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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5화
1장 담천(5)
“호호호! 빨리 쾌차하셔서 다행이에요, 도련님. 마님께서 도련님이 큰 병을 앓고 난 후이니 원기를 보충하셔야 한다며 직접 용봉탕을 끓이셨어요. 반드시 다 드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제가 기다렸다 빈 그릇을 확인하라 하셨으니, 꼭 다 드셔야 해요!”
소소가 신나게 수다를 떨며 용봉탕과 소채가 담긴 쟁반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금부터 소소의 두 눈을 마주 보고 제가 말하는 주문을 의념에 담아 보내세요.]
‘태초의 혼돈에서 태어난 암주(暗主)의 권능으로 명하니, 심혼 속에 잠든 자여, 나의 인형(人形)이 되어라!’
담천은 천혜린의 전음에 따라 주문을 담은 의념을 소소의 두 눈을 향해 쏘아 보냈다.
우우우웅!
순간, 시야가 좁아지는 듯하더니 담천의 의식이 소소의 머릿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성공인가!’
담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 도련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하지만 소소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함께 곧 무언가에 부딪친 듯 담천의 의식이 다시 뒤로 튕겨 나왔다.
끼이이이잉!
동시에 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이 울리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난자했다.
“크으으윽!”
담천의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실패였다.
고통이 사라지자 끝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덮쳤다.
마치 몸에서 힘이 모두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도, 도련님, 또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요?”
심상치 않은 담천의 모습에 소소가 호들갑을 떨며 안절부절못했다.
“괘, 괜찮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서 그런다.”
담천이 해쓱한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사실, 말할 힘조차도 없었다.
“아이고, 무슨 엄살이 그리 심하십니까요! 소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요!”
가슴을 탕탕! 치며 호들갑을 떠는 소소의 모습에 담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천혜린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담천과 소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담천의 경지가 아직 미흡하다 하지만 소소에게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실패했지? 분명 술법은 정확히 들어갔는데. 응?’
그때, 천혜린의 감각에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잡혔다.
“네 허리춤에 맨 것이 무엇이냐?”
그 말마따나 소소의 허리춤엔 작은 헝겊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호호호, 이것은 저잣거리에서 점을 보시는 잘생긴 도사님이 제가 귀엽다고 공짜로 주신 부적이에요!”
소소가 잘생긴이란 말을 특히 강조하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순간, 천혜린의 눈이 빛났다.
“나에게 한 번 보여 주지 않겠느냐?”
“예, 아가씨.”
상기된 표정의 소소가 자랑하듯 헝겊 주머니를 천혜린에게 내밀었다.
천혜린이 조심스럽게 헝겊 주머니를 열어 보자 노란 천에 주사(朱沙)로 쓰여진 부적 하나가 나타났다.
‘이럴 수가!’
천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적을 만든 자의 법력이 길거리에서 점을 보는 도사의 것이라기엔 너무 뛰어났다.
이 정도면 중원 땅에서 손에 꼽을 만한 법력이었다.
거기다 놀랍게도 부적에 사용된 술법은 이미 실전되었다 알려진 천사궁(天使宮)의 비전이었던 것이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런 능력을 가진 자가 갑자기 담씨세가 근처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이라 치부하기에 그 시기가 너무도 공교로웠다.
‘반드시 누군지 정체를 알아내야 돼! 앞으로 변수가 될 수도 있어!’
당장에만 봐도 부적 하나로 담천의 주술을 깼다.
물론, 담천의 힘이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었고, 시간이 지난다면 이 정도 부적에 술법이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도사의 진정한 정체가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존재라면, 이따위 부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걸림돌이 될 것은 자명했다.
“그가 어디에서 점을 보느냐? 지금 나와 같이 갈 수 있겠느냐?”
“호호호, 아가씨도 한 번 보시려고요? 잘 생각하셨어요! 정말 용하다니까요!”
소소는 이제 입에서 침을 튕겨 가며 도사를 칭찬했다.
담천은 왜 갑자기 천혜린이 도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인지 의문을 느꼈다.
비록 함께한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항상 여유가 넘치던 그녀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그자가 위험하거나 앞으로의 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만한 자란 뜻인데…….’
그렇다면 자신과도 관계가 있을 터.
“나도 함께 가도록 하지.”
하지만 천혜린이 담천을 막았다.
“아니에요. 아직 당신은 좀 더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어요. 게다가 어머님께서 정성 들여 만드신 용봉탕을 겨우 점 따위 하찮은 일 때문에 입도 대지 않는다면 결코 자식 된 도리가 아니지요.”
“그래요, 도련님. 그거 다 안 드시면 저도 마님께 혼난다구요!”
[일단 제가 알아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자칫 당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으니 최대한 조심해야 해요.]
소소가 재잘대는 사이, 천혜린이 재차 전음을 보내 담천을 제지했다.
그제야 담천은 자신이 생각이 너무 짧았음을 깨달았다.
만일 그 도사가 비범한 자라면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펼친 명륜안도 그자의 부적 때문에 깨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분명 만만치 않은 법력을 가진 자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나섰다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뻔한 것이다.
