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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1화



작가서문


누구나 한 번은 꿈을 꿉니다. 죽고 싶지 않다고 말이죠.
진시황이 평생토록 불로초를 찾았던 것처럼 사람에게는 많든 적든 불멸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죽음을 이겨낸 초월적인 존재는 매력적입니다. 그건 마치 신의 영역을 밟은 것처럼 위대해 보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아닌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자, 시작해 봅시다.
우울한 남자의 이야기를.


금건영 배상.



서장


백 년 전.
무림에서 가장 고강한 고수 열 명을 십천(十天)이라 불렀다.
무림십천에는 정사의 구분이 없었으며, 인품이나 덕망을 평가의 기준으로 끼워 넣지 않았다.
오로지 무공의 강약이 기준!
검성(劍聖), 도황(刀皇), 독제(毒帝), 신권(神拳)의 정도사천(正道四天)!
혈왕(血王), 검마(劍魔), 악룡(惡龍), 귀랑(鬼狼)의 사도사천(邪道四天)!
패왕(覇王), 요화(妖花)의 중도이천(中道二天)!
각기 한 시대를 풍미할 보기 드문 인재였으나, 하늘이 미쳤는지 열 명의 절대고수를 동시대에 던져 버렸다.
십천에겐 실력도 야심도 있으니, 무림은 천하를 쥐려는 십천의 세력에 휩쓸려 피바람이 불었다.
시산혈해!
피의 강이 흐르고 시체의 산이 썩어 악취를 풍기니, 세상은 지옥과 같았다. 십천이 황실을 압도할 정도이니, 관가가 무슨 소용인가.
세상은 그야말로 무법천지. 강도, 강간, 살인이 들끓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끝 간 데 없는 지옥!
정도가 무엇이며 사도가 무엇이냐. 그들 모두가 피에 굶주린 야수가 되어 의(義)도 협(俠)도 없다. 농민들은 곡식을 거둘 들판에 시체만 가득하자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잡아먹었다.
아귀지옥!
십천의 전쟁이 시작되고 어느덧 십 년, 중원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빠졌고, 죄 없는 백성들은 무림인을 외면하고 원망했다. 더 이상 무림인은 의협의 상징이 아니라 칼만 든 강도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천하를 십분하고 있는 십천에게 붉은 종이에 쓰인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에는 다만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진천(鎭天)

하늘을 누르겠다!
서신을 받은 십천은 코웃음을 치고 무시했다.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장난질로 여겼다.
그러나 서신이 도착하고 정확히 보름이 지난 뒤, 요화궁이 사라졌다. 궁주 요화천을 비롯한 궁도 삼천 명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십천의 나머지 아홉 명은 술렁거렸으며,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요화궁을 암습한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룻밤 만에 요화궁을 잿더미로 만들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세력이란 말인가!
요화의 다음은 패왕이었다. 그 또한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마침 패왕궁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을 소문으로 퍼뜨렸다. 패왕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단 한 명의 무인이었다고.
백의 검객.
나이는 서른이나 되었을까. 무인은 젊었고, 티끌 하나 없는 백의를 입고 검을 찼더란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패왕궁에 들어갔다. 그 내부 사정까지 아는 자는 없었으나 그날 밤 더 이상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요화!
패왕!
그 뒤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십천이 한 명씩 거꾸러졌다.
무서운 행보였다. 십천의 세력을 단신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녕 무신(武神)이었는지, 정도사천과 사도사천마저 모두 쓰러뜨렸다.
개중 예를 갖추고 비무에 응한 자는 목숨을 건졌으나, 암습을 하거나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 와중에 일만에 달하는 고수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그 누구도 그를 살인마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사문도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백의 검객을 처음에는 폭열마제(暴熱魔帝)라 부르며 학살에 두려워했으나, 살생에 분별이 있는 것을 보고 곧 진천검존(鎭天劍尊)이라고 고쳐 불렀다.
진천검존의 행보는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무림에 출도하여 진천의 서신을 돌린 지 한 달.
그는 무림의 지존이 되어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고작 서른둘이었다.

진천검존!

이것은 바로 그의 이야기다.



