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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법사 1권
공갈법사 1권(1화)
서장
작가의 말
글을 쓰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쓰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 보이는 것도, 그 반응을 살피는 것도 무척이나 재미있지요. 그것이 주는 재미를 알아버렸기에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자라는 글재주로 몇 자 끄적이던 단편에서, 몇 권 분량을 넘어가는 장편까지. 공갈법사는 제 세 번째 장편입니다. 현대에서 판타지로, 무림에서 판타지로, 혹은 판타지에서 무림으로 넘어와 극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주인공들을 보다 보니 문득 ‘어째서 차원 이동을 하면 다 강해지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대인 주인공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쓰기 시작했지요.
제 글은 차원 이동물입니다. 하지만 글의 개연성과, 차원이동물이 주는 재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진 것은 보물과 영악한 잔머리뿐인 틸러. 그가 무림에서 펼치는 공갈의 향연을 마음껏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모자란 글을 출판하게 도와주신 출판사분들과, 항상 제 옆에서 도와주는 친인분들. 특히 학업에 소홀해져도 저를 믿고 도와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모자란 글쟁이의 서문을 마칠까 합니다.
팽타준 배상
서장
불바다가 된 도시.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거대한 왕궁 안에서는 노획과 약탈이 한창이었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레이온 왕국이 고작 변방의 소국이었던 페이안에게 이토록 허무하게 멸망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킥킥킥! 분명히 이쪽이었지?”
하지만 그런 밖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사내가 있었다. 오래된 성이라면 꼭 하나씩 있는 비밀 통로. 게다가 그 비밀 통로의 끝에 있는 것이 5,0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레이온 왕국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란 것은, 이 사내의 목적이 결코 정의로운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비밀 통로를 한참 동안 걷던 이 호리호리한 사내는 이윽고 낡은 나무문을 발견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오, 군사! 아직도 살아 계셨구려!”
“히히! 예에, 폐하. 아직 살아 있습니다. 폐하도 이곳에서 옥체 보존하고 계시었군요?”
묘하게 비꼬는 말투였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왕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천재적인 화술과 언변을 지닌 군사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왕은 천천히 군사라 불린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의 손에 딱딱하게 말아 쥔 마법서가 들려 있다는 사실 또한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틸러 군사, 이제 이 일을 어찌 헤쳐 나가면 좋겠소? 우리 왕가의 역사를 이대로 끝낼 순 없지 않소?”
왕은 절박하게 호소했다. 틸러는 그런 왕에게 안심하라는 듯 씩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음흉함을 전혀 읽어 내지 못한 왕은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에게 다 방법이 있나이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오오, 그래! 그 방법이 무엇인… 크헉!”
빠악!!
군사에게 다가가던 왕의 목덜미로 굳게 말아 쥐고 있던 마법서가 작렬했다. 불시의 습격인 데다 의외로 마법서의 강도가 단단했기에 왕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무슨. 그동안 네가 벌여 놓은 일들 수습하느라 진을 뺀 것을 생각하면……. 보물을 건드리지는 않았으니 이 정도에서 봐주는 줄 알라고. 퉤!”
쓰러진 왕에게 욕설을 내뱉던 틸러는 물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이내 제단 위의 금빛 잔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것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이, 이것이 그 전설의 신기 아소왕의 잔……. 흐흐! 여기서 며칠 버티며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이걸 가지고 나가서 팔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겠군. 킥킥!”
그는 잔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손에 말아 쥐고 있던 마법서를 펼쳤다. 그의 스승이 물려준 이 책은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는 특수한 종이로 만들어진 1클래스 마법서였다.
“어디 보자! 저주 해제 마법이 어디 있더라? 아, 여기 있군.”
그는 저주 해제 마법의 공식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손에 푸른빛이 맺혔다. 혹시나 침입한 자에게 저주라도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푸른빛이 맺힌 손으로 잔을 붙잡은 순간.
콰르릉!
“크헉!!”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서서히 의식을 놓아 가는 틸러였다.