“아쉽지만 할 수 없군. 두 사람이 재밌게 놀다 오시오.”
그렇게 천혜린과 소소가 막 방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담천, 자네 있는가?”
낯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담천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놈!’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악적, 진대치였다.
* * *
“아이는 지금 어떤가, 위충?”
얼핏 보아도 장인의 손길이 닿았음을 느낄 수 있는 자단목 탁자 위에 놓인 몇 장의 두루마리를 들여다보던 중년인이 물었다.
그 앞에는 풍채가 당당한 반백의 노인이 머리를 숙인 채 부복해 있었다.
“이틀째 식음을 전폐하신 채 방에만 누워 계십니다.”
중년인이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충격이 클 테지…….”
중년인이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육 척도 되지 않는 그의 육신에서 만인을 압도하는 절대자의 기도가 일어나 사방 삼 장이 넘는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천하를 내리누르는 듯한 위압감에 노인이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직접 가 보시렵니까?”
“그래.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도 돌보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논하겠느냐.”
현 무벌의 벌주이자 강호제일고수 서문광천.
그가 자신의 집무실을 나서 딸이 거처하고 있는 별원으로 향했다.
사십이 넘어서야 얻은 딸아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곱고 착한 아이였다.
위로 두 오라비가 있지만 서문광천은 막내인 서문유향을 가장 아꼈다.
두 오라비 역시 나이 어린 누이동생을 귀여워하며 항상 보살펴 주었다.
서문세가에서 가장 귀하고 곱게 자란 아이가 바로 서문유향이었다.
가신과 서문가의 식솔들 모두에게 가장 사랑받는 이.
그녀가 지금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슬픔은 서문세가 식솔들의 마음마저도 덩달아 우울하게 만들었다.
“유향 아씨, 아버님께서 오셨습니다.”
시녀가 서문광천이 왔음을 알렸으나 방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마.”
서문광천이 낮은 목소리로 알린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문유향은 침상에 뒤돌아 누운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딸아이와 둘만 있고 싶네, 다들 물러가게.”
서문광천이 가신과 하인들을 물렸다.
그런 후, 서문광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반 각쯤 지났을 때, 누워 있던 서문유향의 어깨가 들썩였다.
“흑, 흑…….”
애써 참던 울음이 다시 터진 것인지, 뚝뚝 끊어지는 흐느낌이 가슴에 담은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유향아…….”
서문광천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정인의 죽음은 그녀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체가 혈천(血天)의 주구였다는 사실은 서문유향의 마음을 산산이 조각내는 것이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닐 거라는 믿음과 배신감,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그저 지금의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기만을 기도하던 그녀였다.
“아버님은 그의 죽음을 방관했어요…….”
이윽고 서문유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분노에 찬 군중들이 초씨세가를 향해 몰려갈 때 서문광천은 막지 않았다.
아니, 막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그는 혈천(血天)의 주구였다.”
혈천의 주구란 말에 서문유향이 분노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토록 다정하고 여린 사람인데, 그가 혈천의 주구라니! 다른 자들의 모함일 것이 분명해요!”
서문유향은 절규했다.
그녀가 아는 초유벽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초유벽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유약하고 무공에는 별 소질이 없었지만, 그만큼 다정다감하고 사람들을 아끼며 부모님과 가족을 사랑하던 이였다.
피를 싫어하고 칼을 무서워하던 그가 혈천의 주구라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문광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현실은 더없이 냉정했다.
“초씨세가의 석실에서 여섯 구의 목내이(木乃伊)가 나왔다. 흡혈마공(吸血魔功)의 증거들이지. 거기다 증인까지 있는 상황이다.”
혈천은 무벌, 정천맹과 함께 현 강호를 삼등분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그들은 피를 갈망하는 자들로, 수만 가지 악행을 일삼는 흉신악살(凶神惡殺)의 무리들이었다.
혈천의 마인들은 사이한 술법을 이용해 엄청난 힘을 얻었는데, 흡혈마공도 그중 하나였다.
이 마공은 초기에 동남동녀의 피와 정기를 흡수해 공력을 얻어야 했기에 흡혈마공이 출현하는 곳에는 항상 수백 명의 죄 없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흡혈마공을 익힌 자는 강호무림인 모두에게 가장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무벌 내에서도 최근 어린아이 여섯 명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금세 조사단이 꾸려져 사건을 수사했으나, 한 달이 넘도록 범인의 종적은 오리무중이던 차였다.
그때, 그 일이 발생했다.
집법대 조장 중 하나인 진대치가 우삼이란 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우삼이란 자는 초씨세가의 하인으로, 놀랍게도 여섯 아이 실종 사건의 범인이 바로 초씨세가의 장남 초유벽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러 온 것이었다.
우삼은 초씨세가에서만 삼십 년이 넘도록 일한 자였다.
그렇기에 초씨세가는 그에겐 가족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초유벽의 끔찍한 범죄만은 도저히 눈감아 줄 수 없었다.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정기를 흡수하다니, 어찌 그것이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결국 그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집법대에 사실을 알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