밝은 에너지를 받으면 밝은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리에 그만 솔깃해져 버렸다. 그만큼 내가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정 대표가 물어봤었다.
‘지금 그림도 괜찮은데? 왜 밝은 그림을 그리려고 애를 써. 애를 쓰긴.’
처음부터 밝고 활기찬 그림을 그릴 생각은 없었다. 우연히 초청된 전시회에서 본 그 작품만 아니었더라면. 그 그림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손바닥만 한 캔버스에 남색 유화 물감으로 밤하늘을 표현했다. 캔버스 3분의 2를 차지하는 네모난 아파트. 그 아파트에는 창문이 없었다. 출입문도 없었다. 그런데 무섭다거나 음침하다거나 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분명 어두운 색채로만 채워진 한 폭의 그림에서는 따뜻한 힘이 느껴졌다.
그 그림을 그린 작가는 상당히 나이가 든 노신사였는데 나이가 무색할 만큼 분위기가 온화해 보였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보아도 어린 시절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행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온 행복한 정서감이 작품에 묻어 나온다는걸.
곧장 내가 그린 그림 앞에 섰다. 한참 서 있다 다시 아파트가 그려진 그 그림 앞에 섰다. 몇 번이나 그 동작을 반복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수 학생. 여기.”
조교가 손에 쥐여 준 건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었다.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와 다르게 고등학교처럼 시간표가 나와 있어요. 중간에 편입해서 강의 따라가기 힘들겠지만 대부분 실기 위주라 많이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시간표는 빽빽했다. 야자만 들어가 있다면 완벽한 고등학교 시간표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지만 내 눈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시간표 뒤에 첨부되어 있는 또 다른 종이.
나는 느릿하게 종이에 써진 글자를 읽었다.
“2015년 엠티…… 장소 태안 산두리 해수욕장 펜션?”
궁금증이 담긴 내 목소리에 서류를 정리하던 조교가 친절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그걸 말 안 해 줬네. 내일 9시까지 학교 정문으로 와요. 연수 학생은 간단한 옷 두 벌만 가지고 오면 되겠네요.”
“네……?”
엠티가 옷 두 벌만 가지고 갈 수 있는 데는 아니지 않나?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챈 건지 ‘잠시만요.’라고 작게 소곤거린 조교가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인사를 하고 나가 버릴까? 생각하는데.
“록이 학생?”
록이라고? 익숙한 이름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엠티에 관한 설명이 적힌 종이 맨 밑에 써진 한국대학교. 얼마 전 통화에서 언뜻 록이가 여길 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새로 편입된 학생 한 명이 있는데 내일 엠티잖아. 록이 학생네 조에 들어가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상대방에게 물어보기는 하지만 조교는 이미 그 조로 나를 보내기로 마음을 정한 듯싶었다. 조 이름이 적힌 명단으로 보이는 맨 마지막에 하연수, 내 이름 세 글자가 이미 작성되어 있었으니까.
“연수 학생…… 응, 하연수 학생이라고. 아, 가까이 있으면 와서 설명 좀 해 줄래? 그래 주면 나는 좋지.”
그 뒤로 몇 마디 더 건네던 조교는 통화를 끝낸 듯 귀에 가져갔던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내일 같은 조원 학생 한 명 여기로 올 거예요.”
나는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성록은 아니죠?”
“어머! 록이를 아니?”
깜짝 놀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교실 문이 활짝 열렸다.
“하연수 여기 있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반듯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엄청나게 놀라 부렀다. 네가 내랑 같은 학교 다닌당께.”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길 가다 뒤돌아볼 정도로 훤칠한 저 외모가 아까웠다. 저 사투리만 아니라면 벌써 여자 친구를 사귀고도 남았을 텐데.
“너 여기 학교 다닌다고 했었나?”
주위를 크게 한 번 둘러보자 곧장 서운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내가 몇 번을 말했나. 너는 친구에게 최소한의 관심도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도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거 오냐오냐하며 주워 왔더니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나는 민망함에 슬쩍 웃었다.
규모가 작은 전시회에 초청되어 갔다가 배고파서 빵을 좀 먹었더니 목이 말랐다. 간단히 마실 수 있는 와인도 있었지만 술보단 물이 마시고 싶었기에 투명한 잔에 담긴 물을 그대로 원샷 한 게 문제였달까. 차라리 소주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 소주였다면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상하게 사이다만 마시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뽀뽀……를 하려고 한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내게 치를 떨던 남자가 나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간 것뿐. 사실 이 기억도 희미해서 확실치는 않았다.
아니, 내가 어떤 남자에게 추태를 부리긴 했던가?
며칠 지나니 꿈인 것처럼 안개에 가려진 그날을 더듬어 보았다. 생각을 멈출 수 있었던 건 궁금증 가득한 조교의 물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둘이는 어떻게 아는 사이니?”
