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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피 1권
1화
1막 - 특이한 사람들, 1장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선지자]가 이 문장을 입에 올린 이래, 그들은 이것을 그들의 표어로 삼았다.
그 말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재했다.
“질서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인종, 국적, 성별, 종교, 연령에 관계없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그들을 불러 모아 질서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 바로 선지자다.
선지자의 통솔 아래, 다소 혼란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마침내 안정적인 조직을 구축했다. 그것은 사회에서 외톨이였던 그들이 몸과 마음을 기댈 최초이자 유일한 조직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이한 사람들(Singular People)], 줄여서 [SP]라고 지칭했다.
* * *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중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당시 나는 등하교 길을 항상 학교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함께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주로 그때 유행하던 만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 하굣길도 나와 친구들은 만화의 주인공이 과연 적들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에 대해 나름 진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런 토론은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우리들은 의견이 갈라졌다. 나와 한 친구는 주인공의 라이벌이 주인공을 도와줄 거라고 주장했고 다른 두 친구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은 점차 열기를 띠었고 우리는 이야기에 몰두한 채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니, 건너려고 했었다.
우리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것은 트럭 때문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운전수는 우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당시에는 별로 신경 안 썼지만 신호등은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이었던 모양이다. 운전수는 뒤늦게야 우리를 발견하고 급정거를 시도했었는데, 과속 상태인 트럭은 그리 쉽게 멈춰지지 않아, 결국 나와 내 친구들은 트럭에 치이고 또 서로에게 부딪혀 쓰려졌다. 다행히 트럭에 깔리는 사태만은 모면했다.
특히 횡단보도 왼편으로 건너고 있었던 나와 한 친구는 트럭에 직접 치이고 말았다. 횡단보도 오른편으로 건너고 있었던 다른 친구 둘은 그나마 충격이 덜해 기브스 정도로 끝났지만, 나랑 같이 횡단보도 왼편으로 건너고 있었던 친구는 심각한 골절 및 사고 후유증으로 장기 입원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나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확히 말해 나에게 생긴 문제는…… 내가 아무 일 없이 멀쩡했다는 것이다.
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심약한 어머니는 그야말로 눈물범벅이 돼서 병원으로 달려왔다.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도 회사 일을 미뤄 둔 채 어머니의 뒤를 이어 병실 문을 열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걱정해 주는 부모님을 보니 왠지 미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도대체가 아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난 나름 필사적으로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려고 했지만, 친구 세 명이 크게 다쳤는데 나만 멀쩡하다는 상황을 쉽게 믿어 주진 않았다.
그리하여, 어리둥절해하는 의사들을 보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나는 아무 이상도 없다는 진단 결과를 들고 다시 멀쩡히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쯤 지방 신문에 [교통사고에도 기적적으로 멀쩡한 중학생]이라는 제목으로 내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내가 다시 학교에 가겠다고 나서자,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며칠 더 쉬어도 된다고 거듭 강조하셨다. 그러나 난 솔직히 병원에 누워 있는 게 너무나 지겨웠다. 입원 중인 다른 친구 세 명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도대체가 아픈 곳도 없는데 왜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긴 현성이 넌 예전부터 왠지 다치는 일이 없었어. 감기도 걸려 본 적 없잖아.”
그렇게 말해 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동네로 이사 온 이래 줄곧 친하게 지냈던 옆집 예주였다. 당시 우리 중학교에선 남학생과 여학생의 반이 달랐으므로, 더 이상 초등학교 때처럼 같은 반 친구가 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예주의 그 한마디에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번 사고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 축구하다가 넘어졌을 때도 깜빡 교실 문틈에 손이 끼었을 때도 나는 다치지 않았을 뿐더러, 그야말로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 * *
그날 이후로 몇 가지 실험을 통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내었다.
1. 나는 약한 충격이나 아픔은 느끼지만, 절대로 강한 충격을 받거나 다치지는 않는다. 즉, 축구를 하다가 공에 머리를 맞으면 그 충격은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넘어지면 충격은 조금 느껴져도 절대 다치지는 않는다.
2. 가위나 칼에도 베이지 않는다. 내 스스로 베이려고 애써도 소용없다. 가위나 칼에 닿는 느낌은 분명 피부를 통해 느껴지지만 베이지는 않는다.