제1장 여래불 강림(1)
아미산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고악문(古嶽門). 그 거대한 문을 사이에 두고 비구니들과 도사들이 대치해 있었다. 아미의 무승 천화(玔花)는 격분한 듯했다.
“물러가시오! 벌써 다섯 번째요. 아미산으로는 지나갈 수 없다지 않소!”
이제는 지겹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도사들은 비웃듯 올려다보았다.
“그저 길을 비켜 주기만 하면 되지 않소. 우리는 아미파에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 볼일이 있소.”
청성파 도사들은 능글맞게 말하며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청성은 도가의 도사들이 무공을 연마하며 도를 닦는 곳이었으나 이미 예전의 고귀한 뜻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겉으로는 권력 싸움에 초탈하고 수도에 열중한 듯 보였지만 음지에선 명산과 명지들을 돌며 각종 영약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비구니들이었기에 강력히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천화는 주먹을 쥐어 올렸다. 오늘은 저들도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소. 스님들껜 죄송한 일이나 우리들도 무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겠구려.”
태현(太泫)도장은 쥐새끼처럼 찢어진 눈을 번뜩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여승들은 긴장한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나긋나긋하게 걸어오는 태현도장의 모양새는 신학검법(神鶴劍法)을 수련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아미의 권법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일류고수라 불릴 정도의 실력을 지닌 태현도장에게 그녀들의 실력이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죽이진 않을 테니 용서하시오!”
솨악! 솨아악!
검을 휘두르는 손짓이며 몸짓 하나하나가 나풀나풀 날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그 검을 피해 내기는 쉽지 않다. 마치 날갯짓을 하듯 부드럽게 흘러 들어오는 검의 물결에 천화의 승복은 조금씩 찢어지고 있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다는 명목이긴 하나 태현도장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문을 지키고 있는 일개 수문장 역할의 비구니들이니 무승이라 해도 자신과의 실력은 천양지차. 그러니 싸움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격을 피해 가는 천화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비록 출가한 몸이라 하나 여자였다. 그런데 검이 자신의 몸을 노리기는커녕 애꿎은 승복만을 연신 찢어 대고 있었으니, 이 도사의 목적은 자신을 이기면서 수치심까지 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 능글맞은 면상에 주먹을 박아 넣고 싶었지만 그의 검로가 교묘하여 다가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당해서 아미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이잇!!”
콰르릉! 콰앙!
천화가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을 때,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천화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지른 주먹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일까. 그녀 앞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사내가 기절한 태현도장을 발로 툭 걷어차며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이 씨! 뭐야, 공간 이동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건가? 운도 더럽게 없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다시 돌아가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사람은 바로 틸러. 그는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문지르다가 왠지 머리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법서를 들고 있는 왼손을 머리에 가져다 댄 틸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머, 머리카락이 다 타 버렸잖아!”
자신이 번개에 맞을 때의 충격으로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다 타 버린 것 같았다. 텔레포트 마법은 몸을 먼저 이동시키고 그 후에 옷을 이동시키는 순차 이동 방식인데, 그 마법에 주입한 마력이 너무 강할 경우 번개가 발생해 옷이나 머리카락 등이 타 버리는 일이 왕왕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틸러는 머리털만 홀랑 타 버렸던 것이다.
한편, 천화 스님과 나머지 여승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내의 복장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황금으로 수를 놓은 말끔한 면 옷에, 왼손에는 고서로 보이는 낡은 책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황금으로 된 큰 잔을 들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눈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왼손에는 책을, 오른손에는 만병통치한다는 자비의 잔을 들고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빛 눈의 스님. 퍼뜩 천화의 머리에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야, 약사여래불! 천오백 년에 한 번 강림하신다는 자비와 심판의 부처께서 지금 강림하셨단 말인가!’
“나, 나무아미타불! 소, 소승 약사여래불을 알현하나이다!”
천화 스님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제야 다른 비구니들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스쳐 갔다. 약사여래불! 저 황금빛 눈을 가진 스님이 약사여래불의 본신이란 말인가! 이내 비구니들은 모두 틸러 앞에 엎드렸다.