순한 인상의 조교의 눈동자를 본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의문은 단순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외모를 가진 내가 어떻게 잘생긴 록이와 친분이 있는 건지 궁금한 거겠지. 록이가 입을 다물고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때면 꽤나, 괜찮은 편에 속했으니까.
“부모님끼리 서로 아는 사이세요.”
내 말에 조교는 아, 하고 이상한 탄성을 흘렸다.
나는 뚫어져라 종이를 바라봤다. 학교 다닐 때도 가기 싫었던 엠티? 술이야 보통 사람들 딱, 먹는 만큼 먹지만 이곳은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운 학생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 아니었던가? 교수님들도 적당히 마시라고는 하지만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 곳.
“종이 뚫어진다.”
록이 짐 가방을 어깨에 메며 한마디 했지만 나는 록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릴까?”
보고 있던 종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짐까지 다 싸 놓고선 이제 와서? 안전벨트나 퍼뜩 해라.”
그야, 짐이라고 해 봤자…… 옷 두 벌이 들어 있는 가방도 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버스 뒷자리에 가기 위해 좁은 공간을 지나가다 실수로 내 어깨를 친 듯했다.
“신경 쓰지 마라. 저놈 성질이 더럽다고 소문났다.”
옆에 앉은 록이 과자 봉지를 뜯으며 소곤거렸다. 아마도, 내 어깨를 치고도 사과 한마디 안 한 남자에 대한 말인 듯했다.
“저놈 정승휼이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가지고 요, 콧대가 높아진 거다. 저놈 졸졸졸 따라다니는 계집애들도 마찬가지고.”
말을 하고 나서 록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의 눈치를 살폈다. 직감적으로 지금 뒷말을 한 정승휼의 눈치를 살핀 듯했다. 나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다 문득 이상한 광경에 순간 멈칫, 했다.
확실히 미대생들이라 그런지 남학생보단 여학생의 수가 조금 더 많았다. 그 여학생들이 연신 뒤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정승휼을 훔쳐보고 있었다. 차마, 대놓고 보지는 못하고 고개가 아프지도 않은지 힐끔, 또 힐끔 쳐다보는 그녀들의 행동에 궁금증이 일어 고개를 돌렸다.
청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짧은 머리는 아니지만 잘 정리된 머리카락에서 주는 인상은 우선 호감형. 게다가 남자치고는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들어가 있는 것도 신기했고.
록이의 경우는 귀엽게 잘생긴 편이라면 저 남자애는 시원스럽게 잘생겼다고 해야 하나? 여자들에게 보호 본능을 끌어낼 타입이 아닌, 여자들을 보호해 줄 타입이랄까?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성숙한 남자 냄새가 났다.
단지, 내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돌아간 고개를 원위치 한 것과 동시에 타박을 들어야 했다.
“니도 반해 부렀냐?”
“아니야.”
“거짓말. 니 눈이 요래 뒤집어져 부렀어야.”
기다란 손으로 제 눈을 뒤집는 시늉을 하는 록이를 보며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이걸 상대해 줘, 말아?
“다른 계집애들 눈처럼 동태눈마냥 이리…….”
열심히 내 눈동자에 대해 설명하는 록이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그저 잠시, 머리만 기대고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수마에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1.
“이 그림은 언제 보아도 멋지군요. 자기 얼굴보다 큰 꽃으로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여자의 작은 얼굴은 상당히 무표정합니다만, 검은색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어요. 언뜻 새침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서 불안함도 보이고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얇은 입술은 한쪽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 있어 억지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이는 건 자신을 보는 타인에게는 자애롭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윤 기자의 말에 나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캔버스에 시선을 내려놓았다. 새하얀 블라우스를 목 끝까지 여민 여자는 언뜻 보면 우아해 보이지만 옷깃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불안했다. 마치 누가 쫓아오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동자도 그렇고…… 호화로운 저택 앞 잔디에 앉아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차가운 커피를 따라 주지만 그것은 안중에도 없다.
저택을 감싸는 창살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듯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을 뿐.
내가 이걸 그렸을 때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고민이 몰려왔을 때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자 하면 주입식으로 그려야 하는 틀에 갇힌 미술 자체에 지쳤달까. 그래서 화실에 틀어박혀 무작정 그렸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이 가는 대로. 한겨울, 그 추운 날 나는 온몸이 땀에 젖은 줄도 모른 채 나도 몰랐던 열정을 작은 화폭에 쏟아 냈었다.
그 당시에는 완성된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었다. 아무렇게나 잡은 붓에 묻은 유화 물감 냄새에 취해서 그리는 내내 보지 못했던 진짜 내 모습이 캔버스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나는 남들에게는 잘 다듬어지고 예쁜 그림만 보여 주고 싶었지만 속으로는 굉장한 불안감을 떠안고 있었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나의 현실이 그녀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이 그림의 어떤 점이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하하, 하연수 씨는 굉장히 겸손하시네요.”
