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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법사 1권(3화)
제2장 부처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2)


틸러는 예전부터 여자 후리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스킨십을 해야 하는지, 어디서 어떤 멘트를 날려 줘야 하는지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다. 하물며 세상 경험 없고 남자라고는 난생처음 보는 십육 세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 정도야 눈 감고 하고도 남을 일이 아니겠는가.
“머릿결이 좋구나. 앞으로 출가하면 이 머리를 다 자를 생각이냐?”
“아마 잘라야 하겠지요.”
“그러지 말거라. 너는 긴 머리가 훨씬 아름답다.”
연랑은 여래불의 이런 말들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부처라지만 난생처음 접하는 남자인 데다 그의 말은 무언가 빠져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 연랑의 모습을 보며 틸러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천계에 있는 동안 이곳의 불법이 어찌 바뀌었는지 보도록 하자. 불법에 대한 것들부터 하나하나 읽어 주거라.”
“예? 제가 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서고에 도착한 틸러는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랑은 자신에게 책을 읽으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지 않느냐. 허허.”
사실은 이 나라의 글자를 모른다. 틸러는 잘못하면 들킬 것들을 세 치 혀로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으로 연랑이란 소녀와의 친밀도를 더욱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예. 그런데 저… 혹시…….”
“음? 무엇이 궁금하느냐? 말해 보거라.”
연랑이 머뭇머뭇 입을 열자 틸러는 맑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연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틸러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자비의 잔… 계속 들고 있으려면 무겁지 않으세요?”
그제야 틸러는 자신의 오른손에 착 붙어 있는 황금잔을 내려다보았다. 볼 때마다 한숨만 쏟아진다.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으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이것은 내 목숨과도 같은 것이니라. 내가 잔을 손에서 놓는 날은 아마 죽고 난 뒤가 아닐까 싶구나.”
“과연……!”
연랑은 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런 눈빛이다.
‘도대체 이 인간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감동을 받는군.’
속으로 이곳 인간들의 어수룩함을 비웃는 틸러와 달리 연랑은 그에 대한 이미지를 서서히 잡아가고 있었다.
잘생기고 키도 큰 데다 능력도 있고,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평생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약사여래불. 저런 사람과 혼인하면 평생 행복할 것이다.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으음? 무슨 말이냐?”
“아, 아니어요. 책 읽어 드리겠습니다.”
금세 자기 머리를 탁 치며 망상에서 깨어난 연랑.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말을 바꾸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불법과 불가로서의 도리를 듣고 있던 틸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찡그려졌다. 도대체가 이곳은 지옥이 아닌가! 여색을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살생도 안 되고 육식도 안 되고 폭음도 안 되고 싸움도 안 되고 거짓말도 안 되고……. 도대체 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것들의 절반 이상은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 이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어.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이제는 거의 필사적으로 이곳에서 나갈 계획을 짜기 시작한 틸러였다.