3. 그런 주제에 주사는 맞을 수 있다. 분명 가위나 칼과 마찬가지로 내 살을 다치게 하는 것인데, 어째서인지 주사는 아무렇지 않게 맞을 수 있다. 병원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4. 이건 실험을 해 볼 수는 없었으나, 확실히 나는 여태껏 감기에 걸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 물어봐도 ‘넌 어렸을 때부터 건강했어.’라는 대답만 들었다.
5. 가위나 칼을 가지고 내 스스로 베이려고 했을 때, 나는 가위나 칼과 내 피부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막 같은 것을 느꼈다.
이런 것들을 실험하면서, 나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타고난 성격이 좀 무뚝뚝한 편이라 그런 것일 터이다. 이건 아버지를 닮은 거겠지만.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눈 딱 감고 동네 놀이터의 정글짐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했다. 발로 착지하지도 않았으니, 내 몸은 당연히 바닥에 처박혔지만 역시 다치지 않았다.
그 후 인터넷 검색으로 [무통증]이라는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지만 무통증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지 다치지도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쯤 되자 아무리 나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선 부모님에게도 예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긴 말해 봤자 과연 믿어 줄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전부 너의 말을 이해하거나 믿어 주거나 긍정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버지는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아버지였지만, 하신 말씀이 딱히 틀린 적은 없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 * *
그것은 너무나도 하찮은 일 때문에 벌어졌다.
어디든 다 그렇지만 우리 반에도 소위 말하는 [노는 애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크게 일탈을 하는 무리는 아니었고, 그저 좀 거칠고 시끄러운 친구들이었다. 다행히 당시 나는 몸집이 큰 편이라 딱히 뭔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는데,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로 그 친구들 중 한 명―편의상 K라고 지칭―이랑 시비가 붙고만 것이다.
그날 나는 한창 유행하던 만화책을 보고 있었는데, 주인공의 라이벌이 구원자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K가 그 만화책을 빌려 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먼저 보고 나서 빌려 주겠다고 말했는데, 평소 자신의 영향력을 믿던 K는 격하게 반발했고 그렇게 바보 같은 이유로 우리는 시비가 붙고 말았다.
유치찬란한 중간 과정을 생략하면, 결국 K는 내 얼굴에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그렇지만, 역시 충격은 조금 느껴졌어도 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K는 내가 자신의 주먹에 힘껏 얻어맞고도 멀쩡하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의 특이한 현상]이 진짜 현실임을 실감했다.
그전까지는, 이를테면 이 현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거나 혹은 내가 뭔가 정신병이 있다거나, 교통사고의 후유증이라거나,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긴 정신병으로 인한 착각이라거나…… 아무튼 이건 뭔가 어떤 [착오]일 뿐, 결국은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현실이었다. 내가 그렇게 믿든 안 믿든, 변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K는 당황하면서도 재차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나 난 하나도, 정말 하나도 다치지 않았고 대신 내가 얼떨결에 휘두른 주먹에 K의 입술이 터졌다.
반 아이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그렇게 나는 [노는 애들] 중 한 명을 싸움으로 제압했다. 결국 선생님이 와서 우리는 둘 다 벌을 받았지만…….
* * *
나의 [특이한 현상]이 현실임을 실감한 이후, 내 행동이 조금 변한 모양이었다.
“현성이 너 예전하고 좀 달라졌어. 어딘지 모르게 좀 무서워.”
그렇게 말해 준 것은 역시나 예주였다. 난 그런 말을 듣고 언제나처럼 [메주야]라고 응수해 줬지만. 그리고 의외로 부모님은 내 변화에 대해 ‘그냥 사춘기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 주신(?) 것 같았다.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내가 사춘기를 겪긴 했나 보다. 초등학교 때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예주와도 좀 거리를 두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절교를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슬슬 이성을 의식하는 나이가 되었던 듯싶다.
아무튼, 예주가 나에게 변했다고 말해 주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변한 건지 나 자신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매사 행동에 조금은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하기야 무슨 짓을 해도 다치질 않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뭔가 거친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모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도 없는, 그저 그런 남자아이였으므로. 어쨌든 행동에 자신감이 붙고, K와의 싸움 덕분에 소위 노는 애들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며,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아 꽤 편하게 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아주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에서도 혼자 멀쩡한 것에 이어 K를 싸움으로 제압한 일 때문에 반 친구들이 나를 조금 피했었다. 하지만 내가 당시 유행하던 만화책을 항상 들고 다녔기 때문에, 다시 금방 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1화
1막 - 특이한 사람들, 1장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선지자]가 이 문장을 입에 올린 이래, 그들은 이것을 그들의 표어로 삼았다.
