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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1)


창틈으로 미약한 바람이 불어왔다. 봄이라기엔 아직 쌀쌀했지만 연기처럼 가느다란 구름 사이로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지는 제법 청량한 날씨였다.
새파란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던 교원은 이내 차의 시동을 끄고 룸미러를 내렸다. 작은 거울에 비친 눈동자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맑게 빛났다.
교원은 자꾸 말라 오는 입술을 가볍게 적시며 머리를 매만졌다. 반듯한 넥타이도 한번 건드려 보고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어 내기도 했다. 아침에 뿌렸건만 그새 희미해진 향수 냄새가 아쉬워 왼쪽 손목에 한 번 더 뿌리려던 찰나 입술 사이로 짧은 웃음이 샜다.
설마, 긴장하고 있는 건가.
어쩔 수 없는 설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따금씩 스스로도 제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
그때 경쾌한 목소리가 교원의 귓전을 울렸다. 막 사옥을 나온 도혁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교원은 싱긋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도혁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하는 것으로 반가운 인사를 대신했고, 도혁 또한 시원한 미소로 답하며 그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뭐한다고 삼십 분이나 일찍 왔어?”
도혁은 사옥 앞의 벤치로 교원을 안내하며 물었다. 벤치에 앉은 교원은 사외의 인테리어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흘리듯 말했다.
“신입이잖냐.”
그러자 도혁이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대기업들이 서로 스카우트하려고 경쟁하는 신입도 있냐? 너 같은 경력자들이 신입인 척하니까 진짜 신입들이 갈 곳이 없는 거야.”
“경쟁은 무슨. 오버하지 마, 인마.”
교원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도혁을 나무랐다. 하지만 교원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게임 업계의 3대 기업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최교원. 그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게임 개발자였다. 스무 살 때부터 판타지 소설가로 활동하였고 첫 번째 소설 『더 프리즌』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대표적인 신세대 장르문학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 게임공학을 전공한 그는 도혁을 포함한 대학 동기들 몇 명과 함께 자신의 소설 『더 프리즌』을 바탕으로 한 모바일 액션 RPG 게임 <프리즈너>를 개발하여 100만이 넘는 다운 횟수를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대기업이 개발하거나 서비스하지 않은, 개인의 자체 개발 게임이 그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작가로만 활동할 때에도 이미 많은 게임 회사에서 스토리 기획이나 시나리오 집필 의뢰를 해 왔는데, 직접 개발한 게임까지 성공하자 프리랜서를 넘어선 정규직 입사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원은 마무리해야 할 소설 작업 때문에 작년에 있던 모든 입사 제의를 거절하고 올 상반기에 취업할 뜻을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상반기 시즌이 다가오자 그간 기회만 엿보고 있던 기업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컨택을 해 온 것이다.
“그래, 얼마나 부르디?”
한참 서로의 근황에 대해 얘기하고 난 뒤, 도혁이 돌연 은밀한 목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연봉 말이야. 괜찮으니까 나한테만 말해 봐. 너처럼 다른 세상에 사는 인간한테는 열등감이나 질투 같은 거 버린 지 오래니까 걱정하지 말고.”
“……진짜 괜찮을 자신 있냐?”
교원이 커피를 살살 돌리며 느긋한 목소리로 묻자 도혁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 자식 이거! 어마어마한가 본데? 너 그래서 여기 온 거지? 나 때문이 아니라. 그치?”
부럽고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요란을 떠는 도혁을 보며 교원은 그저 묘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게임 개발 경력이 있긴 하지만 입사 경험이 없는 교원은 공식적으로는 신입이 맞았지만, 사회적인 유명세와 대기업들의 신경전으로 신입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의 연봉을 제안받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교원이 와 있는 Y소프트가 가장 높은 연봉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Y소프트를 선택한 이유가 연봉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도혁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교원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가끔 우리가 7년 지기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무슨 소리야?”
“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네 속은 진짜 모르겠다, 내가.”
“원래 그런 거야. 나도 가끔은 나를 모르겠으니까.”
특히 지금 같은 경우. 평소 음료를 잘 마시지 못하는 교원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컵을 보며 생각했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
“뭐?”
웬만해서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교원이 깜짝 놀란 얼굴로 도혁을 돌아보았다. 도혁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묻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업계 1위에서 제의가 안 온 것도 아닌데, 굳이 2위인 우리 회사를 선택하고. 요즘처럼 모바일 게임이 대세인 시기에 모바일본부를, 그것도 한창 대박 나고 있는 <라스트던전> 팀을 거절하고, 굳이 온라인본부를 선택해서 그중에서도 가장 하락세인 우리 팀에 들어온다는 게.”
그제야 도혁의 말뜻을 알아들은 교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더군다나 내가 우리 본부장 욕을 그렇게 했는데 말이지. 난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런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뭐?”
“너희 본부장 말이야.”
“넌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어? 야, 저기 봐. 지나간다.”
“……뭐?”
교원이 벌떡 일어서며 되물었다. 일어설 것까진 없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저기 보이지? 혼자 까만 정장 제대로 갖춰 입은 사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타이밍 죽이네. 뭐, 어차피 몇 분 뒤면 볼 테지만.”
“…….”
“딱 보니까 느낌 오지? 오죽하면 별명이 던전이겠냐. 풋.”
투명한 벽 너머로 회사의 로비가 보였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로비를 걸어가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업계의 특성상 게임 회사들은 대부분 복장 규제가 없었다. 특히 Y소프트는 업계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를 추구하여 임원진들도 캐주얼한 복장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녀는 반듯한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머리와 꼿꼿한 허리,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가 그녀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교원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사원들에게 짧은 고갯짓으로 답한 뒤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갔다.