수첩에 인터뷰 내용을 적으며 윤 기자가 말했다. 윤 기자의 웃음에도 같이 웃을 수 없었던 건 정말 이 그림이 왜 높게 평가되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요즘은 통 그림을 내보이지 않으시던데 혹, 다른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중이신가요?”
“아뇨.”
“하연수 씨의 최신 작품도 1년 반 전에 그린 순수가 끝입니다. 다들 당신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어요.”
씩, 웃은 윤 기자가 수첩을 닫았다.
“빨리 다음 작품을 뵙고 싶네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내민 손바닥을 마주 잡으며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1년 반 동안 붓을 들지 못한 이유.
사실, 붓을 잡는 게 무서워졌다.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내 속마음이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밝은 것이 아닌, 우울하고 침울한 그런 나쁜 색들까지 모두. 내 마음 깊숙이 담겨져 있는 것까지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
어렴풋이 느껴지는 햇살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제저녁, 늦은 저녁을 먹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으쌰, 하고 바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몇 번을 뒤척인 끝에 움직이는 걸 포기했다. 대신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자니 정 대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학교에 가 보는 게 어때?’
내 그림을 후원해 주는 정 대표의 말에 처음에는 무슨 학교냐며 손사래 쳤지만 그곳은 풋풋한 열정이 가득해서 밝은 에너지를 받으면 밝은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리에 그만 솔깃해져 버렸다. 그만큼 내가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정 대표가 물어봤었다.
‘지금 그림도 괜찮은데? 왜 밝은 그림을 그리려고 애를 써. 애를 쓰긴.’
처음부터 밝고 활기찬 그림을 그릴 생각은 없었다. 우연히 초청된 전시회에서 본 그 작품만 아니었더라면. 그 그림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손바닥만 한 캔버스에 남색 유화 물감으로 밤하늘을 표현했다. 캔버스 3분의 2를 차지하는 네모난 아파트. 그 아파트에는 창문이 없었다. 출입문도 없었다. 그런데 무섭다거나 음침하다거나 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분명 어두운 색채로만 채워진 한 폭의 그림에서는 따뜻한 힘이 느껴졌다.
그 그림을 그린 작가는 상당히 나이가 든 노신사였는데 나이가 무색할 만큼 분위기가 온화해 보였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보아도 어린 시절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행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온 행복한 정서감이 작품에 묻어 나온다는걸.
곧장 내가 그린 그림 앞에 섰다. 한참 서 있다 다시 아파트가 그려진 그 그림 앞에 섰다. 몇 번이나 그 동작을 반복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수 학생. 여기.”
조교가 손에 쥐여 준 건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었다.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와 다르게 고등학교처럼 시간표가 나와 있어요. 중간에 편입해서 강의 따라가기 힘들겠지만 대부분 실기 위주라 많이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시간표는 빽빽했다. 야자만 들어가 있다면 완벽한 고등학교 시간표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지만 내 눈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시간표 뒤에 첨부되어 있는 또 다른 종이.
나는 느릿하게 종이에 써진 글자를 읽었다.
“2015년 엠티…… 장소 태안 산두리 해수욕장 펜션?”
궁금증이 담긴 내 목소리에 서류를 정리하던 조교가 친절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그걸 말 안 해 줬네. 내일 9시까지 학교 정문으로 와요. 연수 학생은 간단한 옷 두 벌만 가지고 오면 되겠네요.”
“네……?”
엠티가 옷 두 벌만 가지고 갈 수 있는 데는 아니지 않나?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챈 건지 ‘잠시만요.’라고 작게 소곤거린 조교가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인사를 하고 나가 버릴까? 생각하는데.
“록이 학생?”
록이라고? 익숙한 이름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엠티에 관한 설명이 적힌 종이 맨 밑에 써진 한국대학교. 얼마 전 통화에서 언뜻 록이가 여길 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새로 편입된 학생 한 명이 있는데 내일 엠티잖아. 록이 학생네 조에 들어가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상대방에게 물어보기는 하지만 조교는 이미 그 조로 나를 보내기로 마음을 정한 듯싶었다. 조 이름이 적힌 명단으로 보이는 맨 마지막에 하연수, 내 이름 세 글자가 이미 작성되어 있었으니까.
“연수 학생…… 응, 하연수 학생이라고. 아, 가까이 있으면 와서 설명 좀 해 줄래? 그래 주면 나는 좋지.”
그 뒤로 몇 마디 더 건네던 조교는 통화를 끝낸 듯 귀에 가져갔던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내일 같은 조원 학생 한 명 여기로 올 거예요.”