그 말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재했다.
“질서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인종, 국적, 성별, 종교, 연령에 관계없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그들을 불러 모아 질서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 바로 선지자다.
선지자의 통솔 아래, 다소 혼란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마침내 안정적인 조직을 구축했다. 그것은 사회에서 외톨이였던 그들이 몸과 마음을 기댈 최초이자 유일한 조직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이한 사람들(Singular People)], 줄여서 [SP]라고 지칭했다.
* * *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중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당시 나는 등하교 길을 항상 학교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함께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주로 그때 유행하던 만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 하굣길도 나와 친구들은 만화의 주인공이 과연 적들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에 대해 나름 진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런 토론은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우리들은 의견이 갈라졌다. 나와 한 친구는 주인공의 라이벌이 주인공을 도와줄 거라고 주장했고 다른 두 친구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은 점차 열기를 띠었고 우리는 이야기에 몰두한 채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니, 건너려고 했었다.
우리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것은 트럭 때문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운전수는 우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당시에는 별로 신경 안 썼지만 신호등은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이었던 모양이다. 운전수는 뒤늦게야 우리를 발견하고 급정거를 시도했었는데, 과속 상태인 트럭은 그리 쉽게 멈춰지지 않아, 결국 나와 내 친구들은 트럭에 치이고 또 서로에게 부딪혀 쓰려졌다. 다행히 트럭에 깔리는 사태만은 모면했다.
특히 횡단보도 왼편으로 건너고 있었던 나와 한 친구는 트럭에 직접 치이고 말았다. 횡단보도 오른편으로 건너고 있었던 다른 친구 둘은 그나마 충격이 덜해 기브스 정도로 끝났지만, 나랑 같이 횡단보도 왼편으로 건너고 있었던 친구는 심각한 골절 및 사고 후유증으로 장기 입원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나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확히 말해 나에게 생긴 문제는…… 내가 아무 일 없이 멀쩡했다는 것이다.
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심약한 어머니는 그야말로 눈물범벅이 돼서 병원으로 달려왔다.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도 회사 일을 미뤄 둔 채 어머니의 뒤를 이어 병실 문을 열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걱정해 주는 부모님을 보니 왠지 미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도대체가 아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난 나름 필사적으로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려고 했지만, 친구 세 명이 크게 다쳤는데 나만 멀쩡하다는 상황을 쉽게 믿어 주진 않았다.
그리하여, 어리둥절해하는 의사들을 보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나는 아무 이상도 없다는 진단 결과를 들고 다시 멀쩡히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쯤 지방 신문에 [교통사고에도 기적적으로 멀쩡한 중학생]이라는 제목으로 내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내가 다시 학교에 가겠다고 나서자,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며칠 더 쉬어도 된다고 거듭 강조하셨다. 그러나 난 솔직히 병원에 누워 있는 게 너무나 지겨웠다. 입원 중인 다른 친구 세 명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도대체가 아픈 곳도 없는데 왜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긴 현성이 넌 예전부터 왠지 다치는 일이 없었어. 감기도 걸려 본 적 없잖아.”
그렇게 말해 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동네로 이사 온 이래 줄곧 친하게 지냈던 옆집 예주였다. 당시 우리 중학교에선 남학생과 여학생의 반이 달랐으므로, 더 이상 초등학교 때처럼 같은 반 친구가 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예주의 그 한마디에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번 사고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 축구하다가 넘어졌을 때도 깜빡 교실 문틈에 손이 끼었을 때도 나는 다치지 않았을 뿐더러, 그야말로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 * *
그날 이후로 몇 가지 실험을 통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내었다.
1. 나는 약한 충격이나 아픔은 느끼지만, 절대로 강한 충격을 받거나 다치지는 않는다. 즉, 축구를 하다가 공에 머리를 맞으면 그 충격은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장에서 넘어지면 충격은 조금 느껴져도 절대 다치지는 않는다.
2. 가위나 칼에도 베이지 않는다. 내 스스로 베이려고 애써도 소용없다. 가위나 칼에 닿는 느낌은 분명 피부를 통해 느껴지지만 베이지는 않는다.