반면 틸러는 눈앞에 벌어진 이 황당한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다 타 버린 것도 황당한데 이 대머리들이 갑자기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는가! 게다가 언어도 난생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제, 젠장! 상태를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데, 일단 언어 통역 마법을…….’
틸러는 재빨리 책을 폈다. 오른손에 잔을 들고 있어 조금 불편했지만 어렵지 않게 언어 통역 마법이 적힌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야, 약사여래불이시여, 어찌하여 지상으로 강림하셨나이까?”
‘약사여래불?’
자신의 바로 앞에 넙죽 절을 하고 있는 이 여자 대머리는 자신을 약사여래불이라 칭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만! 그렇다는 건, 이 여자들은 내가 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인가?’
“고개를 들라.”
틸러는 고고하게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천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은 듯 뜬 듯하고 있는 저 여래불의 얼굴이 어찌 저리도 성스러워 보이는가. 항상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강림하여 약자들을 구원하고 병자들을 치료한다는 바로 그 약사여래불의 본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사고를 조금 마비시킨 듯했다.
그때 틸러는 눈을 내리깔고 마법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원하던 마법을 찾아냈다.
“나 약사여래불은 그대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노라.”
“여, 여래불의 말씀을 받드나이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곳곳에서 비구니들의 염불이 이어졌다. 틸러의 잔머리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줘야 할 때라고 외치고 있었다.
번쩍!
라이트 마법의 효과가 발휘되었다. 단순히 온몸에서 빛이 나게 하는 1클래스의 간단한 마법일 뿐이지만, 비구니들에게는 약사여래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영롱한 후광으로 비춰졌다. 천화는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한편, 청성의 도사들은 어이가 없었다. 하늘에서 번개를 타고 온 땡중이 자신을 약사여래불이라 칭하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 사술을 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 멍청한 비구니들은 알아서 기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익! 이 땡중이…….”
그때, 기절했던 태현도장이 욱신거리는 허리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내 그는 틸러에게 다가갔다.
“죽어라!”
쒜엑!
“히익!”
틸러는 갑자기 일어난 장발 사내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자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철커덕! 티잉!
곧 서슬 퍼런 검이 자신을 내려칠 것이라 생각했건만, 돌아온 것은 전혀 의외의 소리. 틸러는 잔뜩 찡그리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헉!”
깜짝 놀란 듯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는 태현도장이 틸러의 눈에 들어왔다.
‘저 자식이 왜 저러지?’
하지만 의문은 금세 풀렸다.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황금잔에 검이 철커덕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 어째서? 설마……!’
틸러는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마력이 오른손을 타고 그 황금잔에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을 거두자 이내 검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하핫! 보았느냐! 나는 절대 죽지 않는 불사의 몸! 이 몸에게 상처를 입히려 한 자는 죽음으로 값을 치를 것이다!”
틸러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든 후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황금잔에 조금의 마력을 불어넣으면 곧장 초강력 자석으로 돌변하는 듯했다. 게다가 잔의 크기도 상당히 큰지라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법했다.
청성의 도사들은 그제야 그가 진짜 약사여래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저자가 정말 번개를 타고 온 것이라면? 저자가 정말 약사여래불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그들의 사형인 태현도장의 얼굴은 여전히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엇들 하는 게냐! 저 땡중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라!”
“예, 예엣!”
채앵!
사방에서 번뜩이는 검들이 뽑혀 나왔다. 그러자 틸러는 오른팔을 앞으로 휘익 들어 올렸다.
“아브라카다브라!”
그는 무언가 신성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눈을 감으며 주문을 내뱉었다. 사실은 잔에 마력을 조금 불어넣고 있을 뿐이었지만.
척! 처처척! 척!
이내 열다섯 개의 검이 허공을 갈라 황금잔으로 날아들었다.
“우와앗!”
“으악!”
도사들은 그 모습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순식간에 저 기인에게 날아들지 않았는가!
“허공섭물(虛空攝物)!”