나는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성록은 아니죠?”
“어머! 록이를 아니?”
깜짝 놀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교실 문이 활짝 열렸다.
“하연수 여기 있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반듯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엄청나게 놀라 부렀다. 네가 내랑 같은 학교 다닌당께.”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길 가다 뒤돌아볼 정도로 훤칠한 저 외모가 아까웠다. 저 사투리만 아니라면 벌써 여자 친구를 사귀고도 남았을 텐데.
“너 여기 학교 다닌다고 했었나?”
주위를 크게 한 번 둘러보자 곧장 서운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내가 몇 번을 말했나. 너는 친구에게 최소한의 관심도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도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거 오냐오냐하며 주워 왔더니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나는 민망함에 슬쩍 웃었다.
규모가 작은 전시회에 초청되어 갔다가 배고파서 빵을 좀 먹었더니 목이 말랐다. 간단히 마실 수 있는 와인도 있었지만 술보단 물이 마시고 싶었기에 투명한 잔에 담긴 물을 그대로 원샷 한 게 문제였달까. 차라리 소주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 소주였다면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상하게 사이다만 마시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뽀뽀……를 하려고 한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내게 치를 떨던 남자가 나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간 것뿐. 사실 이 기억도 희미해서 확실치는 않았다.
아니, 내가 어떤 남자에게 추태를 부리긴 했던가?
며칠 지나니 꿈인 것처럼 안개에 가려진 그날을 더듬어 보았다. 생각을 멈출 수 있었던 건 궁금증 가득한 조교의 물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둘이는 어떻게 아는 사이니?”
순한 인상의 조교의 눈동자를 본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의문은 단순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외모를 가진 내가 어떻게 잘생긴 록이와 친분이 있는 건지 궁금한 거겠지. 록이가 입을 다물고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때면 꽤나, 괜찮은 편에 속했으니까.
“부모님끼리 서로 아는 사이세요.”
내 말에 조교는 아, 하고 이상한 탄성을 흘렸다.
나는 뚫어져라 종이를 바라봤다. 학교 다닐 때도 가기 싫었던 엠티? 술이야 보통 사람들 딱, 먹는 만큼 먹지만 이곳은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운 학생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 아니었던가? 교수님들도 적당히 마시라고는 하지만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 곳.
“종이 뚫어진다.”
록이 짐 가방을 어깨에 메며 한마디 했지만 나는 록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릴까?”
보고 있던 종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짐까지 다 싸 놓고선 이제 와서? 안전벨트나 퍼뜩 해라.”
그야, 짐이라고 해 봤자…… 옷 두 벌이 들어 있는 가방도 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버스 뒷자리에 가기 위해 좁은 공간을 지나가다 실수로 내 어깨를 친 듯했다.
“신경 쓰지 마라. 저놈 성질이 더럽다고 소문났다.”
옆에 앉은 록이 과자 봉지를 뜯으며 소곤거렸다. 아마도, 내 어깨를 치고도 사과 한마디 안 한 남자에 대한 말인 듯했다.
“저놈 정승휼이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가지고 요, 콧대가 높아진 거다. 저놈 졸졸졸 따라다니는 계집애들도 마찬가지고.”
말을 하고 나서 록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의 눈치를 살폈다. 직감적으로 지금 뒷말을 한 정승휼의 눈치를 살핀 듯했다. 나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다 문득 이상한 광경에 순간 멈칫, 했다.
확실히 미대생들이라 그런지 남학생보단 여학생의 수가 조금 더 많았다. 그 여학생들이 연신 뒤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정승휼을 훔쳐보고 있었다. 차마, 대놓고 보지는 못하고 고개가 아프지도 않은지 힐끔, 또 힐끔 쳐다보는 그녀들의 행동에 궁금증이 일어 고개를 돌렸다.
청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짧은 머리는 아니지만 잘 정리된 머리카락에서 주는 인상은 우선 호감형. 게다가 남자치고는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들어가 있는 것도 신기했고.
록이의 경우는 귀엽게 잘생긴 편이라면 저 남자애는 시원스럽게 잘생겼다고 해야 하나? 여자들에게 보호 본능을 끌어낼 타입이 아닌, 여자들을 보호해 줄 타입이랄까?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성숙한 남자 냄새가 났다.
단지, 내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돌아간 고개를 원위치 한 것과 동시에 타박을 들어야 했다.
“니도 반해 부렀냐?”
“아니야.”
“거짓말. 니 눈이 요래 뒤집어져 부렀어야.”
기다란 손으로 제 눈을 뒤집는 시늉을 하는 록이를 보며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이걸 상대해 줘, 말아?
“다른 계집애들 눈처럼 동태눈마냥 이리…….”
열심히 내 눈동자에 대해 설명하는 록이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그저 잠시, 머리만 기대고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수마에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