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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뺨 2화
여름철이 아니라 그런지 해수욕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고운 모래가 한없이 이어지는 끝 쪽에 자리 잡은 펜션은 아기자기했다. 딱, 그림책에서나 보던 펜션이랄까. 여자들은 너무 예쁘다며 벌써부터 설렌 표정으로 펜션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우리 조는 여긴가 보네?”
록이 가리킨 펜션 문에는 검정색 글씨로 2조라고 써진 종이 한 장이 붙여 있었다. 밑에는 조그맣게 조원들 이름도 있었다. 나는 록이를 따라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펜션 구석에는 이미 다른 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가방에서 프라이팬을 꺼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응? 못 보던 얼굴인데?”
남자의 말에 록이 와서 대꾸했다.
“이번에 편입했당께. 그보다 나 교수님한테 언제까지 짐 풀지 물어보고 오께.”
메고 온 가방을 바닥에 던져 둔 록이 나가자 남자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하. 반갑다. 나는 이장수.”
“하연수야.”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던 장수가 멈칫하며 나를 내려 봤다.
“하연수?”
그리고선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놈이 좋아하는 화가랑 이름이 똑같네.”
그놈?
이런 내 의문을 알아차린 건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 치던 장수가 내 뒤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슬쩍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정승휼과 동그란 안경테를 쓴 남자가 펜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 문제는 동그란 안경이 아니었다.
정승휼은 나를 보더니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마치 정말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만난 사람처럼 구는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이번에 편입했나 봐. 우리랑 같은 조니까 앞으로 잘 지내 봐.”
장수가 특유의 호탕함으로 하하, 웃으며 안경남과 정승휼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
상대도 하기 싫다는 기가 막힌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도 섞여 있었다.
“편입생이라고?”
정승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편입생이 왜 우리 조에 있는 거지? 난 우리 조에 다른 애 들어오는 거 동의한 적 없는데.”
그렇게 말을 하니 굉장히 민망해져서 고개를 들 수 없……기는 개뿔. 록이의 말이 맞았다. 저런 더러운 성격이라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노려봐 주자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펜션 밖으로 나가 버린다. 뭐야, 그 정도로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아니 왜? 나를 언제 봤다고?
황당한 마음에 그가 나간 문을 한참 노려보는데 장수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꺼냈다.
“재 요즘 심기 안 좋을걸. 그냥 연수 네가 이해해.”
“맞아. 얼마 전에 전시회에 갔다가 어떤 미친 여자한테 된통 걸린 모양이더라고.”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대. 집에 가려는데 길가까지 따라와서 막, 뽀뽀하려고 했다지? 아마?”
어쩌다 저런 남자에게 들이대 가지고선. 이름 모를 여자에게 측은지심이 들려고 할 때였다. 이어지는 다음 말이 아니었다면.
“더 대박인 건 사이다 마시고 취한 척 쇼했다잖아. 얼마나 치가 떨렸으면 길가에 내동댕이치고 왔대.”
자, 잠깐. 사이다?
“진짜 요즘 여자들 무서워. 나중에는 맹물 마시고도 들이대는 거 아닌가 몰라.”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이다 마시고 쇼해서 뽀뽀하려고 들이댔다가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나는 크게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혹시 그 전시회가…… 파랑 나비의 춤을 주제로 한 전시회는 아니……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야 내가 그날 거기 있었으니까.
“혹시.”
장수의 눈에 스윽, 장난기가 새어 나왔다.
“그 진상 너 아니야?”
“…….”
“…….”
“…….”
“농담인데.”
농담이라고 말해도 나는 쉽사리 그를 따라 넉살 좋게 웃을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하는 다음 말 때문에.
“그나저나 그 진상은 누굴까?”
납니다.
“어떻게 사이다를 먹고 취한 척하냐. 그 뻔뻔함 한번 보고 싶다.”
나예요.
“나도.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생겼어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진상. 새삼, 울고 싶어졌다.
해변에는 봄바람이 불어도 추운기가 가시지 않았다. 모두들 후드 점퍼나 얇은 겉옷을 걸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춤을 추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노래는 신나는 댄스 음악.
