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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3화
1장 담천(3)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의미 없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이들 중에 오로지 초유벽 하나만이 조건을 충족시켰단 말인가?
그것도 일부러 담천의 죽음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초유벽과 계약을?
“호호호, 당신은 쓸데없는 질문을 너무 많이 하는군요. 그런 것들이 당신에게 중요한가요? 당신은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위해 어떠한 대가도 지불할 의지가 있지 않았나요? 혹시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뀐 건가요?”
천혜린이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비아냥이 담긴 말투로 초유벽에게 물었다.
“나는…….”
순간, 초유벽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지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럴 시간에 당장이라도 달려가 진대치 놈을 죽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악마가 된다 해도 상관없다!’
죽어 가던 여동생과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속에서 피처럼 붉은 증오가 끓어올랐다.
원수 진대치!
피에 사무친 원한을 갚을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버릴 수 있었다.
설사 그 대가가 자신의 영혼이라 해도.
어차피 더 이상의 의문은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오로지 복수뿐.
그 외의 일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담천은 무엇을 얻는 거지?”
초유벽은 문득 담천이란 이 몸의 원주인에 대해 궁금해졌다.
천혜린의 말로는 가문의 부흥을 얻는 대가로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내가 대신 이 가문을 살려야 하는 건가?”
그건 초유벽과 혼주와의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계약에만 충실하면 돼요. 죽은 담천의 계약은 그의 몫이니 당신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집어낸 천혜린의 대답에 초유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복수뿐이었다.
마귀를 잡는다든지 담씨세가를 살려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 뒤의 일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일단 지금부터 당신은 담천임을 명심하세요.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정체를 들키게 되면 혼백이 흩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죠?”
초유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담천!’
앞으로 자신은 초유벽이 아닌 담천이 되어야 했다.
정체를 들키는 순간 복수의 기회는 물거품이 될 테니까.
‘나는 담천이다!’
* * *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 듯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되새긴 담천이 고개를 들어 천혜린을 바라봤다.
“당신의 왼쪽 가슴을 보면 소용돌이 문양이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담천이 자신의 왼쪽 가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핏빛 소용돌이가 마치 문신처럼 심장 근처에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당신이 잡아야 할 마귀들과 연관이 있어요. 바로 마귀들을 봉인할 그릇이지요. 소용돌이는 당신의 혼과 연결되어 있어 모든 마귀들을 잡았을 때 유계로 놈들을 끌고 갈 수 있어요.”
담천은 소용돌이 문양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피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감촉이 느껴졌다.
“당신은 최소한 삼 개월에 한 마리씩 마귀 혹은 그 권속들을 잡아서 봉인해야 돼요. 마귀가 봉인되면 소용돌이의 색이 은색으로 바뀌게 될 거예요. 그러나 그대가 마귀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면 소용돌이의 색은 검게 변하게 되고, 그대가 머무는 육신은 썩어 들어갈 거예요. 일종의 안전장치죠. 당신이 복수에만 집착하고 혼주께서 내린 임무를 소홀히 할 경우를 대비한.”
한마디로 담천, 즉 초유벽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마음은 당장에라도 진대치 놈에게 달려가 복수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혼주라는 자가 맡긴 임무로 인해 어느 정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담천의 눈빛에서 복수의 의지를 읽은 천혜린이 냉소를 지었다.
“한데 당신은 무슨 수로 복수를 할 건가요? 상대는 무척 강하고 큰 세력을 가지고 있어요.”
진대치는 광동진가의 소공자였다.
무벌을 움직이는 열 가문에 속하진 않았으나, 담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정도로 신흥 세가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전 자신의 실력으로는 복수는커녕 근처에도 못 가고 죽게 될 것이다.
현재 머물고 있는 육신 역시 무공은 어느 정도 익혔으나 진대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호호호, 이미 단전이 깨진 상태인데, 설마 다시 무공이라도 익힐 생각은 아니겠죠?”
천혜린이 입을 막고는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에 담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술법의 여파로 인해 단전이 깨진 상태라는 것을 잊고 있던 것이다.
“마귀를 잡으라는 임무를 맡긴 것을 보면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 순간, 혼주가 자신에게 세 가지 능력을 준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그 힘을 이용해야 할 것이리라.
“맞아요!”
천혜린이 눈을 빛냈다.
“당신은 내기를 쌓을 수 없는 몸이니, 대신 암혼기를 이용해야 해요. 암혼기를 온몸에 돌려서 그것을 기반으로 무공과 술법을 사용해야 하지요.”
암혼기!
혼주가 담천에게 준 세 가지 능력 중 하나였다.
“암혼기는 이 세상의 기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대가 제대로 사용하게 된다면, 복수는 물론 마귀들을 손쉽게 봉인시킬 수 있을 거예요.”
‘암혼기라…….’
초유벽이었던 전생에서나 담천의 기억 속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였다.
또한 그 사용법조차 아직 알지 못했다.
“암혼기는 내공처럼 몸 안에 축적할 수 있어요. 단, 수련이나 영약을 통해 얻는 내공과는 달리 원한과 증오, 그리고 분노를 통해 축적되지요. 또한, 마귀나 원혼들의 기운을 흡수함으로써 그 크기를 키울 수 있어요. 묘지나 전쟁터, 혹은 사람이 많이 죽은 장소가 암혼기를 흡수하기에 적합한 곳이죠.”
