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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법사 1권(2화)
제1장 여래불 강림(2)
“제, 젠장! 돌아가자!”
태현도장은 몸을 돌렸다. 태현도장이 단박에 꼬리를 내린 것은 상대가 허공섭물을 구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허공섭물의 경지라 해도 동시에 열다섯 명의, 그것도 각자의 내공이 담긴 검들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별달리 어려운 기색도 없이 그 일을 해내지 않았는가. 극상승의 경지라 알려진 허공섭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수. 그러니 그 자리를 황급히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틸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검을 쥐어 들고 있었다. 상당히 정교하게 세공된 것이 한두 푼이 아닐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모양이 아닌가. 잘 꿍쳐 뒀다가 나라로 돌아갔을 때 팔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을 듯했다. 게다가…….
“여래불의 힘은 과연 지대하시나이다.”
이 여자 대머리들은 자기가 약사 어쩌고 하는 신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잘만 하면…….
‘앞으로 팔자 피겠군. 크크큭!’
“흐음, 저들은 누구인고? 본좌의 몸에 칼을 대려 하다니, 천벌을 받을지어다.”
천화는 약사여래불의 한마디 한마디에 감명을 받고 있었다.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곧 청성의 무리들을 척결해 준다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가!
“그런데 오랜만에 인간세계로 내려왔더니 배가 고프구먼.”
틸러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크게 미안하다는 듯한 말투. 천화는 겸손하기까지 한 약사여래불의 참모습에 감동을 받은 듯 눈을 반짝이며 그를 안내했다.
“큰일 났습니다! 스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너도 이제 출가했으니 조금은 체통을 지키는 것이 어떠냐?”
천화가 한달음에 복호사로 달려 올라왔다.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소불(小佛)은 그녀를 조심스레 나무랐다. 작은 부처라는 법명이 무척이나 어울리게 인자한 데다 성격도 부드러운 비구니. 천화는 몇 번 숨을 고르다 복호사가 떠나갈 정도의 큰 소리로 외쳤다.
“약사여래불의 진신(瞋身)이 강림하셨습니다!”
“뭬야!? 방금 뭐라고 했느냐!”
천화가 뱉어낸 말은 복호사가 한번 뒤집어지고도 남을 만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미의 비구니들은 체통도 잊은 채 그녀가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제2장 부처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1)
틸러는 복호사의 대문 앞에서 삼십 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씨! 무슨 놈의 대머리들이 이렇게 느려 터진 거지? 그러고 보니 나도 대머리잖아? 젠장! 이 나라에는 대머리가 유행인가? 아까 그 녀석들은 또 장발이구. 극한을 좋아하는 녀석들이군.”
이 이상하게 생긴 집안은 엄청나게 소란스러웠다. 분명 아까 그 처녀 대머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경건한 주문 소리와 종소리가 들려왔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난 것처럼 시끌시끌해졌다. 틸러는 한층 심하게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연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안이 조용해지자 틸러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른손에 굳건히 쥔 황금잔을 가슴팍으로 들어 올리고, 왼손의 마법서도 펴기 쉽게 고쳐 쥐었다. 그가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안에서 조금 늙은 여자 대머리 두 명과 젊은 여자 대머리 여섯이 걸어 나왔다. 그 대머리들은 틸러를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언어 통역 마법의 시전을 멈춘 탓인지 저 옆에서 연신 귓속말을 하고 있는 천화라는 여자 대머리의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별수 없지. 배고파 죽겠는데 자꾸 마력을 소모하게 만드네. 쳇!’
틸러는 짐짓 여유로운 척 마법서를 펼쳐 들고 언어 통역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마법이 시전되기가 무섭게 대머리들이 자신에게 넙죽 절을 하기 시작했다.
“여래불을 모십니다!”
“오, 오냐.”
틸러는 이제 이 대머리들이 하는 짓거리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무슨 이유에서 자기가 ‘약사여래불’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이 집의 크기를 봤을 때 여기서 잘 빌붙으면 죽을 때까지 호강하면서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프구나.”
“다, 당장 공양을 올리겠나이다. 천화는 이곳에 남아 여래불을 모시어라.”
늙은 여자 대머리는 허둥지둥 다른 이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다시 그 젊은 여자 대머리와 함께 있게 된 틸러.
“집이 크구나.”
“부처님의 도량이니만큼 성대하고 경건하게 지었지요.”
천화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역시 약사여래불은 무언가가 달라도 달랐다. 절을 집이라 하지 않는가.