리듬에 맞춰 위아래로 유연하게 흔드는 여학생들이 한쪽 눈으로 윙크하며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에 답하고 있었다. 비트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고 쾅, 하는 피아노 음반의 마지막 굉음과 함께 장기 자랑이 끝이 났다. 그러나 여기저기 가시지 않은 청춘의 열기 때문인지 쉽사리 펜션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학생회장으로 보이는 사회자가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후! 이 후끈한 열기를 그대로 식히기 아쉽네요. 그럼 게임 하나 할까요?”
“와와! 네!”
열광적인 학생들의 답에 사회자가 씩, 웃었다.
“그럼 즉석 게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각 조에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회자 옆으로 일곱 명이 나왔다. 대부분 수줍게 웃는 여학생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망각한 게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 데려오기!’라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곱 명의 여학생들이 모두 내가 속해 있는 조에 다가왔다. 나는 크게 주변을 돌아봤다. 다른 조보다 확연히 적은 인원수에 짐을 정리하느라 미처 다른 조처럼 추리닝 같은 간편한 복장을 입지 못했다고는 하나…….
“오빠! 저랑 같이 나가요.”
“선배님. 같이 나가 주세요!”
우리 조가 아니더라도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은 많았다. 나도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5초 세겠습니다. 5!”
사회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마음이 급한 건지 이제는 정승휼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놈의 인기는 계절도 안 탄당께.”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록이 부러운 듯 자신의 옷깃을 잡은 여자의 손을 밀어낸 정승휼을 보고 있었다.
록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모여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정승휼에게 쏠렸다. 나라면 그 시선아 부담스러울 텐데. 그는 그런 것 따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자신을 귀찮게 하는 여자들을 냉랭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4! 3!”
사회자가 큰 소리로 숫자를 부르자 단발머리 여자가 정승휼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빠, 빨리 나가요. 시간 얼마 안 남았단 말이에요. 네에?”
양 뺨이 발그레 물든 그녀는 자신의 무기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담한 키에 웃을 땐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로 최대한 귀엽게 어리광을 피우듯 어깨를 양옆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억수로 이쁘다.”
록이 단발머리의 귀여움에 흠뻑 빠져 있을 때였다.
“손대지마.”
정승휼이 옷깃을 잡은 단발머리의 손을 쳐냈다. 그녀는 잠시 멈칫, 하더니 2! 사회자의 목소리에 다시 용기를 냈다.
“앗, 제가 너무 잡아당겼죠? 헷. 그럼 이렇게 살짝만 잡을게요.”
정말로 살짝, 잡으려는 듯 앙증맞게 벌어진 검지와 엄지, 두 손가락은 귓가로 바로 날아드는 차가운 목소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너, 남자한테 환장했어? 왜 못 만져서 안달이야. 당장 저리 안 가?”
단발머리는 눈을 크게 깜박였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네?”
“당장 저리 가라. 내게서 떨어지라고.”
한두 명도 아니고. 과 학생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저런 말을 들은 단발머리는 끝내 울먹거렸다. 큰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지려고 하자 보는 나까지 안쓰러워지려는데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모두들, 쯧쯧 혀를 차거나 고개를 내저었지만 저런 나쁜 놈을 봤냐. 뭐 이런 나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그러니까 왜 승휼이한테 왜 가서는.’
‘나는 저 꼴 날 줄 알았다.’
‘승휼이가 한두 번 저런 것도 아니고 뭐.’
같이 있던 장수와 안경남뿐만 아니라 과 학생들도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해 보였다.
“또 한 명 울어 버렸어야.”
록이가 안타까운 듯 속삭였다. 청춘의 열기로 밤을 잡아먹을 듯 타올랐던 밤은 한순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회자는 카운트를 세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난감한 듯 마이크를 잡은 손을 쥐었다 폈다.
“어…… 음……! 하하, 이번 게임은 시간 내 아무도 오지 않았으니 실패죠? 그럼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 볼까요?”
애써 냉랭한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사회자의 모습에 학생들은 다시 박수를 치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구석에서 네모난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선 학생들의 이름이 써진 쪽지를 상자 안에 모두 넣었다.