어쩐지 이름만큼이나 어두운 느낌의 힘이었다.
무덤, 원혼…….
마치 귀신의 힘을 빌리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담천으로서는 복수만 가능하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암혼기를 축적하게 되면 네 단계에 걸쳐 그 위력이 점점 강해지게 돼요. 첫 번째 단계는 암혼기가 안개처럼 온몸을 감싸는 단계예요. 이 단계에서는 암혼기를 이용해 육체적 능력을 강화하고 무기에 암혼기를 주입해 마치 검기나 도기처럼 사용할 수 있어요. 이때까지는 아직 암혼기가 미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약한 마귀들이나 그 권속들이 아니면 되도록 충돌을 피해야 해요.”
검기나 도기를 사용한다면 아마도 절정의 무사들과 비슷한 경지인 듯싶었다.
한데도 겨우 하급 마귀나 그 권속들밖에 상대할 수 없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몸을 둘러싼 암혼기가 칠흑처럼 검게 변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암혼기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의 제약이 거의 사라져요. 그리고 암혼장이라는 술법을 사용해 상대의 움직임을 제약할 수 있어요. 두 번째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비로소 마귀들을 본격적으로 상대할 수 있지요. 세 번째 단계는 암혼기를 몸 안으로 갈무리하는 경지예요. 마치 무공 고수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는 것과 같아요. 이 단계에 이르면 반 각 동안 자신의 힘을 두 배로 끌어 올리는 배력술(培力術)을 사용할 수 있게 돼요. 또한, 암혼기를 자유자재로 변환시켜 늘이거나 줄이고, 혹은 채찍처럼 사용할 수도 있어요. 심지어는 암혼기를 몸에 둘러 호신강기와 비슷한 효과도 낼 수 있죠. 삼 단계를 넘어선다면 상급 마귀들과 부딪친다 해도 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될 거예요. 네 번째 단계는 당신에겐 아직 먼 이야기니 나중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고…… 일단, 암혼기의 사용법을 알려 드릴게요.”
담천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천혜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암혼기는 스스로의 증오와 분노를 근원으로 생성하는 것이 가장 쉬워요. 그렇게 형성된 암혼기는 차차 주변의 원령들의 힘을 끌어들이게 되지요. 자, 우선 머릿속으로 당신의 원수를 떠올려 분노와 증오를 끌어내 보세요.”
천혜린의 말에 따라 잠시 숨을 고른 담천이 원수 진대치의 얼굴을 떠올렸다.
놈의 비릿한 미소가 담천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잠자던 분노를 끌어 올렸고, 등줄기를 타고 온몸을 관통한 증오가 담천의 두 눈을 통해 터져 나왔다.
화아아악!
순간, 담천의 육신 주위로 묵빛 기류가 안개처럼 피어나더니, 참을 수 없는 살의와 광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크으으으으!”
영혼을 불태울 것 같은 극렬한 분노에 담천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지금 당신의 온몸에 가득 찬 힘이 바로 암혼기예요. 이제 정신을 집중해서 그 힘들을 양손으로 움직여 보세요.”
담천은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암혼기를 움직여야겠다 생각한 순간, 놀랍게도 묵빛 기류가 손 안에서 뭉쳐지며 둥근 구체가 형성되었다.
암혼기가 마치 손과 발처럼 담천의 의지에 반응하고 있던 것이다.
그때, 천혜린이 머리에서 옥비녀를 뽑아 검은 구체에 가져다 댔다.
치지직!
담천은 두 눈에서 신광을 뿜어내며 비녀를 바라보았다.
구체와 맞닿은 비녀의 끝 부분이 녹아내리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정말 놀라운 위력이 아닌가!
닿는 것만으로도 옥비녀를 녹일 정도라면,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문득 담천은 욕심이 생겼다.
이 정도 힘이라면 지금 당장 달려가 진대치를 잔인하게 죽여 피 맺힌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크으으으!”
복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암혼기를 자극했음인지 담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제 그만 암혼기를 푸세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오래 유지하면 광인이 될 수도 있어요!”
담천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천혜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암혼기를 무리해서 운용하게 되면 영혼이 어둠에 잡아먹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담천은 암혼기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머릿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피와 살육을 갈망하고 있었다.
‘크크크, 다 죽여 버려!’
‘갈기갈기 찢어 죽여! 킥킥킥!’
목소리들이 점점 커지고 수가 늘어나면서 지독한 살의와 광기가 담천의 정신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갔다.
위기를 느낀 천혜린이 급히 두 손을 위아래로 모은 채 소리쳤다.
“정신 차려요! 이대로 어둠에 먹혀 버리면 복수고 뭐고 모두 끝나 버려요!”
순간, 위아래로 겹친 천혜린의 손바닥 사이에서 푸른빛이 일며, 마치 천둥이 치듯 천혜린의 목소리가 담천의 머릿속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자 심연 속으로 침잠되어 가던 담천의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끄으으으!”
온몸의 핏줄이 터져 버릴 듯 부풀어 올랐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담천의 머릿속으로 처참하게 죽어간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 유설!
그들을 대신해 진대치 놈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이 위기를 반드시 이겨 내야 했다.
“으으으으윽!”
담천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