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봉마록 1권 4화
1장 담천(4)
혀를 깨문 것이다.
통증이 담천의 정신을 잠시나마 맑게 해 주었다.
‘절대 지지 않겠다!’
두우웅!
단호한 의지와 함께 머릿속에서 섬광이 일며 마치 안개가 걷히듯 음산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들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곧이어 담천의 눈빛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며, 온몸을 지배하던 살의와 광기가 사라져 갔다.
“하아…….”
점차 안정되어 가는 담천의 모습에 천혜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일을 망칠 뻔했다.
담천의 원한이 이토록 클 줄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다.
담천 역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무서운 힘이구나!’
암혼기의 여력에 의해 아직도 손발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하마터면 아무것도 못해 보고 새로 얻은 삶을 날릴 뻔한 것이다.
“암혼기는 강력한 만큼 위험한 힘이에요. 당신이 분노와 증오에 잠식되어 암혼기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역으로 힘에 잠식당할 수 있어요. 특히 혼까지 잠식당하게 되면 그릇인 서문유향도 무사하지 못하게 돼요.”
천혜린이 정색하며 경고했다.
암혼기는 강력한 만큼 다루기 어렵고 위험한 힘이었다.
그만큼 연습이 필요했고, 시전자의 정신력이 높아야 했다.
담천이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듯하자 천혜린이 표정을 풀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당분간은 암혼기를 다루는 연습에 집중하도록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한방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천혜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문 쪽을 향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아니, 과연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옆방에 있을 테니 무서운 꿈이라도 꾸게 되면 달려오시든지요. 호호호.”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담천을 향해 마치 어린아이 어르듯 한마디를 남긴 천혜린이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 * *
담천은 밤새도록 암혼기를 끌어 올리는 연습을 했다.
그럼에도 잠이 오거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담천은 먼저 광기에 빠져들지 않고 최대한 암혼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데 중점을 맞추었다.
복수도 못한 채 이지를 상실하고 광인(狂人)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서문유향의 안위까지 걸려 있었다.
서문유향이 위험해질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섣불리 계약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담천으로서는 암혼기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처음 몇 번은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수차례 반복한 끝에 결국 어느 정도 암혼기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아침이 되자 담일명과 설주란이 화종도와 함께 담천을 방문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천혜린도 있었다.
담천은 이미 침상에서 일어나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암혼기에 적응을 한 상태라 몸을 움직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아버님, 어머님.”
담천이 조금은 어색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담일명과 설주란에게 인사했다.
앞으로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자신을 위해―사실 거래에 불과하지만―육신을 제공한 진짜 담천을 생각해서라도 아들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오, 이럴 수가!”
담천이 멀쩡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자 모두들 놀란 토끼마냥 눈을 크게 떴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아들이 단 하루 만에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것이 믿어지지 않은 것이다.
조금 차갑고 무뚝뚝한 태도였으나 쓰러지기 전에도 워낙 말이 없던 아이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허, 정말 괴사로고.”
기뻐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화종도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담천을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떤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내공이 사라진 것 외에는 전과 다름없습니다.”
담천이 무덤덤하게 화종도에게 답했다.
“맥을 좀 짚어 봐야겠으니 이리로 오게.”
담천이 잠시 머뭇거렸다.
현재 자신은 맥이 거의 없는 상태.
심장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스무 배는 느리게 뛰고 있었다.
분명 화종도가 이상하게 여길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다.
[괜찮으니, 맥을 짚어 보게 하세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담천에게 천혜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담천은 천혜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순간 담천의 몸에 뜨거운 기운이 몰려 들어왔다.
“후읍!”
담천이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왜 그러느냐?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게냐?”
갑작스런 담천의 행동에 설주란이 놀라 다가왔다.
“아, 아닙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하품이 나오려 해서 그랬습니다.”
다소 어색한 변명을 한 담천은 천혜린이 자신의 몸에 무언가 일을 벌였음을 알았다.
아마도 화종도가 담천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모종의 방법을 쓴 듯했다.
담천은 천혜린을 믿고 화종도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어디…… 흐음.”
화종도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담천의 맥을 짚었다.
어제와는 달리 담천의 맥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체온도 이젠 일반인들과 같은 수준이었다.
“허, 놀랍구만. 대단한 회복력이야. 내 주화입마 걸린 이들을 몇 명 보았지만, 자네 같은 경우는 처음이구만.”
담천의 몸 상태에 기가 막힌 듯 화종도가 혀를 찼다.
담일명과 설주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종도의 이야기를 빌자면, 담천은 무공을 잃은 것 외에는 완전히 회복이 된 상태였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멀쩡하니 더 이상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없으니, 이만 가 보겠소이다.”