3. 그런 주제에 주사는 맞을 수 있다. 분명 가위나 칼과 마찬가지로 내 살을 다치게 하는 것인데, 어째서인지 주사는 아무렇지 않게 맞을 수 있다. 병원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4. 이건 실험을 해 볼 수는 없었으나, 확실히 나는 여태껏 감기에 걸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 물어봐도 ‘넌 어렸을 때부터 건강했어.’라는 대답만 들었다.
5. 가위나 칼을 가지고 내 스스로 베이려고 했을 때, 나는 가위나 칼과 내 피부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막 같은 것을 느꼈다.
이런 것들을 실험하면서, 나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타고난 성격이 좀 무뚝뚝한 편이라 그런 것일 터이다. 이건 아버지를 닮은 거겠지만.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눈 딱 감고 동네 놀이터의 정글짐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했다. 발로 착지하지도 않았으니, 내 몸은 당연히 바닥에 처박혔지만 역시 다치지 않았다.
그 후 인터넷 검색으로 [무통증]이라는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지만 무통증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지 다치지도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쯤 되자 아무리 나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선 부모님에게도 예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긴 말해 봤자 과연 믿어 줄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전부 너의 말을 이해하거나 믿어 주거나 긍정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버지는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아버지였지만, 하신 말씀이 딱히 틀린 적은 없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 * *
그것은 너무나도 하찮은 일 때문에 벌어졌다.
어디든 다 그렇지만 우리 반에도 소위 말하는 [노는 애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크게 일탈을 하는 무리는 아니었고, 그저 좀 거칠고 시끄러운 친구들이었다. 다행히 당시 나는 몸집이 큰 편이라 딱히 뭔가 괴롭힘을 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는데,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로 그 친구들 중 한 명―편의상 K라고 지칭―이랑 시비가 붙고만 것이다.
그날 나는 한창 유행하던 만화책을 보고 있었는데, 주인공의 라이벌이 구원자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K가 그 만화책을 빌려 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먼저 보고 나서 빌려 주겠다고 말했는데, 평소 자신의 영향력을 믿던 K는 격하게 반발했고 그렇게 바보 같은 이유로 우리는 시비가 붙고 말았다.
유치찬란한 중간 과정을 생략하면, 결국 K는 내 얼굴에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그렇지만, 역시 충격은 조금 느껴졌어도 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K는 내가 자신의 주먹에 힘껏 얻어맞고도 멀쩡하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의 특이한 현상]이 진짜 현실임을 실감했다.
그전까지는, 이를테면 이 현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거나 혹은 내가 뭔가 정신병이 있다거나, 교통사고의 후유증이라거나,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긴 정신병으로 인한 착각이라거나…… 아무튼 이건 뭔가 어떤 [착오]일 뿐, 결국은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현실이었다. 내가 그렇게 믿든 안 믿든, 변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K는 당황하면서도 재차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나 난 하나도, 정말 하나도 다치지 않았고 대신 내가 얼떨결에 휘두른 주먹에 K의 입술이 터졌다.
반 아이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그렇게 나는 [노는 애들] 중 한 명을 싸움으로 제압했다. 결국 선생님이 와서 우리는 둘 다 벌을 받았지만…….
* * *
나의 [특이한 현상]이 현실임을 실감한 이후, 내 행동이 조금 변한 모양이었다.
“현성이 너 예전하고 좀 달라졌어. 어딘지 모르게 좀 무서워.”
그렇게 말해 준 것은 역시나 예주였다. 난 그런 말을 듣고 언제나처럼 [메주야]라고 응수해 줬지만. 그리고 의외로 부모님은 내 변화에 대해 ‘그냥 사춘기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 주신(?) 것 같았다.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내가 사춘기를 겪긴 했나 보다. 초등학교 때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예주와도 좀 거리를 두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절교를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슬슬 이성을 의식하는 나이가 되었던 듯싶다.
아무튼, 예주가 나에게 변했다고 말해 주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변한 건지 나 자신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매사 행동에 조금은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하기야 무슨 짓을 해도 다치질 않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뭔가 거친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모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도 없는, 그저 그런 남자아이였으므로. 어쨌든 행동에 자신감이 붙고, K와의 싸움 덕분에 소위 노는 애들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며,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아 꽤 편하게 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아주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에서도 혼자 멀쩡한 것에 이어 K를 싸움으로 제압한 일 때문에 반 친구들이 나를 조금 피했었다. 하지만 내가 당시 유행하던 만화책을 항상 들고 다녔기 때문에, 다시 금방 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