한 도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손을 대지 않고도 멀리의 물건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경지인 허공섭물. 태현도장의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공갈법사 1권(1화)
서장
작가의 말
글을 쓰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쓰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 보이는 것도, 그 반응을 살피는 것도 무척이나 재미있지요. 그것이 주는 재미를 알아버렸기에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자라는 글재주로 몇 자 끄적이던 단편에서, 몇 권 분량을 넘어가는 장편까지. 공갈법사는 제 세 번째 장편입니다. 현대에서 판타지로, 무림에서 판타지로, 혹은 판타지에서 무림으로 넘어와 극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주인공들을 보다 보니 문득 ‘어째서 차원 이동을 하면 다 강해지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대인 주인공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쓰기 시작했지요.
제 글은 차원 이동물입니다. 하지만 글의 개연성과, 차원이동물이 주는 재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진 것은 보물과 영악한 잔머리뿐인 틸러. 그가 무림에서 펼치는 공갈의 향연을 마음껏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모자란 글을 출판하게 도와주신 출판사분들과, 항상 제 옆에서 도와주는 친인분들. 특히 학업에 소홀해져도 저를 믿고 도와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모자란 글쟁이의 서문을 마칠까 합니다.
팽타준 배상
서장
불바다가 된 도시.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거대한 왕궁 안에서는 노획과 약탈이 한창이었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레이온 왕국이 고작 변방의 소국이었던 페이안에게 이토록 허무하게 멸망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킥킥킥! 분명히 이쪽이었지?”
하지만 그런 밖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사내가 있었다. 오래된 성이라면 꼭 하나씩 있는 비밀 통로. 게다가 그 비밀 통로의 끝에 있는 것이 5,0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레이온 왕국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란 것은, 이 사내의 목적이 결코 정의로운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비밀 통로를 한참 동안 걷던 이 호리호리한 사내는 이윽고 낡은 나무문을 발견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오, 군사! 아직도 살아 계셨구려!”
“히히! 예에, 폐하. 아직 살아 있습니다. 폐하도 이곳에서 옥체 보존하고 계시었군요?”
묘하게 비꼬는 말투였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왕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천재적인 화술과 언변을 지닌 군사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왕은 천천히 군사라 불린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의 손에 딱딱하게 말아 쥔 마법서가 들려 있다는 사실 또한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틸러 군사, 이제 이 일을 어찌 헤쳐 나가면 좋겠소? 우리 왕가의 역사를 이대로 끝낼 순 없지 않소?”
왕은 절박하게 호소했다. 틸러는 그런 왕에게 안심하라는 듯 씩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음흉함을 전혀 읽어 내지 못한 왕은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에게 다 방법이 있나이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오오, 그래! 그 방법이 무엇인… 크헉!”
빠악!!
군사에게 다가가던 왕의 목덜미로 굳게 말아 쥐고 있던 마법서가 작렬했다. 불시의 습격인 데다 의외로 마법서의 강도가 단단했기에 왕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무슨. 그동안 네가 벌여 놓은 일들 수습하느라 진을 뺀 것을 생각하면……. 보물을 건드리지는 않았으니 이 정도에서 봐주는 줄 알라고. 퉤!”
쓰러진 왕에게 욕설을 내뱉던 틸러는 물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이내 제단 위의 금빛 잔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것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이, 이것이 그 전설의 신기 아소왕의 잔……. 흐흐! 여기서 며칠 버티며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이걸 가지고 나가서 팔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겠군. 킥킥!”
그는 잔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손에 말아 쥐고 있던 마법서를 펼쳤다. 그의 스승이 물려준 이 책은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는 특수한 종이로 만들어진 1클래스 마법서였다.
“어디 보자! 저주 해제 마법이 어디 있더라? 아, 여기 있군.”
그는 저주 해제 마법의 공식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손에 푸른빛이 맺혔다. 혹시나 침입한 자에게 저주라도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푸른빛이 맺힌 손으로 잔을 붙잡은 순간.
콰르릉!
“크헉!!”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서서히 의식을 놓아 가는 틸러였다.
