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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정원
2화
1.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2)
그런데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본 것 같은 익숙한 느낌. 처음 보는 사람의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혹시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본 적이 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윤슬은 그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묘한 느낌에 대해 고민했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회의실에 드디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슬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에서 열심히 돌아가던 펜이 뚝 멈추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테이블에서 발소리가 멈추었고 안녕하십니까, 인사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이력서에 박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에서 민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어쩐지, 고개가 쉽게 들리지 않았다.
설마, 긴장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에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간신히 목이 움직였다. 윤슬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의 허리가 보였다. 그는 네이비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앉아요.”
앉으라는 민아의 말에 그가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의 허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넓은 가슴팍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가슴팍에서 목, 목에서 턱, 턱에서 입술…….
마침내 그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온전히 들어왔을 때, 윤슬은 잠시 굳어 버렸다.
눈이 보였다. 아주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그 눈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 쌍꺼풀 없이 매끄럽게 휘어진 눈매, 반듯한 직선의 코, 약간 도톰하면서 붉은 기운이 감도는 입술. 그는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사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만, 역시나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주 잠시지만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만 눈에 담고 있었다. 교원이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면, 윤슬은 언제까지고 그를 바라만 보았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도 작게나마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교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보일 듯 말 듯 어렴풋한 미소였다.
면접은 민아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윤슬은 웬만해선 말을 잘 꺼내지 않았다. 인사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었지만 그녀는 보통 면접자가 다른 면접관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곤 했다.
평소 과묵한 편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사실 고질병이 있었다.
남자와 말을 섞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병.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한 기획자의 특성상 갖은 노력으로 극복하긴 했지만 한때는 남자와 단둘이 있을 때는 아예 말을 하지 못해서,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는 남자와 대화를 잘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친남매처럼 지냈던 우현만 제외하고.
그런데, 민아와 한창 대화를 주고받던 교원이 돌연 윤슬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본부장님은, 제게 궁금한 게 없으신가요?”
윤슬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질문을 하면 했지, 한 번도 먼저 받아 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지목을 당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교원을 바라보던 윤슬은 짧은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수많은 회사들 중에서 우리 회사를, 그것도 온라인본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상했던 질문일 것이었다. 윤슬과 Y소프트 사람들뿐만 아니라, 게임 업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교원은, 쉽게 대답하던 다른 질문들과 달리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혀 당혹스럽거나 막막한 눈빛이 아닌, 그윽한 눈빛으로. 마치 오래 알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최교원 씨.”
그 눈빛에 오히려 당혹스러워질 것 같았던 윤슬이, 재촉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좋아합니다.”
“……네?”
의아한 듯 되물은 것은 옆에 있던 민아였다. 윤슬은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그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교원은 여전히 윤슬에게 시선을 박아 둔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의 정원을, 좋아합니다.”
미동도 없던 윤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달의 정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녀가 만든 게임 <가든오브더문>을 굳이 한글로 풀이하여 ‘달의 정원’이라 부르는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다.
“제 인생을 바꾸어 준 것이라서요.”
그 말은 많은 면접자들이 Y소프트 게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 위해 하던 말이었다. 다양한 에피소드, 다양한 이유를 들먹이며.
교원 역시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는 민아의 말에 그저 달의 정원을 통해서 게임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형식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윤슬은 그의 말이 있는 그대로 와 닿지 않았다. 그가 인생을 얘기할 때의 그 느낌, 그 눈동자, 그 표정, 그 말투,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
음침하고 쓸쓸한 감옥을, 한순간에 아름답고 따스한 정원으로 만들어 버렸던 너를
그럴 수 있던 너를
우쿨렐레의 선율보다 간지럽고
별빛이 비추는 잔물결보다 눈부셨던 너를
노을처럼 시나브로 스며들었던 너를
그런 너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문장들이 떠올랐다.
교원의 장편 소설 『더 프리즌』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그 문장들이.