또 무슨 게임을 하려고 저러지? 싶은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은 사회자가 게임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제가 딱, 네 사람을 뽑을 겁니다. 우선 뽑힌 사람은 이곳에 나와 빼빼로로 게임을 하게 되는데요. 모두 알죠? 뺴빼로의 길이가 가장 짧은 팀에게는 소고기 쏩니다!”
소고기란 말에 흥분한 이들이 손을 높이 들었다.
“남자와 남자가 뽑히면 어떡하나요?”
“물론, 남자와 남자가 될 수 있고 여자와 여자가 될 수 있지만 저는 빼빼로 길이만 볼 겁니다. 자, 그럼 뽑아 볼까요?”
사회자가 검은색 상자에서 쪽지 하나를 뽑았다. 학생들이 두구! 두구! 두구! 두구! 입으로 효과음을 만들어 내자 분위기가 다시 올라가는데 어째, 사회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울 것 같달까? 그는 힘겹게 쪽지에 적힌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정승휼……이군요. 흠흠, 자 앞으로 나와 주세요.”
무심하게 앉아 있던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결국 사회자 옆에 섰다.
“자, 그럼 정승휼과 같은 팀을 하게 될 사람은 누굴까요?”
상자 속에 들어간 사회자의 손이 바빠졌다.
“누굴 또 울리려고 저런다냐. 쯧.”
록이가 혀를 찼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왜 하필 저 사회자는 정승휼을 뽑아 가지고는. 또 다시 냉랭해질 분위기에 차라리 펜션에 가서 잠이나 잘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생각을 바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던 건 내 이름을 부르는 사회자 때문이었다.
“하연수?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하연수 학생?”
사회자는 자신이 본 이름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풉. 워매! 너 부른다야. 안 나가고 머한다냐.”
록이 웃으며 내 팔을 쳤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성격 더러운 아니, 지금 보니 입까지 나쁜 물이 든 정승휼에게 보내기에는 록은 나를 생각보다 많이 예뻐했으니까. 나는 조용히 허공에 떠다니는 공기처럼 숨만 내쉬었다. 내 뒤에 앉은 장수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큭큭,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여름철이 아니라 그런지 해수욕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고운 모래가 한없이 이어지는 끝 쪽에 자리 잡은 펜션은 아기자기했다. 딱, 그림책에서나 보던 펜션이랄까. 여자들은 너무 예쁘다며 벌써부터 설렌 표정으로 펜션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우리 조는 여긴가 보네?”
록이 가리킨 펜션 문에는 검정색 글씨로 2조라고 써진 종이 한 장이 붙여 있었다. 밑에는 조그맣게 조원들 이름도 있었다. 나는 록이를 따라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펜션 구석에는 이미 다른 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가방에서 프라이팬을 꺼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응? 못 보던 얼굴인데?”
남자의 말에 록이 와서 대꾸했다.
“이번에 편입했당께. 그보다 나 교수님한테 언제까지 짐 풀지 물어보고 오께.”
메고 온 가방을 바닥에 던져 둔 록이 나가자 남자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하. 반갑다. 나는 이장수.”
“하연수야.”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던 장수가 멈칫하며 나를 내려 봤다.
“하연수?”
그리고선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놈이 좋아하는 화가랑 이름이 똑같네.”
그놈?
이런 내 의문을 알아차린 건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 치던 장수가 내 뒤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슬쩍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정승휼과 동그란 안경테를 쓴 남자가 펜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 문제는 동그란 안경이 아니었다.
정승휼은 나를 보더니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마치 정말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만난 사람처럼 구는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이번에 편입했나 봐. 우리랑 같은 조니까 앞으로 잘 지내 봐.”
장수가 특유의 호탕함으로 하하, 웃으며 안경남과 정승휼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
상대도 하기 싫다는 기가 막힌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도 섞여 있었다.
“편입생이라고?”
정승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편입생이 왜 우리 조에 있는 거지? 난 우리 조에 다른 애 들어오는 거 동의한 적 없는데.”
그렇게 말을 하니 굉장히 민망해져서 고개를 들 수 없……기는 개뿔. 록이의 말이 맞았다. 저런 더러운 성격이라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노려봐 주자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펜션 밖으로 나가 버린다. 뭐야, 그 정도로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아니 왜? 나를 언제 봤다고?