제1장 여래불 강림(1)
아미산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고악문(古嶽門). 그 거대한 문을 사이에 두고 비구니들과 도사들이 대치해 있었다. 아미의 무승 천화(玔花)는 격분한 듯했다.
“물러가시오! 벌써 다섯 번째요. 아미산으로는 지나갈 수 없다지 않소!”
이제는 지겹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도사들은 비웃듯 올려다보았다.
“그저 길을 비켜 주기만 하면 되지 않소. 우리는 아미파에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 볼일이 있소.”
청성파 도사들은 능글맞게 말하며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청성은 도가의 도사들이 무공을 연마하며 도를 닦는 곳이었으나 이미 예전의 고귀한 뜻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겉으로는 권력 싸움에 초탈하고 수도에 열중한 듯 보였지만 음지에선 명산과 명지들을 돌며 각종 영약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비구니들이었기에 강력히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천화는 주먹을 쥐어 올렸다. 오늘은 저들도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소. 스님들껜 죄송한 일이나 우리들도 무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겠구려.”
태현(太泫)도장은 쥐새끼처럼 찢어진 눈을 번뜩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여승들은 긴장한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나긋나긋하게 걸어오는 태현도장의 모양새는 신학검법(神鶴劍法)을 수련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아미의 권법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일류고수라 불릴 정도의 실력을 지닌 태현도장에게 그녀들의 실력이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죽이진 않을 테니 용서하시오!”
솨악! 솨아악!
검을 휘두르는 손짓이며 몸짓 하나하나가 나풀나풀 날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그 검을 피해 내기는 쉽지 않다. 마치 날갯짓을 하듯 부드럽게 흘러 들어오는 검의 물결에 천화의 승복은 조금씩 찢어지고 있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다는 명목이긴 하나 태현도장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문을 지키고 있는 일개 수문장 역할의 비구니들이니 무승이라 해도 자신과의 실력은 천양지차. 그러니 싸움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격을 피해 가는 천화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비록 출가한 몸이라 하나 여자였다. 그런데 검이 자신의 몸을 노리기는커녕 애꿎은 승복만을 연신 찢어 대고 있었으니, 이 도사의 목적은 자신을 이기면서 수치심까지 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 능글맞은 면상에 주먹을 박아 넣고 싶었지만 그의 검로가 교묘하여 다가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당해서 아미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이잇!!”
콰르릉! 콰앙!
천화가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을 때,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천화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지른 주먹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일까. 그녀 앞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사내가 기절한 태현도장을 발로 툭 걷어차며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이 씨! 뭐야, 공간 이동 마법이 걸려 있었던 건가? 운도 더럽게 없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다시 돌아가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사람은 바로 틸러. 그는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문지르다가 왠지 머리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법서를 들고 있는 왼손을 머리에 가져다 댄 틸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머, 머리카락이 다 타 버렸잖아!”
자신이 번개에 맞을 때의 충격으로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다 타 버린 것 같았다. 텔레포트 마법은 몸을 먼저 이동시키고 그 후에 옷을 이동시키는 순차 이동 방식인데, 그 마법에 주입한 마력이 너무 강할 경우 번개가 발생해 옷이나 머리카락 등이 타 버리는 일이 왕왕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틸러는 머리털만 홀랑 타 버렸던 것이다.
한편, 천화 스님과 나머지 여승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내의 복장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황금으로 수를 놓은 말끔한 면 옷에, 왼손에는 고서로 보이는 낡은 책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황금으로 된 큰 잔을 들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눈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왼손에는 책을, 오른손에는 만병통치한다는 자비의 잔을 들고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빛 눈의 스님. 퍼뜩 천화의 머리에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야, 약사여래불! 천오백 년에 한 번 강림하신다는 자비와 심판의 부처께서 지금 강림하셨단 말인가!’
“나, 나무아미타불! 소, 소승 약사여래불을 알현하나이다!”
천화 스님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제야 다른 비구니들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스쳐 갔다. 약사여래불! 저 황금빛 눈을 가진 스님이 약사여래불의 본신이란 말인가! 이내 비구니들은 모두 틸러 앞에 엎드렸다.