2. 푸른 마음 위로 네가 쏟아진다(1)
첫 출근. 가만히 있어도 어깨가 빳빳하게 굳고 허리가 곧추서는 날. 아무리 스카우트라지만 교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교원은 긴장으로 굳은 몸을 녹이려고 따스한 햇볕에 몸을 내맡긴 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강한 햇빛과 맞물려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후.”
교원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대체 이 회사가 뭐라고. 자꾸 최교원답지 않게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일까.
“최교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근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도혁이 반가운 기색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축하한다!”
어느새 다가온 도혁이 교원의 등을 가볍게 치며 소리쳤다.
“고맙다.”
“고맙다가 뭐냐? 입사 선배한테! 선배님이라고 불러!”
가끔은 귀찮게도 느껴지던 도혁의 요란스러운 성격이 오늘은 꽤나 달가웠다. 덕분에 정말로 입사했다는 것이 실감 났을 뿐만 아니라 긴장도 다소 풀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담배 한 대를 더 피우며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나와!”
어디선가 고막을 찌르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교원과 도혁은 동시에 회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옥 안과 밖에 몰려 있었다. 얼핏 보니 흐트러진 행색의 중년 남자가 회사 로비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은 성격의 도혁은 당장 교원을 끌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가던 도중 도혁이 질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대박! 저 사람 김 과장이잖아!”
“김 과장이 누군데?”
교원이 궁금한 듯 물었으나 도혁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얼른 회전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교원은 도혁을 따라 의아한 시선을 옮겼다가 그 자리에 발이 붙어 버렸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언제 한번 일 날 줄 알았다, 내가.”
도혁이 심각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발을 굴렀지만, 이번엔 교원이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본부장 나와! 이윤슬 본부장 나오라고!”
술에 취해 한껏 붉어진 얼굴로 연신 고성을 내고 있는 김 과장은 온라인본부 내 <라이징썬> 팀의 프로그램팀 과장이었다.
또각또각. 정갈한 구두 소리가 제 앞에서 멈추었지만, 김 과장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보안팀 직원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그녀를 보지 못한 듯했다. 그가 한 손에 쥐고 있는 소주병 안의 액체가 위험하게 출렁거렸다.
하지만 김 과장은 아랑곳 않고 직원들을 떼어 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이거 안 놔? 나 이 회사 직원이야! 창립 때부터 이십 년 가까이 일한 직원이라고! 근데 감히 누굴 내쫓아! 이 회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컸는데! 누가 일으켰는데! 쥐뿔 가진 거 하나 없을 때부터 죽어라 목숨 바쳐 일해 줬더니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다 버려?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이윤슬 나오라고 해! 당장 나오라고!”
그때 김 과장을 끌어내려던 직원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윤슬이 한쪽 손을 들어 그만두라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었다.
자신을 옥죄어 오던 힘이 사라진 것을 느낀 김 과장이 그제야 몸부림을 멈추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털며 앞을 보았다. 윤슬을 발견한 그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너, 너!”
김 과장이 이를 악물고 표독스러운 얼굴로 윤슬을 향해 달려가려 하자 직원들이 다시 그를 붙잡았다. 교원의 발도 멈칫거렸다. 보안팀이 서두르지 않았다면 자칫 그의 발이 먼저 나갈 뻔했다.
그러나 김 과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가 뭔데 날 함부로 잘라! 네까짓 게 뭔데! 능력도 없는 게 부모 잘 만나 빽으로 본부장 단 주제에! 그저 제 성에 안 차면 직원들 목부터 베고! 남자가 싫으면 여자만 있는 다른 회사를 찾아가든가! 네가 뭔데 이 회사에 죽치고 앉아서 능력 있는 남자들을 죄다 내쫓는 건데? 이거 엄연히 부당 해고야! 이유 없는 부당 해고라고!”
김 과장의 말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흘긋거리며 윤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윤슬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김 과장을 지켜보더니 비릿한 실소를 뱉으며 말했다.
“이유도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건, 당신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이겠죠.”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당신이 재직하던 이십 년 동안, 아무 이유 없이 성적 모욕을 당했던 수많은 여직원들.”