황당한 마음에 그가 나간 문을 한참 노려보는데 장수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꺼냈다.
“재 요즘 심기 안 좋을걸. 그냥 연수 네가 이해해.”
“맞아. 얼마 전에 전시회에 갔다가 어떤 미친 여자한테 된통 걸린 모양이더라고.”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대. 집에 가려는데 길가까지 따라와서 막, 뽀뽀하려고 했다지? 아마?”
어쩌다 저런 남자에게 들이대 가지고선. 이름 모를 여자에게 측은지심이 들려고 할 때였다. 이어지는 다음 말이 아니었다면.
“더 대박인 건 사이다 마시고 취한 척 쇼했다잖아. 얼마나 치가 떨렸으면 길가에 내동댕이치고 왔대.”
자, 잠깐. 사이다?
“진짜 요즘 여자들 무서워. 나중에는 맹물 마시고도 들이대는 거 아닌가 몰라.”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이다 마시고 쇼해서 뽀뽀하려고 들이댔다가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나는 크게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혹시 그 전시회가…… 파랑 나비의 춤을 주제로 한 전시회는 아니……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야 내가 그날 거기 있었으니까.
“혹시.”
장수의 눈에 스윽, 장난기가 새어 나왔다.
“그 진상 너 아니야?”
“…….”
“…….”
“…….”
“농담인데.”
농담이라고 말해도 나는 쉽사리 그를 따라 넉살 좋게 웃을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하는 다음 말 때문에.
“그나저나 그 진상은 누굴까?”
납니다.
“어떻게 사이다를 먹고 취한 척하냐. 그 뻔뻔함 한번 보고 싶다.”
나예요.
“나도.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생겼어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진상. 새삼, 울고 싶어졌다.
해변에는 봄바람이 불어도 추운기가 가시지 않았다. 모두들 후드 점퍼나 얇은 겉옷을 걸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춤을 추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노래는 신나는 댄스 음악.
리듬에 맞춰 위아래로 유연하게 흔드는 여학생들이 한쪽 눈으로 윙크하며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에 답하고 있었다. 비트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고 쾅, 하는 피아노 음반의 마지막 굉음과 함께 장기 자랑이 끝이 났다. 그러나 여기저기 가시지 않은 청춘의 열기 때문인지 쉽사리 펜션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학생회장으로 보이는 사회자가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후! 이 후끈한 열기를 그대로 식히기 아쉽네요. 그럼 게임 하나 할까요?”
“와와! 네!”
열광적인 학생들의 답에 사회자가 씩, 웃었다.
“그럼 즉석 게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각 조에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회자 옆으로 일곱 명이 나왔다. 대부분 수줍게 웃는 여학생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망각한 게 있었다. ‘청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 데려오기!’라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곱 명의 여학생들이 모두 내가 속해 있는 조에 다가왔다. 나는 크게 주변을 돌아봤다. 다른 조보다 확연히 적은 인원수에 짐을 정리하느라 미처 다른 조처럼 추리닝 같은 간편한 복장을 입지 못했다고는 하나…….
“오빠! 저랑 같이 나가요.”
“선배님. 같이 나가 주세요!”
우리 조가 아니더라도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은 많았다. 나도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5초 세겠습니다. 5!”
사회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마음이 급한 건지 이제는 정승휼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놈의 인기는 계절도 안 탄당께.”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록이 부러운 듯 자신의 옷깃을 잡은 여자의 손을 밀어낸 정승휼을 보고 있었다.
록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모여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정승휼에게 쏠렸다. 나라면 그 시선아 부담스러울 텐데. 그는 그런 것 따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자신을 귀찮게 하는 여자들을 냉랭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4! 3!”
사회자가 큰 소리로 숫자를 부르자 단발머리 여자가 정승휼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빠, 빨리 나가요. 시간 얼마 안 남았단 말이에요. 네에?”
양 뺨이 발그레 물든 그녀는 자신의 무기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담한 키에 웃을 땐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로 최대한 귀엽게 어리광을 피우듯 어깨를 양옆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억수로 이쁘다.”
