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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록 1권 13화
3장 지강현의 괴사(怪事) (4)
거듭 주의를 당부하는 오구의 말에 소현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몸을 들썩이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담천과 천혜린은 세 사람의 분위기가 예상과 달리 큰 문제가 없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보세요. 괜한 기우였잖아요. 세상에 억울한 이가 어찌 저 여인뿐이겠어요. 그들 모두의 한을 당신이 풀어 줄 수는 없어요.”
담천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천혜린의 말이 맞다는 것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지금의 자신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면―감정이란 것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담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감정은 증오와 원한이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억눌렀던 감정들이 터져 나와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담천이 혼주와 계약한 이유도 복수 때문이 아닌가.
위사들과 소현이 멈춘 곳이 마침 그녀의 집 앞이었던 모양이다.
두 위사는 흐느끼는 소현을 토닥여 안으로 들여보냈다.
소현도 많이 지친 듯 순순히 그에 따랐다.
주부의 저택이라 하기엔 상당히 규모가 작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죽은 양윤의 청렴한 성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오늘 중에 세가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해요.”
아직까지는 마음대로 돌아다니기엔 여러 가지 걸리는 것이 많았다.
일단은 가족들.
미리 말을 하고 나오긴 했으나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담천인지라 담일명과 설주란의 걱정이 클 것이다.
게다가 주화입마를 당했던 환자가 삼 일 만에 아무 이상 없이 돌아다닌다면 담씨세가를 주시하는 다른 세가에서 이상하게 여기고 담천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담천에게는 무척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생각을 마친 담천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응?”
갑자기 왼쪽 가슴에서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죠?”
담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왼쪽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글쎄, 왼쪽 가슴 쪽에서 열기가 느껴지는군.”
순간, 천혜린이 걸음을 멈췄다.
“혹시 소용돌이 문양이 위치한 곳인가요?”
생각해 보니 그곳이 맞는 것 같았다.
담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혜린의 눈동자가 빛났다.
“근처에 마귀나 그 권속이 나타난 것이 분명해요!”
소용돌이 문양 안에는 마귀들을 봉인할 그릇이 들어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그릇이 마귀들의 기운에 반응했기 때문인 것이다.
“……!”
담천은 재빨리 몸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우선은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담천에겐 명륜안이 있어 정체를 감춘 마귀나 권속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놈은!”
그때, 담천의 시야에 괴이한 모습이 잡혔다.
분명 사람인데 그 형상이 뼈가 없는 동물마냥 흐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인가요?”
천혜린 또한 담천을 따라 즉시 시선을 옮겼다.
그곳은 소현의 집 바로 옆 골목이었는데, 곽진에게 죽을 뻔했던 도경이 몰래 숨어서 살피고 있었다.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고, 형상이 흐물거리는 것이 정상적인 놈은 아니군.”
“권속이군요. 권속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인인 마귀의 권능 때문에 실체가 흐릿해요.”
권속이라면 담천이 해볼 만한 상대였다.
하지만 문제는 주변에 담천이 인식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진 마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반대로 당하게 될 것이다.
“한데, 왜 저놈이 소현이란 낭자의 집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요?”
천혜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도경을 바라보았다.
담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억울한 죽음, 그에 대한 소현의 반발.
그 뒤에 찾아온 마귀의 권속.
아무리 머리 나쁜 이가 봐도 분명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는 전개였다.
“저 소저가 말하는 부친의 억울한 죽음과 놈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게 틀림없군요.”
천혜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귀를 쫓을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 것이다.
사실, 마귀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지강현에 오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막막하던 차였다.
유일한 단서라 생각했던 ‘핏빛 강’ 사건의 목격자인 아이들에게도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도 마귀의 권속을 발견한 것이다.
놈을 잡아 심문하거나 양윤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 보면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때, 놈이 소현의 집 담장을 은밀하게 넘는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놈을 잡아야겠군.”
담천은 천혜린의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곧장 달려 나갔다.
어느새 온몸에는 암혼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천혜린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단시간에 암혼기를 쌓기 위해서는 권속들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담천이 이겨 내야 할 첫 번째 난관에 불과했다.
* * *
“거, 거기, 누, 누구세요!”
막 뒤뜰로 들어서던 양소현은 갑작스러운 괴인의 등장에 놀라 소리쳤다.
양소현을 더욱 기겁하게 만든 것은 괴인의 손에 들린 하인, 진삼의 목이었다.
마치 손으로 뜯어 낸 듯 거칠게 잘려진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크크크, 가만히 있었으면 목숨이라도 건졌을 것을 어리석게 설쳐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툭!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진삼의 머리를 바닥에 팽개친 도경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양소현에게 다가갔다.
“아아악!”