“누가 그딴 헛소문을 퍼뜨려? 증거 있어? 있냐고! 이제 부당 해고에 명예훼손까지 해? 이윤슬 너! 내가 가만둘 거 같아?”
당황한 김 과장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안면 근육까지 발발 떨며 소리쳤다. 하지만 윤슬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더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소름 끼치도록 날이 선 마찰 소리와 몇몇 여자들의 짤막한 비명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거기 서! 서란 말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닥에는 투명한 액체와 깨진 소주병의 파편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윤슬의 손등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김 과장이 충동적으로 바닥에 소주병을 내던졌고, 그 파편이 튀면서 윤슬의 손을 스친 것이었다.
놀라다 못해 화가 난 교원이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디딘 순간, 도혁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자못 진지한 그의 표정이, 지금 뭘 하려는 거냐고,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치워.”
그때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고 조용하지만, 모두를 숨죽이게 만드는 시린 목소리가.
그녀는 손등에서 피가 떨어지는데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저 뜨겁게 솟아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는 듯한 붉은 눈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의 파편과 김 과장을 천천히 훑더니, 글자마다 강한 무게를 실은 한마디를 또박또박 뱉었다.
“……당장, 같이, 치워.”
교원이 따로 손쓸 새도 없이 김 과장은 보안팀 손에 끌려 나갔고, 청소부들이 바닥에 흥건한 술과 소주병을 치웠다. 직원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며 로비를 벗어났다. 도혁도 팔꿈치로 교원을 치며 그만 가자는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교원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야, 최교원.”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손끝에 몹시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마치 제 손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자니까.”
도혁이 속삭이듯 말했지만 교원은 듣지 않았다.
그녀가, 혼자 남아 있었다.
몇몇 직원들이 괜찮으냐 물으며 그녀를 챙겼지만, 그녀는 귀찮은 듯 직원들을 물리고 자진해서 혼자가 되었다.
2화
1.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2)
그런데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본 것 같은 익숙한 느낌. 처음 보는 사람의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혹시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본 적이 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윤슬은 그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묘한 느낌에 대해 고민했다.
바로 그때였다.
똑똑. 회의실에 드디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윤슬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에서 열심히 돌아가던 펜이 뚝 멈추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테이블에서 발소리가 멈추었고 안녕하십니까, 인사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이력서에 박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에서 민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어쩐지, 고개가 쉽게 들리지 않았다.
설마, 긴장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에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간신히 목이 움직였다. 윤슬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의 허리가 보였다. 그는 네이비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앉아요.”
앉으라는 민아의 말에 그가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의 허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넓은 가슴팍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가슴팍에서 목, 목에서 턱, 턱에서 입술…….
마침내 그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온전히 들어왔을 때, 윤슬은 잠시 굳어 버렸다.
눈이 보였다. 아주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그 눈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 쌍꺼풀 없이 매끄럽게 휘어진 눈매, 반듯한 직선의 코, 약간 도톰하면서 붉은 기운이 감도는 입술. 그는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사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만, 역시나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주 잠시지만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만 눈에 담고 있었다. 교원이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면, 윤슬은 언제까지고 그를 바라만 보았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도 작게나마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교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보일 듯 말 듯 어렴풋한 미소였다.
면접은 민아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윤슬은 웬만해선 말을 잘 꺼내지 않았다. 인사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었지만 그녀는 보통 면접자가 다른 면접관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곤 했다.
평소 과묵한 편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사실 고질병이 있었다.
남자와 말을 섞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병.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한 기획자의 특성상 갖은 노력으로 극복하긴 했지만 한때는 남자와 단둘이 있을 때는 아예 말을 하지 못해서,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는 남자와 대화를 잘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친남매처럼 지냈던 우현만 제외하고.
그런데, 민아와 한창 대화를 주고받던 교원이 돌연 윤슬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본부장님은, 제게 궁금한 게 없으신가요?”
