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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검존 1권 2화
제1장 천하제일고수(2)
“서류 보고, 회의 하고, 서류 보고, 회의 하고, 손님 보고, 서류 보고. 이런 게 무림인이라는 걸 알았다면 진작 때려치우고 밭이나 갈걸 그랬지. 지금은 너무 늦었어. 은거한다고 해도 찾으러 올걸?”
사천 당가의 전대 가주 독왕이 말을 맺었다.
“식사할 시간도, 잠잘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데 수련이 웬 말이겠어. 운기조식할 시간도 없으니 원기만 깎아 먹고 있지. 진천검존 자네가 우리를 보고 놀랐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네.”
당황한 금적풍이 도리질을 치려고 했으나 독왕이 먼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요즘 거울 본 적 없지?”
“아니, 아니야!”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진천검존의 집무실에서 마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밤새 서류 처리에 몰두하다가 깜빡 잠이 든 금적풍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것이다.
“허억, 허억. 꿈이었나.”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숨이 가쁘고 기분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눈을 뜨는 순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지는 그런 꿈을 꾸었는데 악몽이라는 것은 알겠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서 금적풍은 반쯤 열린 창문을 닫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창문에 다가가던 금적풍은 우뚝 자리에 멈췄다. 창가에 있는 거울에 시선이 못 박혔다. 평소에는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물건인데 새삼스럽게 눈에 밟혔다.
“이게…… 나란 말인가.”
입술을 씰룩거리는 노인의 얼굴. 검버섯이 피어오른 피부, 생기를 잃고 퀭하게 파인 눈, 황혼을 넘어서 죽음을 바라보는 늙은 노인의 얼굴에는 그 어디에서도 과거의 전성기를 찾을 수 없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늙고 비루하여 볼품이 없는 게 마치 어제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과 비슷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금적풍은 도리질을 쳤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자신의 얼굴은 이렇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어도 정기가 넘치고 활력이 가득했다. 언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그게 무림이야. 이게 현실이라고.’
진작 현실을 깨달은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천검존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자,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사대세가의 연맹식에서 돌아왔을 때도 제일 먼저 진천검존을 반긴 것은 바로 저 서류 더미였다.
‘무림은 젊었을 때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곳이 아닌 거야. 보게나, 자네도 우리처럼 이미 늙어 가고 있어. 빠져나갈 수도 없다네.’
친구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바로 어제 했던 얘기가. 금적풍은 핏발 선 눈으로 망연히 서류 뭉치를 응시했다.
“이익!”
손을 힘껏 당겨 서류를 쳐 내려고 하다가 부르르 떨면서 손을 늘어뜨렸다. 힘이 빠졌다. 금적풍은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져 놓고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앓았다.
천하의 진천검존이 병에 걸렸다고 하면 십중팔구는 농담이라고 코웃음을 칠 일이다. 그런데 금적풍은 실제로 시름시름 앓아누웠다. 몸살이겠거니 가볍게 생각했는데 상세가 갈수록 심해졌다. 사대세가의 연맹식에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열이 오르고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식욕이 없어지고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열에 들떠서 가까운 지인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진천문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의원을 불러들였다.
“병이 아닙니다.”
의원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연로하신 몸으로 무리를 하셔서 쓰러지신 듯합니다. 병이 아니니 고칠 방법도 없습니다. 다만 기를 보하는 약을 지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는 얘기다. 병에 걸렸으면 약을 먹으면 되지만, 늙은 몸을 보하는 것은 어려웠다. 천수가 끝나 간다는 얘기이니, 의원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총관과 장로들이 의원의 말을 듣고 혼란에 빠졌다.
“아무런 방법도 없는 것이오? 설마 이대로 문주님이 돌아가시는 건 아니겠지요!”
의원은 장로의 시선을 피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렇다 하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 문주님께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시다면 훌훌 털고 일어나실 수도 있으나 자칫하면 이대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문주의 침소에 모인 사람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금적풍을 바라보았다. 앓는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니 피골이 상접하여 목내이처럼 보였다.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트는데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으음…….”
얼마나 지났을까.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금적풍이 곧 눈을 떴다. 자리에 남아 있던 총관과 팔대 장로는 숨을 죽였다.
“저, 정신이 드십니까.”
“물을…….”