너무도 끔찍한 모습에 양소현은 망연자실 주저앉으며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경의 솥뚜껑만 한 손이 막 양소현을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피잉!
갑자기 날아든 날카로운 물체에 도경이 손을 멈추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물체의 정체는 주먹만 한 돌멩이였다.
“웬 놈이냐!”
분노한 도경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막 현장에 도착한 담천이 서 있었다.
“네놈을 잡으러 온 사신이지!”
암혼기를 온몸에 두른 담천이 두 눈에서 서늘한 안광을 뿌리며 천령검을 뽑았다.
그 모습에 도경이 어이없다는 듯 담천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긴 했으나 자신이 누구이던가.
권속이 되며 곽진에게 받은 힘은 감히 인간이 어찌해 볼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인간들은 열이든 백이든 언제든지 쉽게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갑자기 튀어나온 눈앞의 애송이 녀석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알았다면 저토록 당당히 서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애송이의 몸을 감싼 검은 기운이 조금 이상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고수나, 법력이 높은 도사와 승려가 아니면 결코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애송이는 그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았다.
“후후,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오다니,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입가에 조소를 가득 배어 문 도경이 뱀 같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본신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후우우우웅!
붉은빛을 띤 연무가 도경의 온몸을 감싸더니,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콰앙!
위험을 느낀 담천이 지체 없이 몸을 날리자 바닥이 터져 나가며 돌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느새 그 자리에는 도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 있었다.
“호오, 내 공격을 피해? 인간치고는 제법이구나. 후후.”
도경은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디, 이것도 막아 보거라!”
도경의 오른쪽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근육들이 용트림 쳤다.
잔뜩 뒤로 끌어당긴 오른 주먹이 마치 시위에 올려진 화살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한계점까지 힘을 끌어모은 도경의 몸이 회전하며 벼락같은 속도로 내뻗어진 주먹이 담천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쉐애애액!
주먹이 지나간 자리로 주변의 공기가 빨려들며 굉음을 냈다.
그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에 주먹을 중심으로 와류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담천은 피하지 않고 천령검을 들어 올렸다.
‘어리석은 놈, 검 따위가 나에게 소용이 있으리라 보느냐!’
도경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부우웅!
이토록 큰 동작에 넋 놓고 맞아 줄 만큼 둔한 담천이 아니었다.
도경의 주먹이 담천의 머리에 닿는다 느껴지는 순간, 담천이 급히 몸을 낮추며 천령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쉬이익!
“큭!”
허공을 때리며 담천을 스쳐 지난 도경이 신형을 멈추고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옆구리가 길게 갈라진 채 검은색의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경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이게 대체…….”
자신의 몸은 일반 도검으로는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혹여 상처를 입는다 해도 그 자리에서 회복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한데 담천의 검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을 뿐만 아니라 회복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상처에서 시선을 뗀 도경이 천령검을 노려보았다.
“보통 검이 아니구나!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아무런 대꾸 없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담천이 암혼기를 운용하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오냐! 네놈이 누구든 상관없다! 비록 내가 방심하여 불의의 일격을 당하긴 했으나, 이제부터 제대로 상대해 주마!”
우우우우웅!
이를 악문 도경의 몸 주위로 붉은 기운이 짙어지더니,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갑자기 덩치가 두 배로 커졌다.
두두둑!
“흐흐흐! 뼈째로 씹어 먹어 주마!”
크게 외친 도경의 거대한 육신이 담천을 향해 돌진했다.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를 뿌리며 달려드는 도경의 모습은 보는 이의 심장을 절로 오그라들게 만들 정도였다.
쉬이익!
그러나 담천은 당황하지 않고 천령검을 마주 휘둘렀다.
이미 천령검이 놈에게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승기를 잡았다 여긴 것이다.
게다가 놈의 공격은 무공이 보잘것없는 담천이 보기에도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 커서 그야말로 허점투성이였다.
하지만 둘의 충돌 결과는 담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흥!”
까앙!
놀랍게도 도경이 주먹으로 천령검을 쳐 낸 것이다.
“이런!”
덩치가 커진 만큼 그 힘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검에 전해지는 반발력을 이기지 못한 담천의 신형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순간, 도경의 눈빛이 빛났다.
이어 도경의 무릎이 담천의 오른쪽 옆구리에 작렬했다.
콰아앙!
급히 검을 내려 막으려 했으나 미처 도경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담천의 신형이 삼 장이나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마치 황소에게 들이받힌 듯,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담천의 오른쪽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져 버렸다.
“크으윽!”
불사의 육신이라 해도 극심한 통증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수십 개의 송곳으로 옆구리를 찔러 대는 듯한 느낌에 담천은 신음을 흘렸다.
‘만만치 않구나!’
권속이라고 대단치 않게 봤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때, 도경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