윤슬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질문을 하면 했지, 한 번도 먼저 받아 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지목을 당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교원을 바라보던 윤슬은 짧은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수많은 회사들 중에서 우리 회사를, 그것도 온라인본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상했던 질문일 것이었다. 윤슬과 Y소프트 사람들뿐만 아니라, 게임 업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교원은, 쉽게 대답하던 다른 질문들과 달리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혀 당혹스럽거나 막막한 눈빛이 아닌, 그윽한 눈빛으로. 마치 오래 알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최교원 씨.”
그 눈빛에 오히려 당혹스러워질 것 같았던 윤슬이, 재촉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좋아합니다.”
“……네?”
의아한 듯 되물은 것은 옆에 있던 민아였다. 윤슬은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그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교원은 여전히 윤슬에게 시선을 박아 둔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의 정원을, 좋아합니다.”
미동도 없던 윤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달의 정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녀가 만든 게임 <가든오브더문>을 굳이 한글로 풀이하여 ‘달의 정원’이라 부르는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다.
“제 인생을 바꾸어 준 것이라서요.”
그 말은 많은 면접자들이 Y소프트 게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 위해 하던 말이었다. 다양한 에피소드, 다양한 이유를 들먹이며.
교원 역시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는 민아의 말에 그저 달의 정원을 통해서 게임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형식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윤슬은 그의 말이 있는 그대로 와 닿지 않았다. 그가 인생을 얘기할 때의 그 느낌, 그 눈동자, 그 표정, 그 말투,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다
음침하고 쓸쓸한 감옥을, 한순간에 아름답고 따스한 정원으로 만들어 버렸던 너를
그럴 수 있던 너를
우쿨렐레의 선율보다 간지럽고
별빛이 비추는 잔물결보다 눈부셨던 너를
노을처럼 시나브로 스며들었던 너를
그런 너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문장들이 떠올랐다.
교원의 장편 소설 『더 프리즌』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그 문장들이.
2. 푸른 마음 위로 네가 쏟아진다(1)
첫 출근. 가만히 있어도 어깨가 빳빳하게 굳고 허리가 곧추서는 날. 아무리 스카우트라지만 교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교원은 긴장으로 굳은 몸을 녹이려고 따스한 햇볕에 몸을 내맡긴 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강한 햇빛과 맞물려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후.”
교원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대체 이 회사가 뭐라고. 자꾸 최교원답지 않게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일까.
“최교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근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도혁이 반가운 기색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축하한다!”
어느새 다가온 도혁이 교원의 등을 가볍게 치며 소리쳤다.
“고맙다.”
“고맙다가 뭐냐? 입사 선배한테! 선배님이라고 불러!”
가끔은 귀찮게도 느껴지던 도혁의 요란스러운 성격이 오늘은 꽤나 달가웠다. 덕분에 정말로 입사했다는 것이 실감 났을 뿐만 아니라 긴장도 다소 풀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담배 한 대를 더 피우며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나와!”
어디선가 고막을 찌르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교원과 도혁은 동시에 회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옥 안과 밖에 몰려 있었다. 얼핏 보니 흐트러진 행색의 중년 남자가 회사 로비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은 성격의 도혁은 당장 교원을 끌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가던 도중 도혁이 질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대박! 저 사람 김 과장이잖아!”
“김 과장이 누군데?”
교원이 궁금한 듯 물었으나 도혁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얼른 회전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교원은 도혁을 따라 의아한 시선을 옮겼다가 그 자리에 발이 붙어 버렸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언제 한번 일 날 줄 알았다, 내가.”
도혁이 심각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발을 굴렀지만, 이번엔 교원이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본부장 나와! 이윤슬 본부장 나오라고!”
술에 취해 한껏 붉어진 얼굴로 연신 고성을 내고 있는 김 과장은 온라인본부 내 <라이징썬> 팀의 프로그램팀 과장이었다.