그로부터 한 달간 틸러는 연랑과 항상 함께 다니며 그녀가 읽어 주는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워 갔다. 물론 그녀에게의 작업도 순조로워서 둘만 있을 때는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르도록 만들었다. 연랑은 여래불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하다가도 몇 주일이 지나자 자연스레 오라버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생활하는 것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또한 알아낸 것도 여러 가지 있었는데, 이곳은 절이라는 수도처로 결코 큰 집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단순한 절이 아닌 무공을 수련하는 문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외 여러 지식들을 습득하면서 틸러는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치기에 이곳은 최적의 환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법이란 것도 없고, 얼마든지 거짓말하고 부풀려서 상대를 믿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최상의 조건들을 모두 갖춘 곳이 아닌가.
“무슨 생각을 하시어요, 오라버니?”
“아, 아니다. 계속 읽어 보거라.”
그녀는 강호의 이야기들이 적힌 책자를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미파 내에서는 약사여래불이 서고에서 지상의 일들을 모두 들으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며 밥까지 그가 있는 서고로 가져다주었다. 더불어 틸러가 한 말이 씨가 되어 연랑은 아미의 후기지수 후보에도 오르고 더욱 깊은 무공들까지 배우게 되었다. 틸러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빨리 자라라고 속으로 수백 번도 더 외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틸러의 머리카락도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다시 틸러를 경악하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찰랑찰랑한 직모였던 그의 머리가 번개를 맞은 탓인지 곱슬머리로 변했다는 것이다. 완전히 꼬불꼬불한 곱슬머리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꼬인 머리카락이 되어 버려서 머리카락이 자란 틸러의 모습은 어찌 보면 정말 약사여래불의 불상과 흡사해 보였다.
“오라버니, 그런데 항상 오라버니가 가지고 다니시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아아, 이것은… 내가 구원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지침서 같은 것이란다.”
틸러는 대충 둘러댔다. 어차피 이곳 사람들이 이 글자들을 읽지 못할 테니 말이다. 연랑은 흐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에게 이 마법서는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었다. 예전 그의 스승은 틸러의 천재적인 두뇌가 마법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리라 믿었다. 하지만 틸러는 마법사로는 매우 불완전한 존재였다. 바로 마나의 기운을 느끼는 것과 사용하는 것에 아주 심각할 정도로 미진했던 것이다. 결국 틸러는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이 마법서가 없으면 마법을 시전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스승에게 버림받았지만, 결코 불행한 일만은 아니었다. 일국의 군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이쯤 생각이 미치자 틸러는 슬쩍 무모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랑아, 오라버니는 할 일이 있단다. 알고 있느냐?”
“네, 분명히 알고 있지요.”
연랑은 틸러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움찔 놀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 아이가 내가 어떤 계획을 짜고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세상에 나가서 중생들을 구제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후우! 다행… 가만! 세상에 나간다?’
이 말은 틸러의 계획에 결정적인 마지막 한 조각 같은 것이었다. 틸러는 계획의 아귀가 착착 맞아 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후후, 그렇단다. 그런데 이제 그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떠, 떠나시나요?”
연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침울하게 변했다. 틸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세상을 돌며 중생들을 구제할 때, 내 옆에서 나를 도와주겠느냐?”
“네? 제가요? 제가 어찌 감히……?”
틸러는 이 아이를 어떻게든 꿰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랑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이내 다시 침울하게 변했다. 자신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 너는 강하다, 또 아름답고. 내 옆에서 평생 나를 보살펴 주거라. 나는 약한 존재란다.”
“아, 아니에요, 오라버니. 약하다니요. 오라버니는 세상 누구보다 강한 분이십니다.”
짐짓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틸러의 모습이 연랑의 마음을 자극했나 보다. 그녀는 얼른 틸러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순간 틸러의 눈이 사악하게 번뜩였지만, 연랑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렇지 않단다. 네가 있어야만 나는 중생들을 구제할 힘을 얻을 것이니… 부디 무력한 나를 도와다오.”
“오라버니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평생…….”
‘세상 물정 모르는 것들은 이래서 좋다니까!’
“그래. 그렇다면 며칠만 기다려라. 내 언질을 줄 터이니.”
이제 원하는 여자의 뜻도 얻었겠다, 더 이상 이 지옥 같은 곳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틸러였다.

그리고 며칠 뒤.
“여래불께서 사라져? 그게 무슨 말인가!”
“그, 그것이… 중생을…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한마디 글귀만을 남기고 사라지셨사옵니다. 게다가 연랑이까지…….”
소불은 비구니들의 보고에 그제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조바심을 내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얼굴에서는 은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여래불은 본디 지옥 같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바. 그 발길을 우리가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여래불의 하해와 같은 뜻을 우리가 몰라보았구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옆에 서 있던 천화가 되묻자 소불은 그녀를 천천히 올려 보았다. 그러곤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래불은 혼란스러운 무림에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강림하신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이제 그 길을 떠나셨으니 우리의 힘으로 어찌 막겠느냐. 게다가 연랑이란 아이를 아미의 기둥에 걸맞는 인재로 키우기 위해 함께 데려가셨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니겠느냐. 차분히 기다리자꾸나.”
천화는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여래불의 높으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허둥댄 자신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하지만 아미의 비구니들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대웅전 안의 불상들 중 몇 개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제3장 황금진인(1)