제1장 천하제일고수(1)


태평성대.
근 삼십 년 동안 무림에는 이렇다 할 큰일이 벌어진 적이 없다.
정사무림의 전쟁은 물론이요, 미친 고수가 나타나서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일도 없었다. 문파 간의 싸움조차 무력보다는 말로 해결하는 추세다.
모두 무림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진천검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팔십 년 전에 천하제일고수로 이름을 떨친 진천검존 금적풍은 정사무림을 모두 발아래에 두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추종자를 이끌어 진천문을 세웠다.
온갖 은거기인부터 시작하여 젊고 촉망받는 기재들까지 모여 하나로 묶이니 진천문은 단숨에 천하제일의 문파로 거듭나 사실상의 무림맹으로 여겨지게 됐다.
진천문이 세워지고 한동안은 도전해 오는 문파가 끊이질 않았다. 이미 십천의 기억을 잊은 무림은 진천검존이 늙어 쇠퇴하지 않았나 시험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사도의 팔문이곡 중 사사천문, 암검문, 하오문, 귀곡의 삼문일곡이 연합하여 진천문에 도전하고 패퇴한 이후로는 아무도 진천문의 권위를 의심치 않았다. 사도무림 세력의 삼 할을 진천문이라는 일개 문파가 홀로 박살 낸 것이다.
누가 감히 전쟁을 벌일 것인가.
팔십 년 전, 천하십대고수를 모두 쓰러뜨린 진천검존이 무림을 지배하고, 천하제일의 세력을 자랑하는 진천문이 그의 뜻을 집행한다.
감히 혈풍을 일으킬 자가 누구이며, 전쟁을 벌일 자가 누가 있겠는가.
절대자가 있는데!
간간이 나타나던 세상의 악적들도 삼십 년 전부터는 완전히 끊겨, 무림은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진천검존의 덕을 칭송하였고, 무림인들은 진천검존을 신으로 여겼다. 세상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니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진천검존 금적풍의 이름 석 자는 온 중원인이 알게 되었다.

“그때가 좋았지.”
서류를 헤집는 진천검존의 두 눈이 피로로 핏발이 섰다. 신경질적으로 도장을 쾅쾅 찍어 대는데 지나간 시절이 떠올랐다.
적어도 무림을 주유하던 시절에는 이런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밤을 새워도 처리하지 못하는 많은 서류,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면 새벽부터 잡혀 있는 회의. 식사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공식 일정에 끌려가고 나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림명사의 경조사, 겨우 한숨을 돌리려고 하면 다시 끌려가는 회의, 정신 차리고 보면 해는 지고 있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오면 반기는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 다시 밤을 새워도 처리하지 못하는 서류.
도장을 아무리 찍어도, 붓을 아무리 휘갈겨도 산처럼 쌓인 서류는 높이만 더해 갔다.
“이이익!”
진천검존 금적풍이 붓을 틀어쥐고 이를 갈았다.
뿌드득.
붓이 기괴한 소리를 내더니 꺾여 버린다.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야!’
금적풍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이 흔들리자 서류 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금적풍은 핏발 선 눈으로 벽에 걸린 자신의 애검을 보았다. 뿌옇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검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지금 그의 애검은 통곡을 하며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널 뽑아 본 게 언제냐!’
금적풍은 집무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애검에 다가갔다. 피로에 젖은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래, 나가는 거야! 일이 다 뭐냐! 놀러 가자!”
그의 떨리는 손이 검으로 향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주님, 양 총관입니다.”
우뚝.
금적풍은 손을 멈추고 집무실의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 갈등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충혈된 눈에 떠올랐던 광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근엄한 자세로 앉아 부러진 붓을 쥐었다.
“들어와.”