또각또각. 정갈한 구두 소리가 제 앞에서 멈추었지만, 김 과장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보안팀 직원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그녀를 보지 못한 듯했다. 그가 한 손에 쥐고 있는 소주병 안의 액체가 위험하게 출렁거렸다.
하지만 김 과장은 아랑곳 않고 직원들을 떼어 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이거 안 놔? 나 이 회사 직원이야! 창립 때부터 이십 년 가까이 일한 직원이라고! 근데 감히 누굴 내쫓아! 이 회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컸는데! 누가 일으켰는데! 쥐뿔 가진 거 하나 없을 때부터 죽어라 목숨 바쳐 일해 줬더니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다 버려?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이윤슬 나오라고 해! 당장 나오라고!”
그때 김 과장을 끌어내려던 직원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윤슬이 한쪽 손을 들어 그만두라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었다.
자신을 옥죄어 오던 힘이 사라진 것을 느낀 김 과장이 그제야 몸부림을 멈추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털며 앞을 보았다. 윤슬을 발견한 그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너, 너!”
김 과장이 이를 악물고 표독스러운 얼굴로 윤슬을 향해 달려가려 하자 직원들이 다시 그를 붙잡았다. 교원의 발도 멈칫거렸다. 보안팀이 서두르지 않았다면 자칫 그의 발이 먼저 나갈 뻔했다.
그러나 김 과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가 뭔데 날 함부로 잘라! 네까짓 게 뭔데! 능력도 없는 게 부모 잘 만나 빽으로 본부장 단 주제에! 그저 제 성에 안 차면 직원들 목부터 베고! 남자가 싫으면 여자만 있는 다른 회사를 찾아가든가! 네가 뭔데 이 회사에 죽치고 앉아서 능력 있는 남자들을 죄다 내쫓는 건데? 이거 엄연히 부당 해고야! 이유 없는 부당 해고라고!”
김 과장의 말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흘긋거리며 윤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윤슬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김 과장을 지켜보더니 비릿한 실소를 뱉으며 말했다.
“이유도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건, 당신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이겠죠.”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당신이 재직하던 이십 년 동안, 아무 이유 없이 성적 모욕을 당했던 수많은 여직원들.”
“누가 그딴 헛소문을 퍼뜨려? 증거 있어? 있냐고! 이제 부당 해고에 명예훼손까지 해? 이윤슬 너! 내가 가만둘 거 같아?”
당황한 김 과장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안면 근육까지 발발 떨며 소리쳤다. 하지만 윤슬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더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소름 끼치도록 날이 선 마찰 소리와 몇몇 여자들의 짤막한 비명 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거기 서! 서란 말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닥에는 투명한 액체와 깨진 소주병의 파편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윤슬의 손등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김 과장이 충동적으로 바닥에 소주병을 내던졌고, 그 파편이 튀면서 윤슬의 손을 스친 것이었다.
놀라다 못해 화가 난 교원이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디딘 순간, 도혁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자못 진지한 그의 표정이, 지금 뭘 하려는 거냐고,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치워.”
그때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고 조용하지만, 모두를 숨죽이게 만드는 시린 목소리가.
그녀는 손등에서 피가 떨어지는데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저 뜨겁게 솟아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는 듯한 붉은 눈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의 파편과 김 과장을 천천히 훑더니, 글자마다 강한 무게를 실은 한마디를 또박또박 뱉었다.
“……당장, 같이, 치워.”
교원이 따로 손쓸 새도 없이 김 과장은 보안팀 손에 끌려 나갔고, 청소부들이 바닥에 흥건한 술과 소주병을 치웠다. 직원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며 로비를 벗어났다. 도혁도 팔꿈치로 교원을 치며 그만 가자는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교원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야, 최교원.”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손끝에 몹시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마치 제 손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자니까.”
도혁이 속삭이듯 말했지만 교원은 듣지 않았다.
그녀가, 혼자 남아 있었다.
몇몇 직원들이 괜찮으냐 물으며 그녀를 챙겼지만, 그녀는 귀찮은 듯 직원들을 물리고 자진해서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