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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2화
1장 담천(2)
담천이란 인물은 광인처럼 무공에 몰두했다.
몰락해 가는 가문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다.
담가는 무벌 최고회의에서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무벌십주에 속해 있었으나, 최근 들어 급격히 성세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담천의 아버지인 담일명의 대에서부터 실력 있는 고수들을 배출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담천은 고수가 되기 위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피나는 노력을 쏟았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의원이나 가족들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결국 주화입마에 빠진 모양이었다.
초유벽은 머릿속에 혼재된 기억들을 정리하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크윽…….”
주화입마의 여파인지 온몸이 끊어질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하니 당분간 무리하지 말게나.”
화종도가 급히 초유벽을 말린 후 담일명에게 다가갔다.
“당장에는 정신이 없을 겁니다. 일단은 아직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듯하니, 좀 쉬게 놔두어야 합니다.”
생기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약한 것으로 보아 몸에 무슨 문제가 있음이 분명한데, 화종도로서는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일단 몸을 보하는 약재들을 처방해 준 후 집으로 돌아가 책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천이는 앞으로 괜찮겠습니까?”
방에서 나온 담일명이 심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화종도의 표정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글쎄, 나로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분명 의식은 멀쩡한 듯한데 생기가 거의 잡히지 않으니…….”
화종도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당분간은 상세를 좀 더 두고 봐야 할 듯하니, 일단 내가 준 약을 하루에 두 번씩 달여 먹이고, 식사는 죽을 쒀서 주시오. 내가 내일 또 와서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겠소.”
화종도는 미리 준비한 두 첩의 약재를 내준 후 담씨세가를 떠났다.
“여보, 화 의원께서는 뭐라 하시던가요? 앞으로 천이는 괜찮겠지요?”
설주란이 근심 어린 눈으로 담일명에게 물었다.
“당분간 큰 문제는 없다 하니, 이제 당신도 들어가 쉬구려.”
어젯밤부터 한잠도 못 자고 담천의 곁을 지킨 설주란이었다.
담일명은 일단 설주란을 쉬게 해 주기 위해 거짓말을 조금 섞어 안심을 시켰다.
“그래도 한 명은 남아서 천이를 간호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님, 제가 곁에 남아 있을게요.”
담천의 정혼녀, 천혜린이 나섰다.
설주란이 애잔한 눈으로 천혜린을 바라보았다.
“하긴, 너야말로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래, 너희 둘이 할 이야기도 많을 테니 남아서 천이를 돌보도록 해라.”
천혜린은 참으로 마음에 드는 며느릿감이었다.
사실, 자신의 아들이지만 담천은 무척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아이였다.
오로지 관심을 두는 것이라곤 무공뿐이었고,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는 것조차 꺼려했다.
한마디로 여인들에게는 최악의 사내였던 것이다.
한데, 천혜린처럼 어여쁜 아이가 담천과 인연이 닿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천혜린을 만나고부터 담천은 조금씩 변해 갔다.
말이 없는 것은 이전과 같았지만, 날카롭던 성격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천생연분을 만난다는 것이 바로 담천과 천혜린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하니, 담천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천혜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을 헤아린 담일명과 설주란은 흐뭇한 표정으로 천혜린을 다독여 주고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초유벽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천혜린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천혜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한 송이 백목련과도 같은 우아함과 기품을 지닌 여인이랄까.
그녀는 담천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와 앉았다.
“다시 살아난 기분이 어떤가요?”
천혜린이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순간, 초유벽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정혼자가 죽었다 살아났는데도 그녀의 태도는 너무도 담담했고, 목소리조차 무미건조했다.
“놀랄 것 없어요, 초유벽.”
“……!”
순간, 심장이 튀어 나올 것처럼 놀란 초유벽은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어떻게 이 여인이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인가!’
난데없는 상황에 초유벽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다른 사람이 초유벽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경우, 일각 안에 혼백이 흩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만일 일각 안에 이 여인을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의 복수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 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런 속내를 파악한 듯 천혜린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당신을 도울 혼주의 사령(使令)입니다. 그분의 명을 따르는 권속(眷屬) 중 하나이지요.”
초유벽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긴장한 표정으로 천혜린을 노려보았다.
“하긴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사실 당신이 지금 들어가 있는 담천이란 사내는 주화입마로 죽은 게 아니에요.”
담천의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올릴 수 없던 초유벽으로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천혜린이 의문을 풀어 주겠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는 불쌍한 사람이에요. 가문의 몰락을 막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려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무공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요. 하지만 결국 본인의 자질이 평범한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말았어요.”
담일명에게는 자식이 오직 담천밖에 없었다.