그녀가 로비를 지나쳐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교원은 한곳에 박힌 시선을 떼어 낼 줄 몰랐다.
“야, 최교원!”
한층 커진 도혁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교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쩐지 쓴웃음을 흘렸다.
“너 왜 그래? 본부장 포스에 벌써 기죽은 거야? 뭘 일어서기까지 하고. 아직 네 상사 아니야, 인마.”
예상은 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느낌이 또 달랐다. 로비를 지나치는 그녀를 본 순간, 흉골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차는 것 같았다.
“면접 보고 나서 영 아니다 싶음 다시 생각해 봐. 아직 시간 있다.”
달랐다. 그녀는 정말,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예쁘긴 진짜 예쁘지? 서른셋에 저 얼굴, 저 몸매, 쉽지 않은데 말이야. 성격만 좋았어도 진작 결혼했을 텐데……. 안됐다. 안됐어.”
십 년 전의 그를 보는 것처럼, 그녀는 슬프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본부장님. 시간 됐습니다.”
“네, 알았어요.”
윤슬은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보고 있던 서류를 놓지 않았다. 비서는 그 행동의 뜻을 이해하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서류의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체크한 뒤 결재를 하고 나자 십 분이 지나 있었다. 하지만 비서가 말했던 시간은 준비 시간이었기 때문에 면접까지는 아직 이십 분이 더 남아 있었다.
윤슬은 모든 일에 있어 이렇듯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있었다. 닥쳤을 때 빠듯하게 처리하느라 허둥거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타인에게 빈틈을 보이는 일을 질색했다.
윤슬은 책상을 말끔히 정리한 뒤에야 몸에 힘을 빼고 기지개를 켰다.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목을 돌리던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치자 오른쪽 위가 살짝 접힌 페이지가 나왔다.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
음침하고 쓸쓸한 감옥을, 한순간에 아름답고 따스한 정원으로 만들어 버렸던 너를
그럴 수 있던 너를
우쿨렐레의 선율보다 간지럽고
별빛이 비추는 잔물결보다 눈부셨던 너를
노을처럼 시나브로 스며들었던 너를
그런 너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윤슬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정감이 갔던 부분. 보고 있으면 위안이라도 받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묘하게 설레는 부분.
어느새 평온해진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고 있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윤슬은 서둘러 책을 다시 집어넣었다.
“본부장님. 최교원 씨 도착하셨답니다.”
윤슬은 속으로 ‘벌써?’ 하고 생각했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서가 나간 뒤 정장 재킷을 집어 들던 윤슬이 잠시 손을 멈추었다. 항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딱한 검정 정장을 고수하는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재킷을 입고 싶지 않았다.
윤슬은 자신의 하얀 블라우스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이윽고 정장 재킷에서 손을 떼었다.

온라인본부 사무실은 평소보다 더욱 술렁거렸다. 특히 여사원들은 들뜬 표정으로 수다를 떨거나 화장을 고치는 등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복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슬의 미간에 짧은 주름이 졌다. 들어가서 한마디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윤슬을 발견한 김민아 팀장이 곧바로 사원들에게 주의를 주고 사무실을 나왔다. 사원들은 그제야 윤슬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업무를 재개했다.
“왜들 그렇게 산만한 거야?”
민아와 함께 면접이 잡힌 회의실로 걸어가던 윤슬은, 사무실에서 꽤 멀어진 뒤에야 나지막하게 물었다. 민아는 <가든오브더문>의 개발을 함께했던 윤슬의 입사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왜긴 왜야. 최교원 때문이지. 우리 회사로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그새 쫙 퍼졌더라.”
민아는 윤슬의 얼굴에 띤 불편한 기색을 감지하고 수습하듯 말했다.
“너나 관심 없는 거지, 보통 유명 인사가 아니잖아. 게다가 그냥 유명 인사면 모를까, 젊고 잘생기고 능력까지 있으니. 남자 나이 스물일곱에 이렇게 성공하기가 어디 쉽니? 한 대리는 옛날부터 팬이어서 사인회까지 갔다 온 적 있다는데, 성격도 그렇게 착하고 젠틀하대. 얘, 애 엄마인 나도 설레는데 젊은 여사원들은 오죽하겠니?”
“주책없어.”
“알아, 나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정말 궁금하지 않아? 왜 잘나가는 모바일본부를 거절하고 우리 본부에 와 주려는 걸까?”
“김민아.”
윤슬이 돌연 발을 멈추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네 말대로 제의를 한 건 모바일본부 쪽이지 우리가 아니야. 다시 말하면 우리는 최교원 씨를 필요로 한 적이 없다는 얘기지. 먼저 우리 본부에서 일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한 것도 그쪽이고, 면접을 신청한 것도 그쪽이야. 그러니까 와 준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면접에서도 그 점을 인지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먼저 굽히고 들어오는 상대, 매력 없잖아?”
“그래, 알았어. 이건 내 실수. 네 말이 맞다. 갑을 관계가 뒤집어진 면접이 될 뻔했네.”
민아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수긍하더니, 사소한 잡담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윤슬은 민아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민아에게 한 말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한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참신한 세계관 구성과 완성도 높은 스토리 기획이 무엇보다 중요한 개발본부에서 그 모든 역량을 갖추고 있는 최교원 작가가 탐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뭘 그렇게 봐?”
“……어, 그냥.”
“하긴, 넌 최교원 작가에 대해 잘 모르니까. 이력서로 보니 더 대단하지?”
윤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은 교원의 이력이 아니었다. 이력서에 첨부된 그의 사진이었다.
교원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대중매체에 모습을 드러내는 편도 아니어서 직접 검색해 보거나 관련 행사에 찾아가지 않는 이상 얼굴을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윤슬은 이번 이력서를 통해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