누군가 재빨리 물을 가져다 입술에 흘려 넣어 주었다. 말라붙어서 타들어 가던 목이 축여지니 한결 숨쉬기가 편했다. 그러나 여전히 숨은 찼고, 어지러워서 정신이 혼미했다.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집무실에 쌓여 있을 서류들이 생각났다. 문주가 누워 있으면 처리할 사람이 없다. 회의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훌훌 털고 일어나고 싶었는데 몸이 꼼짝도 하질 않았다.
‘누워 있을 시간이 없는데 큰일이군.’
“문주님! 어서 건강해지셔야 합니다!”
양 총관이 나지막이 말하자, 곁에 서 있던 장로들이 따라서 외쳤다.
“건강해지셔야 합니다!”
“어서 털고 일어나십시오!”
“저희들을 계속 이끌어 주셔야지요!”
장로들이 소리치자 머리가 울려서 지끈거렸다. 그러나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했던가. 그들이 이토록 간절히 쾌유를 기원하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래, 내가 가 버리면 누가 진천문을 책임진단 말인가. 이 정도로 쓰러져 있을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금적풍은 애써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런데…….
“미결 서류가 벌써 팔백이십 건이 쌓였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양 총관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하니…….
“아직 무림 대회 개최지를 선정하지 못했습니다. 소림사로 결정해 주셔야지요!”
“아니, 화산으로 하자니까 왜 자꾸 그러시오!”
“이번에는 기필코 무당에서 열자니까!”
장로들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다투기 시작했다.
“개방에도 기회를 주자니까 다들 너무하는 것 아니오?!”
“거지들이 주최하는 무림 대회 따위를 누가 간단 말이오!”
“곤륜! 곤륜! 곤륜!”
이미 병상에 든 문주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금적풍은 부르르 떨더니 혼절하여 정신을 잃었다.
그날 밤, 천하무림을 발아래에 두고 지배자로 군림한 진천검존 금적풍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2장 저승(1)
길고 긴 사람의 행렬이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묵묵히 길을 걷고 있었다. 사방이 캄캄하고 오로지 발밑의 길만이 보였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길의 끝에는 거대한 성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금적풍이 있었다.
閻羅殿
“염라전……. 이곳이 저승인가.”
금적풍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혼백(魂魄)이 재판을 받기 위해 염라전으로 쉴 새 없이 걸었고, 그 주위로 저승사자로 보이는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그래, 내가 죽었구나.”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곳은 저승인 것이다.
‘좋은 인생이었어.’
금적풍은 염라전을 향해 걸으며 천천히 인생을 곱씹었다. 한 자루 검을 쥐고 천하를 주유하던 무명의 시절이 떠올랐다.
‘평생을 갈고닦은 검을 들고 겁 없이 강호에 출도했지.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긴장했는지 몰라. 별것도 아닌 십천의 이름에 눌릴 정도였으니까. 정말 별것도 아니었는데.’
금적풍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시의 성취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했다. 십천을 모조리 거꾸러뜨리자 세상 사람들은 천하제일고수라며 진천검존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수하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무인들을 모아 문파를 세우니, 나만의 나라를 갖는 기분이라 황제도 부럽지 않았지.’
적어도 무림에 한해서는 황제나 다름없었다.
금적풍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진천문이 군림하게 되어 그 흔한 도적도, 산적도 자취를 감췄지. 나처럼 생전에 중원에 태평성대를 이룩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열 명도 되지 않을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자금성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진천검존 금적풍의 이름은 세상이 알았다. 그런데 순간 금적풍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나 문파를 세우고 나니 서류야말로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지. 밤을 새워서 서류 결재, 새벽같이 아침 회의, 멀리서 온 손님 접대. 하하, 그야말로 아주 보람찬 인생이었을…… 리가 없지 않나! 보람은 얼어 죽을! 죽도록 혹사당하는 인생이라니!’
이가 절로 갈렸다.
바드득.
금적풍은 인상을 쓰고 말년에 당했던 비참한 고통들에 대해서 저주를 퍼부었다. 화려했던 인생의 후반부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일한 기억밖에 없다.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열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내가 다시는 무림으로 돌아가나 봐라!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절대로! 돌아가면 개다, 개!’
“혹시 당신은 진천검존 금적풍이 아닙니까?”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데 갑자기 음산한 목소리로 누군가 물어 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였다.