반면 틸러는 눈앞에 벌어진 이 황당한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다 타 버린 것도 황당한데 이 대머리들이 갑자기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는가! 게다가 언어도 난생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제, 젠장! 상태를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데, 일단 언어 통역 마법을…….’
틸러는 재빨리 책을 폈다. 오른손에 잔을 들고 있어 조금 불편했지만 어렵지 않게 언어 통역 마법이 적힌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야, 약사여래불이시여, 어찌하여 지상으로 강림하셨나이까?”
‘약사여래불?’
자신의 바로 앞에 넙죽 절을 하고 있는 이 여자 대머리는 자신을 약사여래불이라 칭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만! 그렇다는 건, 이 여자들은 내가 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인가?’
“고개를 들라.”
틸러는 고고하게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천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은 듯 뜬 듯하고 있는 저 여래불의 얼굴이 어찌 저리도 성스러워 보이는가. 항상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강림하여 약자들을 구원하고 병자들을 치료한다는 바로 그 약사여래불의 본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사고를 조금 마비시킨 듯했다.
그때 틸러는 눈을 내리깔고 마법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원하던 마법을 찾아냈다.
“나 약사여래불은 그대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노라.”
“여, 여래불의 말씀을 받드나이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곳곳에서 비구니들의 염불이 이어졌다. 틸러의 잔머리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줘야 할 때라고 외치고 있었다.
번쩍!
라이트 마법의 효과가 발휘되었다. 단순히 온몸에서 빛이 나게 하는 1클래스의 간단한 마법일 뿐이지만, 비구니들에게는 약사여래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영롱한 후광으로 비춰졌다. 천화는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한편, 청성의 도사들은 어이가 없었다. 하늘에서 번개를 타고 온 땡중이 자신을 약사여래불이라 칭하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 사술을 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 멍청한 비구니들은 알아서 기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익! 이 땡중이…….”
그때, 기절했던 태현도장이 욱신거리는 허리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내 그는 틸러에게 다가갔다.
“죽어라!”
쒜엑!
“히익!”
틸러는 갑자기 일어난 장발 사내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자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철커덕! 티잉!
곧 서슬 퍼런 검이 자신을 내려칠 것이라 생각했건만, 돌아온 것은 전혀 의외의 소리. 틸러는 잔뜩 찡그리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헉!”
깜짝 놀란 듯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는 태현도장이 틸러의 눈에 들어왔다.
‘저 자식이 왜 저러지?’
하지만 의문은 금세 풀렸다.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황금잔에 검이 철커덕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 어째서? 설마……!’
틸러는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마력이 오른손을 타고 그 황금잔에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을 거두자 이내 검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하핫! 보았느냐! 나는 절대 죽지 않는 불사의 몸! 이 몸에게 상처를 입히려 한 자는 죽음으로 값을 치를 것이다!”
틸러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든 후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황금잔에 조금의 마력을 불어넣으면 곧장 초강력 자석으로 돌변하는 듯했다. 게다가 잔의 크기도 상당히 큰지라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법했다.
청성의 도사들은 그제야 그가 진짜 약사여래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저자가 정말 번개를 타고 온 것이라면? 저자가 정말 약사여래불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그들의 사형인 태현도장의 얼굴은 여전히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엇들 하는 게냐! 저 땡중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라!”
“예, 예엣!”
채앵!
사방에서 번뜩이는 검들이 뽑혀 나왔다. 그러자 틸러는 오른팔을 앞으로 휘익 들어 올렸다.
“아브라카다브라!”
그는 무언가 신성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눈을 감으며 주문을 내뱉었다. 사실은 잔에 마력을 조금 불어넣고 있을 뿐이었지만.
척! 처처척! 척!
이내 열다섯 개의 검이 허공을 갈라 황금잔으로 날아들었다.
“우와앗!”
“으악!”
도사들은 그 모습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순식간에 저 기인에게 날아들지 않았는가!
“허공섭물(虛空攝物)!”
한 도사가 탄성을 내질렀다. 손을 대지 않고도 멀리의 물건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경지인 허공섭물. 태현도장의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