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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1화






의식이…….

“아아아악!”

“사, 살려 줘!”

심연(深淵) 속을 부유한다.

“웬 놈들이냐!”
쉬이익!
채앵! 챙!

눈을 뜰 수가 없다.

“악적 초유벽을 잡아라!”
“공자,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가슴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갈증이…….

“흐흐흐, 드디어 잡았구나!”
“오라버니! 아악!”

온몸을 태우고…….

“많이 기다렸지? 큭큭큭!”


혼백(魂魄)을 불살라 버렸다.

* * *

[초유벽!]
화아아아악!
순간, 세상이 암흑으로 변했다.
흐릿한 시야로 마치 유령처럼 희미한 형체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하던 정신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형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를 알 수 없던 형체는 회칠을 한 듯 창백한 얼굴에, 입은 귀밑까지 찢어진 채 치켜 올라가 있었으며, 무저갱(無底坑)처럼 깊게 침잠된 두 눈은 마치 혼백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희미하던 기억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죽은 것인가…….’
[초유벽!]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눈앞의 형체를 바라보았다.
[억울한가?]
속 빈 고목이 바람에 스쳐 우는 듯한 소리에 나는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억울했다.
죽음도, 죄인이라는 굴레도…….
[너의 죽음이 그릇되다 생각하는가?]
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릇되다!’
짓지도 않은 죄로 인해 가문이 멸문당했다.
당연히 그릇되고, 또한 부당했다.
순간, 형체가 일렁이며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깊고 어두운 두 눈에서 한 줄기 섬광을 피워 냈다.
[나는 혼주(魂主). 너에게 복수의 기회를 줄 저승과 이승의 틈새를 관장하는 야차(夜叉)다.]
스스로를 혼주라 소개한 존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암흑의 공간이 크게 떨렸다.
야차란 선(善)과 악(惡)의 양면성을 모두 가진 존재였다.
음험하고 교활한 악귀(惡鬼)이기도 했으며, 불법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때로는 포악하고, 때로는 달콤한 말로 유혹해 해악을 끼치다가 더러는 인간을 도와주기도 하는, 두 얼굴을 가진 존재.
나는 스스로를 혼주라 밝힌 존재의 말 중 복수라는 부분에 집중했다.
[너는 복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복수!
누이동생의 목을 자르며 비릿한 미소를 짓던 진대치의 가증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놈!’
나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놈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었다.
또한, 가족과 나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수 있었다.
[좋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지금부터 너에게 봉혼단시(封魂斷時)의 술법을 펼쳐 새로운 삶을 줄 것이다. 대신 그 대가로 너는 유계를 빠져나간 마귀(魔鬼)들을 잡아와야 한다!]
계약의 성립을 선언하는 혼주의 목소리는 마치 영혼을 옭아매는 사슬과도 같이 나를 휘감았다.
우르르릉!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암흑의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봉혼단시의 술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혼(魂)을 봉인할 그릇과 백(魄)이 머물 육신이다. 혼을 그릇에 봉인함으로써 저승사자의 이목을 속이고, 백을 통해 육신을 움직여 너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백이 들어갈 육신은 너와 한날한시에 태어나 같은 날 죽음을 맞이한 자라야 하며, 혼이 봉인될 그릇은 죽은 너를 잊지 않고 사랑해 줄 사람이라야 한다. 마침 너에겐 둘 다 있구나!]
혼주의 스산한 눈에서 다시 한 번 묵빛 섬광이 일었다.
‘서문유향!’
그녀라면 절대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릇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너의 혼은 봉인에서 풀리게 되어 사자가 혼백을 거두어 갈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남겨진 이들 중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에.
사방이 웅웅거리며 귀곡성을 토해 냈다.
구토가 일어날 듯 현기증이 밀려왔다.


태초의 혼돈에서 태어난 암흑의 주인이 명하노라!
염(念)을 제물로 삼아 넋을 봉인하리니.
생명의 시계여, 흐름을 멈추거라!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고 모든 공간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리더니,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쉬이이이이익!
미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의 풍경들이 뒤로 밀려 나갔다.
온갖 빛줄기들이 섬전처럼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혼주라는 존재의 마지막 음성이 송곳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너에게 세 가지 힘을 줄 것이다. 첫째, 불사의 육신. 둘째, 암혼기(暗魂氣). 셋째, 명륜안(明侖眼)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반드시 명심해라! 누군가가 너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면 일각이 지나 혼백이 흩어지게 된다. 만일 네가 초유벽이란 사실을 들키게 되거든 반드시 일각 안에 네 정체를 알아차린 자를 없애도록 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의 복수의 기회는 부질없이 사라질 것이다!]
화악!
눈부신 섬광에 사방이 온통 빛으로 뒤덮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1장 담천(1)