틸러는 두툼한 봇짐을 등에 멘 채 하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연랑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어… 오라버니, 이제 어디로……?”
연랑은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온 바깥세상이다. 게다가 그것도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도망 온 데다 불상까지 훔쳐 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틸러는 전혀 걱정이 없다는 듯 희희낙락했다.
“이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로. 지도는 가져 왔지?”
“네. 아, 가장 큰 마을이라면 여기네요.”
펼쳐진 지도에서 연랑이 가리킨 곳은 ‘성도’라 적힌 큰 도시였다. 틸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성도는 엄청나게 컸다. 금빛의 성벽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었고, 왕래하는 사람들의 수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그 인파의 틈새에 틸러와 연랑이 끼어 있었다. 연랑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 어느새 처음의 긴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람 구경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자, 일단 전당포부터 찾아보도록 하자.”
“전당포요? 그곳은 물건을 저당 잡혀서 돈을 받는 곳이 아닌가요?”
성 안으로 들어온 틸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듯했다. 연랑은 그런 그를 조금은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돈을 마련해야 할 것 아니냐. 어디 돌아보도록 하자꾸나.”
“돈이라니요? 설마 불상들을 팔 생각은 아니시지요?”
연랑은 신이 나 걸어가는 틸러의 뒤를 따르며 연신 소리쳤다. 그녀에게 틸러의 사고방식은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었던 것이다.

“으음. 굉장히 오래된 데다 가치도 높군. 그런데 이것을 어디에서 구하신 거유?”
잠시 후, 그들은 황금들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가에서 불상을 팔고 있었다. 틸러는 옆에서 연신 자신을 말리려 하는 연랑의 입을 손으로 콱 틀어막은 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소승이 몸을 보존하던 절의 사정이 매우 나빠져서……. 후우…….”
틸러는 짐짓 매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보석상인은 그런 그를 잠시 수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불상을 얼른 아래로 챙겨 넣으며 말했다.
“오십 냥. 그 이상은 못 주오.”
“백 냥 합시다.”
이 세계의 화폐 단위를 책을 통해 알고 있는 틸러였기에 오십 냥도 상당히 큰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름지기 판매의 기본은 흥정. 한 푼이라도 비싸게 파는 쪽이 거래에서 웃기 마련이다.
“백 냥은 아무래도 안 되겠수. 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수?”
“허어! 에누리 없는 장사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의 도량에 한 푼이라도 더 적선하시면 사바세계로 한 걸음 더 다가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팔십 냥만 주십시오. 소승의 이 야윈 얼굴을 보셔서라도…….”
종교를 이용해 흥정을 하는 것은 때론 아주 좋은 수완이 된다. 가게 주인은 틸러를 못마땅하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돈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내 몇 개의 동전을 빼낸 주인은 그것을 틸러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팔십 냥이유. 스님 같은 손님들만 오다 보면 이 장사 말아먹겠수. 얼른 가시유.”
틸러는 돈뭉치를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연랑은 그제야 자유로워진 입을 문지르며 틸러를 붙잡았다.
“부, 불상을 팔아 버리시면 어떡해요. 이, 이제 정말 큰일 났다!”
“중생 구제를 위한 첫 발판이다. 그것을 위해서 불상 정도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 그렇지만…….”
“부처는 그까짓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라. 너는 저 불상을 부처라 생각하고 모셨더냐?”
연랑은 할 말이 없었다. 분명 맞는 말이다. 부처가 마음속에 있을 때 그때야 자신을 부처라 부를 수 있는 것, 불상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한낱 금 덩어리에 불과하지 않는가.
“배나 채우러 가자꾸나. 이 근처에 객잔이 어디 있을 터인데…….”
자신을 바라보는 연랑의 눈빛이 묘하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태평한 틸러였다.

용문객잔. 사천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이다. 단순히 가장 크고 음식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온갖 문파의 귀재들이며 사파와 마도의 무리들까지도 골고루 이 객잔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곳은 일종의 중립지대 같은 곳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일반인들은 이곳에 접근조차 하기 힘들었다. 항간에는 이곳의 점소이조차 무공을 사용할 줄 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 그 위명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도 사뭇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웬만해선 보기 힘든 금빛의 머리칼을 지닌 승복을 입은 사내와 그 건너편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살피고 있는 십육 세가량의 소녀. 게다가 승복을 입은 사내는 오른손을 식탁 위에 올리고 있었는데, 그 손에는 황금빛의 커다란 잔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