점심때가 지나자 청천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금적풍은 아직 산처럼 쌓여 있는 미결 서류를 뒤로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의 첫째 안건은 ‘무림 대회 개최지 선정’이었다.
“화산! 화산이야말로 이번 무림 대회의 개최지로서 제격이지요!”
“무슨 말씀을! 꽃구경이나 가자는 말이오? 구파일방의 맏형 격인 소림으로 합시다!”
금적풍은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애꿎은 허벅지를 찌르고, 청천당 탁자에 새겨진 꽃무늬를 하나하나 헤아렸다. 그래도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소림에서는 너무 자주 열지 않았소! 이번에는 무당에서 해야 할 것이오! 이쯤 되면 체면을 한번 살려 줘야 하지 않겠소!”
잘못 생각했다. 꽃무늬를 세는 것은 졸음을 더욱 불러왔다. 금적풍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청천당에서 회의를 하는 장로들은 목소리에 내공까지 담아서 설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자장가로 들렸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지. 명색이 문주인데 나도 회의에 참여해야겠지.’
금적풍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정신을 집중했다. 무림 대회 개최지 선정이라고 했으렷다.
“혹시…… 오창문은 어떻겠는가?”
오창문은 실속 있는 문파다. 비록 역사가 짧고, 아직 세력이 구파일방에 미치지 못하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곳이다. 무림 대회로 힘을 실어 주면 충분히 성장하여 정도무림의 당당한 한 문파로 일어설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지들 말고 개방에게 맡겨 보자니까 그럽니까! 개방의 인력을 무시하는 것이오?”
“어디 거지들에게 그런 일을! 화산! 화산! 화산이래도!”
“이번에는 멀더라도 곤륜에서 하자고 하지 않았소!”
금적풍은 커다랗게 뜬 눈으로 청천당을 둘러보았다. 모두 얼굴이 시뻘개져서 외치고 있는데 금적풍의 얘기를 들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금적풍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이거 봐. 문주라는 게 있으나마나잖아. 차라리 나가서 놀게 해다오.’
자기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면서 자리는 지키고 있으란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집무실에서 서류 정리에 몰두하고 있는데, 양 총관이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남궁, 사마, 제갈, 당의 사대세가가 연맹식을 맺으니 참석해 달라는 서신이 왔다는 것이다.
“다녀와도 되는 건가?”
“예. 무림 사대세가의 연맹식이라면 결코 작은 행사가 아니니 문주님께서도 참석하셔야지요.”
피로에 찌든 금적풍의 얼굴이 환해졌다.
‘얼마 만의 외출이냐!’
금적풍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연맹식을 맺는 사마세가로 달려갔다. 말을 타고 달리는데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니 가슴이 트이도록 상쾌했다.
“진천검존을 뵈옵니다!”
금적풍이 사마세가에 도착하자 미리 도착해 있던 사대세가의 고수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개중에는 친분이 있는 고수들도 있어 금적풍은 무척 반가웠다.
‘그래, 마침 날씨도 좋으니 오늘은 푹 쉬다 가자.’
사대세가가 하나의 깃발 아래 힘을 합친다는 내용의 맹세가 끝나고 곧바로 연회가 벌어졌다. 무인들은 진천검존을 선망의 눈으로 보고 술을 따르기를 원했으나, 사마세가의 총관은 그를 다른 자리로 모셨다.
“누가 있다고 이러는 거야?”
이미 연회장에는 사대세가의 실세들이 있었는데도 사마세가의 총관은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가 보시면 압니다.”
총관의 말대로 사마세가의 별채에는 본채의 연회만은 못했지만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은 고작 네 명이었다.
“오오, 왔는가!”
네 명의 노인이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으나 금적풍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뉘신지?”
그러나 잠시 후에 금적풍의 가늘게 떴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검치! 독왕! 만통자! 그리고 자네는 봉황검?!”
노인들을 하나씩 가리키면서 중얼거리는 금적풍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섭섭하네. 이제야 알아보는 건가.”
“아니, 어쩌다 이렇게…….”
금적풍은 황급히 말을 삼켰다. 어쩌다 이렇게 늙었냐고 면전에 대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많이 늙었지?”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 만통자가 쓰게 웃었다. 그의 눈은 퀭하게 파여 있었고,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시체와 같았다. 피골이 상접하게 말라서 당장 숨이 넘어갈 노인으로 보였다. 나머지 셋도 그와 비슷했다.
“아니, 아니야. 너무 오랜만이라 알아보지 못했어.”
금적풍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진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진천검존과 함께 강호를 풍미했던 전대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관 속에 들어갈 노인처럼 늙어 있었다.
“자네와 강호를 종횡할 때가 좋았지. 지금은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술이 한 순배 돌자 사마세가의 전대 가주 봉황검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때는 현실을 몰랐으니까 행복했는지도 모르지. 일문의 문주라는 자리와 강호의 고수라는 위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으니…….”
“마지막으로 싸워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 매일 서류에 회의에 경조사에 손님맞이에 쫓기다 보면 운기조식할 시간도 없지.”
금적풍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들의 푸념을 듣다 보니까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역시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네들은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나.”
금적풍이 반문하자 사대세가 전대 가주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남궁세가의 검치가 피식 웃었다.
“가주와 전대 가주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가 하는 일은 변하지 않았어.”
만통자가 노래하듯 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