게다가 담일명 역시 형제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가문의 구성원 자체가 담천의 대에 이르러서는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방계 혈족과 가신들을 모두 합해도 채 이백이 넘지 않았으니, 무벌십주에 들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규모인 것이다.
때문에 사방에서 담씨세가를 압박했다.
신흥 세가들은 담씨세가를 끌어내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도발해 왔으며, 기존의 아홉 가문은 담씨세가의 세력을 흡수하거나 자신들을 추종하는 가문을 대신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스스로 물러나길 종용했다.
아버지 담일명은 유약하고 온화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가족에겐 더없이 좋은 가장이자 아버지였으나, 가문을 이끌 수장으로서는 그리 유능하다 할 수 없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부족함이 많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니 이대 독자인 담천이 받는 중압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문의 성쇠(盛衰)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생각했다.
한데 결국 자신은 자질이 너무 모자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말인즉, 담천의 대에서 그간의 영화와 명성을 잃게 될 것이란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했다.
담천의 그런 마음과 좌절을 잘 알고 있던 담일명과 설주란은 가문보다 아들을 더 걱정했다.
가문의 쇄락을 막는 것은 어차피 힘든 일이었기에 차라리 아들만이라도 가문의 후계자라는 굴레를 벗고, 그저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담천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대에서 가문이 그 빛을 잃는다면 저승에서 어떻게 조상들을 뵙는단 말인가.
결국 담천은 무공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결심한 후 사술과 방술, 주술 등을 파고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타난 것이 천혜린이었다.
“내가 그에게 봉혼단시에 대해 알려 주었지요. 물론 혼주께서 명하신 일이에요.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지금 담천은 죽고 당신이 이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이죠.”
담천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혜린의 제안을 받아들여 혼주와 계약했다.
자신이 죽음으로 인해 가문을 살릴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에, 결국 담천은 죽고 그 자리를 초유벽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천혜린의 설명을 듣고 난 초유벽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삼 년 전에 미리 담천과 계약했다는 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가.
대체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어떻게 알고 봉혼단시의 술법을 준비했다는 말인가.
또 하나, 이 모든 것에는 초유벽이 그 계약을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초유벽이 봉혼단시의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가문이 멸문하고,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채 처참한 죽음을 당해 원한이 뼈에 사무치고,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상황!
‘혹시……!’
초유벽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혼주라는 자가 꾸민 일이라면!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말아요. 당신은 인간의 개념으로 신을 이해하려 하는군요. 인간은 시간에 속박된 존재이지만, 그분께서는 시간을 지배하시는 존재입니다. 그분은 모든 시간에 존재하고 시간과 시간을 오갈 수 있지요.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보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에요!”
초유벽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천혜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혼주라는 존재는 인간이 화선지 위의 그림을 보듯 모든 시간과 사건을 관조(觀照)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술법의 이름이 봉혼단시(封魂斷時)인 이유도 인간의 입장에선 시간을 멈추는 것이지만 그분에겐 시간을 끊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죠.”
서로 다른 시간이지만 신에겐 동일한 차원의 파편들일 뿐.
결국 혼주는 초유벽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미리 담천과 계약을 맺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째서 삼 년이란 시간의 차이를 만든 것이지?”
초유벽이 죽기 전에 담천과 계약하면 되는 일을 왜 복잡하게 삼 년 전의 담천과 계약을 한 후 초유벽이 죽을 날을 기다린단 말인가.
담천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것도 삼 년씩이나?
아니면 천혜린을 담천의 정혼자로 만들어 나중에 초유벽을 돕기 위해?
모두 다 너무나도 억지스러운 이야기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어요. 일단 당신은 혼을 봉인할 그릇인 서문유향이 존재했지요. 하지만 한날한시에 태어나 한날한시에 죽은 육신은 없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술법이 완성된 거지?”
“제가 육신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인간의 개념으로 봤을 때는 없는 것이 맞아요. 하지만 신의 개념에선 다르지요.”
초유벽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대로라면 담천은 삼 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운명이었지요. 그랬다면 당신은 봉혼단시의 술법을 펼칠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관조하실 수 있는 혼주께서는 담천이 죽기 직전, 저를 보내 계약을 제안하셨어요. 당연히 어차피 죽을 작정이었던 담천은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말에 계약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당신에게 계약을 제안할 때 저는 삼 년 전의 담천에게 계약을 제안한 것이지요.”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당신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이 신의 영역을 함부로 재단(裁斷)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요.”
초유벽은 일단 흥분을 가라앉혔다.
천혜린의 복잡한 이야기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대략 그녀가 설명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의문점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왜 하필 나인가?”
세상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어찌 초유벽 하나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