화종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다행이구나, 천아. 혹시 모르니 며칠 더 쉬도록 하고, 당분간 무공은 손도 대지 말거라.”
담일명이 담천의 손을 잡으며 당부했다.
아들놈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기에 또다시 무리할 것을 미리 막으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단전이 깨어진 담천이 다시 무공을 얻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어리고 경맥과 근골이 아직 굳지 않았을 때도 십오 년이 걸렸던 일이다.
나이가 먹어 근골이 굳어 버린 지금이라면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주화입마가 아닌, 술법에 의해 파괴된 단전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게 몇 번씩이나 다짐을 받은 후에야 담일명과 설주란은 안심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는 다시 담천과 천혜린만이 남게 되었다.
“연습은 좀 하셨나요?”
담천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암혼기를 끌어 올렸다.
화아악!
온몸에서 검은 기류가 마치 불꽃이 타오르듯 피어올랐고, 담천의 두 눈도 핏빛으로 변했다.
그 어떤 빛조차 삼켜 버릴 듯한 짙은 어둠이 담천의 온몸을 감싸는 순간.
“후우…….”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자 검은 기류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천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이젠 제법 자유자재로 통제가 가능하군요. 암혼기는 내공처럼 사용할 수 있어요. 검에 주입하면 검기를 두른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요. 특히 마물과 악령들에겐 큰 효과를 발휘해요.”
순간, 담천의 눈이 빛났다.
옥비녀를 순식간에 녹여 버리는 암혼기를 검에 주입한다면 쇳덩이도 쉽게 자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알려 드릴 것은 그대가 가진 세 번째 능력에 대한 거예요. 바로 명륜안이지요!”
명륜안은 혼주가 담천에게 내린 세 번째 능력이었다.
암혼기의 위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명륜안도 그에 못지않은 대단한 능력임이 분명했다.
천혜린이 알려 준 바에 의해면, 명륜안은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투시(透視).
투시는 막혀 있는 곳을 꿰뚫어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진체(眞體)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만일 마귀가 사람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놈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당신보다 월등히 강할 경우엔 명륜안이 통하지 않으니 조심해야 해요.”
이어 천혜린이 말한 명륜안의 두 번째 공능은 바로 섭혼술.
대상자의 정신을 지배해 마음대로 조종하고, 시전자의 눈과 귀가 되도록 할 수 있었다.
정보를 얻거나 대상자의 육신을 제어하여 목표물에 대한 암습을 시도할 수도 있고.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 가만히 앉아서 적들을 척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한이 있어요. 술법을 걸 수 있는 상대는 오직 시야에 보이는 자에 한해요. 그리고 시전자와 대상의 거리가 백 장을 벗어나면 술법이 깨집니다. 술법이 걸리는 자들도 제한적이에요. 상대방이 의지가 굳건한 자이거나 무공이나 법술의 경지가 높은 자일 경우, 술법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어요.”
투시와 마찬가지로 담천보다 경지가 높은 자들에겐 술법을 걸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라 부작용도 있었다.
“만일 술법을 걸었는데 상대가 파훼했을 경우, 그 반탄력은 그대에게 돌아옵니다. 그리되면 반 시진 동안 당신은 암혼기를 사용할 수 없어요.”
암혼기를 사용할 수 없다면 공력이 없는 담천으로서는 그저 일반인과 다름이 없다.
섭혼술을 사용할 때는 그만큼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흠. 우선은 연습이 필요하겠는데, 누구한테 시도해 보는 게 좋을까…….”
천혜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만만한 연습 상대로는 하인이나 시녀들이 가장 적당했다.
지닌 무공도 없고 하루하루를 적당히 사는 자들이니 특별히 정신력이 뛰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대상을 찾아보도록 하죠.”
목표를 정한 담천과 천혜린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도련님, 식사하셔야죠.”
문밖에서 시녀,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혜린의 눈이 빛났다.
“마침 잘됐군요! 소소에게 연습 삼아 명륜안을 시전해 보세요.”
담천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마음먹긴 했으나, 아무 죄도 없는 소녀에게 사이한 술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꺼림칙했던 것이다.
‘아직도 이런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니!’
입술을 깨문 담천이 스스로를 책했다.
“대상에게는 아무런 부작용도 없어요. 단지 술법을 당하는 동안의 기억만 잃을 뿐이에요. 시전 방법만 알기 위한 것이니 금방 끝날 거예요.”
담천이 결심을 굳히고 소소를 방 안으로 들였다.
“들어오거라.”
소소는 이제 겨우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다.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듯 호기심도 많았고, 참새처럼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모습이 꽤나 귀여운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