“그렇소. 내가 금적풍이 맞는데…….”
저승사자가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워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일령이라고 하는 저승사자로, 평소 당신을 흠모하였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니 반갑습니다.”
“어찌…… 나를 아시오?”
금적풍이 의아해 하며 반문하자 저승사자가 씩 웃었다.
“이승을 훔쳐보는 것은 저승사자가 제일 좋아하는 도락입니다. 그러니 이승에서 가장 강한 고수인 당신을 모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진천검존의 이름은 저승사자들 사이에서도 전설적입니다.”
너무도 솔직하고 낯 뜨거운 칭찬이라 금적풍은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허, 허허허. 과찬이오. 금칠은 그만 하시구려. 그런데 나 같은 노인이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금적풍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림이 싫네, 어쩌네 해도 이런 얘기는 싫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저승사자도 본래는 무공을 익혔던 혼백들이니, 진천검존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지요.”
일령의 말은 생소하게 들렸다.
“저승사자가 무공을 익혔던 사람이 되는 것이란 말이오? 그것 참 신기하구려. 그렇다면 혹시 나도 저승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오?”
물론 정말로 저승사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신기하여 물은 것이었으나 일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저승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천검존의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이지요.”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듣고 금적풍은 의아해 했다. 아직 자신은 염라대왕에게 재판도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일령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원래 혼백의 앞날을 정해 주는 것은 대왕님의 일이나 당신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특별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진천검존 당신은 바로…… 천계(天界)의 신장(神將)이 된답니다!”
금적풍은 일령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일령이 더욱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신장 말입니다, 신장. 천계의 신을 모시는 장수. 이미 어제 새로운 신장을 데려가기 위해 천계에서 금학(金鶴)이 도착했답니다.”
일령은 침을 튀겨 가며 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학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금학이란 본래 천계에서 기르는 영물(靈物)로, 저승과 천계를 오가며 편지를 전하고 사람을 옮겨 주는 신수(神獸)라고 하였다.
“금학이라…….”
금적풍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학에 걸터앉아서 날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그대로 천존에게 날아가 신장이 된단 말인가.
‘그래! 마음에 든다! 이미 이승에서는 더 이룩할 것이 없으니까! 황제라도 되면 모를까! 그러나 이승의 황제보다 천상의 신장이 몇 배는 낫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좋아, 내가 이승에서 이룩하고 고생한 것을 하늘이 알아줬구나!’
금적풍이 환히 웃는 것을 보고 일령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그때가 되면 일령이라는 저승사자를 기억해 주십시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옳거니! 핫핫핫, 내 필히 기억해 두리다.”
금적풍은 호탕하게 웃으며 일령을 따라 염라전으로 들어갔다.
‘지겹도록 일에 치이고, 지긋지긋하게 혹사당한 것이 과연 신장이 되기 위함이었던가.’
가슴이 뛰고 기분이 좋아졌다. 다 늙어서 주책이라고 생각하던 금적풍은 문득 자신의 턱을 만져 보았다. 신선처럼 기른 수염이 없었다.
“어라?”
턱이 매끈하다. 무심코 그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목소리에 위화감이 들었다. 금적풍은 얼굴까지 다 만져 보고 나서 자신이 젊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군. 힘이 넘치고 기운이 왕성하다 했더니 내가 젊어졌구나.’
금적풍은 환골탈태를 거치며 두 번의 젊음을 경험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노인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했지만, 저승에 도착한 이후로는 다시 이십 대의 청년으로 변모한 것이다.
“푸하핫! 좋아, 좋아!”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헛기침을 하면서 참아 보려고 해도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거 주책이네! 핫핫핫, 그래도 신장이 어디냐. 내가 신과 거의 동격이 된다는 소리와 같잖아!’
금적풍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염라전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염라전의 문을 통과하자, 붉은 천이 깔린 길이 보였다. 양옆으로는 저승의 문관들이 시립해 있었고, 그 끝에는 염라대왕이 거대한 의자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거대했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 열 명을 합쳐 놓은 것 같은 거인이었다. 그는 한 팔로 턱을 괸 채 졸고 있었다. 붉은 얼굴은 장비 수염이 뒤덮여서 험악해 보였다.
‘저 녀석이 염라대왕인가. 가만! 지금 졸고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