틸러와 천화는 아미파의 본관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이 딸린 앞마당을 지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른 문파의 장문인이나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사용하는 성불채. 이곳에서 머문다는 것은 아미파의 장문인과 동급으로 대우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틸러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천화는 틸러를 방으로 안내하고 잠시 후 식사가 담긴 상을 들고 나타났다. 큰 저택이니만큼 보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리라는 기대에 틸러는 손을 문지르며 상을 내려다보았다.
‘뭐, 뭐야? 풀 쪼가리들뿐이잖아!’
“여래불께서 잡수시는 공양인지라 평소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썼습니다. 입에 맞으시는지요?”
“아, 그, 그래. 맛있구나. 밥 먹을 때 빤히 쳐다보는 것도 좋지 않으니 잠시 나가 있어라. 밥을 다 먹고 나면 이 집의 안내나 좀 받아야겠다.”
“예.”
천화가 밖으로 나가자 틸러는 밥상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무슨 염소도 아니고 풀 쪼가리만 먹으라니. 게다가 이 희멀건 것은 난생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한 수저 떠먹어 보았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옌장! 이게 신경 쓴 것이면 죽을 때까지 고기라고는 구경도 못하겠군. 그런데… 왜 내가 왼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거지?”
자신이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틸러. 그는 오른손으로 수저를 고쳐 쥐려다가 이내 놀란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 손에서 떨어지지가 않아!’
황금잔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놓으려 해도 접착제를 붙여 놓은 듯 딱 달라붙어 있다. 틸러는 순식간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평생 이런 거추장스러운 잔을 붙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혹여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틸러의 신음 소리가 꽤 컸나 보다. 밖에서 천화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틸러는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아, 아니다. 맛이 아주 좋구나. 이제 다 먹었다.”
사실은 두 숟가락 퍼먹었을 뿐이었기에 뱃속에서는 위장이 요동치고 있었지만, 틸러는 이미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다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큰 집에서 돈 될 만한 것들을 한탕 쳐서 다 팔아먹은 뒤, 평생 놀고먹는 것으로. 평생 이런 풀 쪼가리만 먹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지 않은가.
틸러는 천화의 안내를 받으며 복호사의 내부를 돌기 시작했다. 그중 단연 틸러의 눈길을 끈 것이라면 대웅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방. 거대한 황금상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그곳이 틸러에게는 돈덩어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화는 가장 큰 황금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여래불의 불상이옵니다. 저희는 여래불을 극진히 모시고 있었답니다.”
“흐음, 그렇구나. 그런데 이 불상들의 값어치는 얼마나 되느냐?”
“예?”
천화는 방금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틸러에게 되물었다. 틸러는 아차 하는 마음에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이 불상들이 너에게는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냐는 말이다.”
“아, 예. 부처님은 항상 제 마음에 계십니다.”
천화는 여래불이 자신을 시험한다고 여기고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말로 대답을 한 후, 여래불의 안색을 살폈다. 여래불은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자신의 대답이 잘못된 것인가?
“항상 열심히 스스로를 갈고닦아라. 다음 방으로 가자.”
대웅전을 떠나며 언젠간 저 불상들을 어떻게든 팔아먹어야겠다고 다짐하는 틸러였다.
이제 그들은 무승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연무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나 머리를 깎은 대머리들이, 아니 이곳 말로는 비구니들이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헙! 헙!”
슈욱! 슈욱!
무공을 수련하는 이들의 주먹에서는 푸른, 혹은 무형의 기운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이 있던 국가에서라면 소드 익스퍼트, 혹은 오러 나이트 급의 무위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많은 비구니들이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니. 내가 속였다는 것을 들킨다면 뼈도 추리지 못하겠구나.’
틸러는 어떻게든 한탕 쳐서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굳혔다. 분명 돈도 많고 모자란 것은 없지만 자신과는 여러 가지 맞지 않는 점들이 있지 않은가. 태연한 듯 연무전 안을 둘러보던 틸러는 저만치를 가리켰다.
“머리를 깎지 않은 아이들도 있구나?”
“예. 속가제자들이옵니다. 저 아이들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습니다.”
예닐곱 명 정도 되는 여자아이들이 역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특출하구나.”
‘얼굴이.’
틸러는 한 여자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곱게 빗은 머리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름답게 찰랑이고, 큰 갈색 눈동자와 오뚝한 코, 게다가 선홍색의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까지.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지만, 일 년 정도만 키우면 자신의 첩으로 삼아도 될 법했다.