“후으읍.”
막힌 기도가 뚫리며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초유벽은 쇳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살아났구나! 여보! 천이가 눈을 떴소!”
처음 보는 호목(虎目)의 중년인이 호들갑을 떨며 방 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우당탕탕!
중년인의 외침에 곧 문이 열리며 여러 사람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아직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이해를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침상을 향해 다가왔다.
“처, 천아! 아이고, 내 새끼! 흑흑.”
침상 앞에 다다른 중년 여인이 갑자기 초유벽의 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초유벽은 이 모든 상황이 너무도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자들은 누구고 왜 이토록 호들갑을 떠는 것인가.
이 여인은 왜 자신을 끌어안고 우는 것인가.
알 수 없는 기억들과 감정들로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그때, 깡마른 노인이 차분한 태도로 다가와 초유벽의 손목을 잡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어떻습니까? 이제 괜찮아진 겁니까?”
가장 먼저 눈에 띈 호목의 중년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노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노인 역시도 연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신음성만을 토해 낼 뿐이었다.
사실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인은 근방에서 가장 뛰어나기로 소문난 화종도라는 의원이었다.
담씨세가의 장남이 주화입마로 쓰러졌단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게 일각 전.
하지만 환자의 상태는 자신의 능력으로도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화종도는 무거운 안색으로 환자의 죽음을 선고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호목의 중년인, 담일명이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다며 잠시 시간을 달라 말했고, 다른 이들이 방을 빠져나오는 순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한데 화종도가 본 현재 환자의 상태는 참으로 묘했다.
분명 의식이 있긴 한데, 맥도 약하고 체온이 너무 낮았다.
한마디로 시체와 다름없을 정도로 생기가 없는 것이다.
그로서도 이런 환자는 오십 년이 넘는 의원 생활 동안 처음 겪어 보는 경우였다.
“여, 여기는…….”
그때, 초유벽이 흔들리는 의식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 빛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눈이 부셨고, 시야에 맺히는 상들이 명확하지 않았다.
“천아, 정신이 드느냐!”
“천아, 흑흑…… 살았구나, 천아!”
담일명과 그 부인인 듯한 중년 여인이 초유벽의 손을 꼭 잡으며 기뻐했다.
‘그래, 나는 담천이라는 자의 몸으로 들어왔구나.’
그제야 서서히 기억들이 하나둘 정리되었다.
혼주, 봉혼단시, 백을 담을 육신과 혼을 담을 그릇…….
현재 자신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육신의 이름과 군데군데 이가 빠진 듯한 그동안의 기억들.
눈앞에 있는 이들은 담천의 부모였고, 그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은 담천의 정혼녀인 천혜린이었다.
담씨세가라면 무벌(武閥)을 지배하는 열 가문, 무벌십주(武閥十柱) 중 하나였다.
무벌은 현 강호무림의 최대 세력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세가들이 구대문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합 세력이었으나, 현재의 벌주인 천무신군(天武神君) 서문광천이 집권하면서 압도적인 무공과 인덕을 바탕으로 하나의 단체로 통합된 상태였다.
초유벽이 죽기 전, 초씨세가도 무벌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초유벽의 원수인 진대치의 광동진가 역시 무벌의 일원이었다.
‘이제부터는 초유벽이 아니라 담천인가…….’
“흐음…….”
그때, 화종도가 주름 가득한 얼굴을 들이대며 초유벽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동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일평생 처음 접해 보는 기이한 상황이었으나 화종도로서는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양쪽 눈을 확인한 화종도가 초유벽의 상의를 풀어헤친 후 심장 부분에 손을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응?”
화종도의 시선이 머문 곳은 초유벽의 왼쪽 가슴이었다.
“이게 뭐지? 이상하네. 아까는 보지 못했는데……. 흠, 피가 뭉친 모양치고는 괴이하군.”
초유벽의 심장 부근에는 일곱 개의 날개를 가진 핏빛 소용돌이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분명 죽기 전에는 보지 못한 문양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화종도는 아마도 피멍이 맺힌 것이라 여기고는 곧 관심을 접었다.
이후 잠시 동안 심장박동을 확인한 화종도가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리며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심장이 뛰는 것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괴사로고.’
고민하는 화종도의 모습에 담일명과 아내 설주란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애를 태웠다.
그사이, 의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초유벽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조금은 초유벽과 담천의 기억이 혼재하며 두통이 몰려왔다.
기억의 단편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지금 이곳은 담천의 방.
한쪽에 걸린 검과 책상 위로 한가득 쌓여 있는 무공 서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