록이 단발머리의 귀여움에 흠뻑 빠져 있을 때였다.
“손대지마.”
정승휼이 옷깃을 잡은 단발머리의 손을 쳐냈다. 그녀는 잠시 멈칫, 하더니 2! 사회자의 목소리에 다시 용기를 냈다.
“앗, 제가 너무 잡아당겼죠? 헷. 그럼 이렇게 살짝만 잡을게요.”
정말로 살짝, 잡으려는 듯 앙증맞게 벌어진 검지와 엄지, 두 손가락은 귓가로 바로 날아드는 차가운 목소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너, 남자한테 환장했어? 왜 못 만져서 안달이야. 당장 저리 안 가?”
단발머리는 눈을 크게 깜박였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네?”
“당장 저리 가라. 내게서 떨어지라고.”
한두 명도 아니고. 과 학생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저런 말을 들은 단발머리는 끝내 울먹거렸다. 큰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지려고 하자 보는 나까지 안쓰러워지려는데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모두들, 쯧쯧 혀를 차거나 고개를 내저었지만 저런 나쁜 놈을 봤냐. 뭐 이런 나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그러니까 왜 승휼이한테 왜 가서는.’
‘나는 저 꼴 날 줄 알았다.’
‘승휼이가 한두 번 저런 것도 아니고 뭐.’
같이 있던 장수와 안경남뿐만 아니라 과 학생들도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해 보였다.
“또 한 명 울어 버렸어야.”
록이가 안타까운 듯 속삭였다. 청춘의 열기로 밤을 잡아먹을 듯 타올랐던 밤은 한순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회자는 카운트를 세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난감한 듯 마이크를 잡은 손을 쥐었다 폈다.
“어…… 음……! 하하, 이번 게임은 시간 내 아무도 오지 않았으니 실패죠? 그럼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 볼까요?”
애써 냉랭한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사회자의 모습에 학생들은 다시 박수를 치며 호응하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구석에서 네모난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선 학생들의 이름이 써진 쪽지를 상자 안에 모두 넣었다.
또 무슨 게임을 하려고 저러지? 싶은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은 사회자가 게임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제가 딱, 네 사람을 뽑을 겁니다. 우선 뽑힌 사람은 이곳에 나와 빼빼로로 게임을 하게 되는데요. 모두 알죠? 뺴빼로의 길이가 가장 짧은 팀에게는 소고기 쏩니다!”
소고기란 말에 흥분한 이들이 손을 높이 들었다.
“남자와 남자가 뽑히면 어떡하나요?”
“물론, 남자와 남자가 될 수 있고 여자와 여자가 될 수 있지만 저는 빼빼로 길이만 볼 겁니다. 자, 그럼 뽑아 볼까요?”
사회자가 검은색 상자에서 쪽지 하나를 뽑았다. 학생들이 두구! 두구! 두구! 두구! 입으로 효과음을 만들어 내자 분위기가 다시 올라가는데 어째, 사회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울 것 같달까? 그는 힘겹게 쪽지에 적힌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정승휼……이군요. 흠흠, 자 앞으로 나와 주세요.”
무심하게 앉아 있던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결국 사회자 옆에 섰다.
“자, 그럼 정승휼과 같은 팀을 하게 될 사람은 누굴까요?”
상자 속에 들어간 사회자의 손이 바빠졌다.
“누굴 또 울리려고 저런다냐. 쯧.”
록이가 혀를 찼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왜 하필 저 사회자는 정승휼을 뽑아 가지고는. 또 다시 냉랭해질 분위기에 차라리 펜션에 가서 잠이나 잘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생각을 바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던 건 내 이름을 부르는 사회자 때문이었다.
“하연수?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하연수 학생?”
사회자는 자신이 본 이름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풉. 워매! 너 부른다야. 안 나가고 머한다냐.”
록이 웃으며 내 팔을 쳤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성격 더러운 아니, 지금 보니 입까지 나쁜 물이 든 정승휼에게 보내기에는 록은 나를 생각보다 많이 예뻐했으니까. 나는 조용히 허공에 떠다니는 공기처럼 숨만 내쉬었다. 내 뒤에 앉은 장수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큭큭,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