“과연 여래불이십니다. 저 아이는 속가제자들뿐 아니라 동 나이 대의 무승들 중에서도 특출하게 무공의 성취가 뛰어나답니다.”
천화는 연달아 여래불의 안목에 탄복하고 있었다. 한번 스윽 훑어본 것만으로도 가장 무위가 높은 아이를 선별해 내지 않았는가. 하지만 틸러는 이미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탐욕이 줄줄 흐르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꺄앗, 깜짝이야. 나, 남자잖아!”
틸러가 넌지시 말을 건네자 뒤를 돌아본 여자아이는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틸러는 이 아이가 왜 이러는지 까닭도 알지 못한 채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무서워하지 말거라. 나쁜 사람이 아니니.”
“꺄앗! 다가오지 마!”
퍼어억!
하지만 틸러는 이내 하늘이 빙빙 돌고 눈앞에 별이 번쩍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반사적으로 내지른 주먹이 배에 박히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온몸을 덮쳐 온 것이다.
“무슨 짓이냐! 감히 여래불의 존체에 상처를 입히다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후, 소녀는 길길이 화를 내며 소리치는 천화에게 연신 고개를 굽실거리고 있었다. 그 공격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틸러는 한참 만에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괘, 괜찮네. 뭐라 하지 말게. 이곳에 현신한 이상 나도 인간의 몸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구먼.”
“괘, 괜찮으십니까, 여래불?”
그 상황에서도 공갈치는 것을 잊지 않는 틸러였다. 천화는 얼른 그에게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틸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는 틸러를 올려다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아마 미안함 때문이리라.
“아직 법명은 없사옵고, 이름은 연랑(姸朗)이라 하옵니다.”
‘크크. 그래? 목소리도 곱군.’
틸러는 사악한 웃음을 속으로 삼키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꾸중을 받으리라 생각했는지 안절부절못하며 틸러의 눈치를 연신 살피고 있었다.
“그래. 앞으로 내 수발을 들어라. 내 몸이 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상당히 약한데, 너의 주먹에 잘못하면 망가질 뻔했구나.”
연랑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혼이 날 줄 알았건만 오히려 여래불을 옆에서 모실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여래불, 이런 아이로 되시겠습니까? 겉보기엔 말끔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 아이는 보기보다 실수가 많습니다.”
천화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틸러는 ‘시끄러!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하고 소리 지르려던 입을 억지로 막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걱정하지 말게. 이 아이는 앞으로 크게 될 것이 보이나니. 내 옆에 두고 이 아이를 가르칠까 하네.”
‘내 손안에 넣어 둬야 내가 원하는 대로 클 테지, 크크크큭!’
틸러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소녀가 일이 년 후에 변할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천화는 또다시 그에게 크게 감명 받았는지 이내 몸을 숙였다.
“여래불의 깊은 뜻을 몰라 뵈었나이다, 용서하소서. 뭐 하느냐, 여래불을 모시어라.”
“예, 예에.”
옆으로 다가온 연랑이 틸러의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사실 십육 세 소녀의, 내공도 제대로 담기지 않은 주먹에 맞았다고 그렇게 심하게 내상을 입을 리가 있겠는가. 어떻게든 연랑과 스킨십을 하기 위한 틸러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순간이었다.
‘크크, 가까이에서 보니 더 예쁘잖아!’
“무어라 하셨사옵니까?”
“아, 아니다. 가까이서 보니 아주 아름답구나.”
틸러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랑은 태어나서 난생처음 보는 남자였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과, 과찬이시옵니다.”
고개를 숙이는 연랑이 더욱 귀여워 보이는 틸러였다. 연랑은 잠시 멈춰 선 채로 머뭇거리다가 다시 수줍게 입을 열었다.
“성불채로 가시면 되나이까?”
“음? 아니다. 혹시 이곳에 서고 같은 곳이 있느냐?”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이곳의 문화나 이야기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상식과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 필요했다. 연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틸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도 평소에 서고에 가고 싶었던 듯 눈까지 반짝인다.
“안내하여라.”
“네!”
틸러의 말에 연랑은 고개를 끄덕이곤 틸러를 부축한 채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틸러는 행복하기만 했다. 이 정도 미인은 자신이 있던 왕국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가 아닌가. 게다가 자신이 있던 곳의 여인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이목구비가 신비함까지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