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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미스터 윤과 혜은의 귀국 일정에 대해선,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료코 씨하고 헬렌 씨와 헤어져, 내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잠들기에는 시간이 이르고,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난 조금 빈둥댔다.
일본어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텔레비전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문득 누군가가 내 방을 찾아왔다. 마코토 씨였다.
“미스터 윤이 심심해할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같이 시내라도 구경하시죠.”
“하지만 미스터 시나가와는 상처를 입으셨잖습니까…….”
“멀쩡하니까 그리 염려 마세요. 다들 너무 걱정하시네요.”
“그럼, 그…… 미즈 마야 하나다는?”
“하하하, 벌써 눈치채셨습니까. 오늘은 마야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 일찍 쉬게 두었습니다.”
결국 나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마코토 씨와 어울려 도쿄 시내를 관광했다. 술도 한잔했는데, 한국과 비교하면 술값이 너무 비싸게 생각되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돈을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계산은 전부 마코토 씨가 했지만.

“우리는 오늘 밤에 돌아갈 거예요. 그렇게 알아 두세요, 현성 씨.”
“벌써 가는 겁니까?”
“내일은 월요일이에요. 정상 출근해야죠. 지부장님 혼자서는 일 못해요.”
“예…….”
“다만 오늘 저녁에는 일본 SP 회원들이 파티를 열어 준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술 때문인지 나는 조금 늦잠을 자고 말았다. 깨어 보니 이미 료코 씨와 혜은 씨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친 모양이다.
“하지만 이대로 귀국해도 좋은 겁니까? 미카 사에지마의 일은…….”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이 나설 필요는 없을 거예요. 미카 사에지마도 진정됐고, 더 이상 어제 같은 난투극은 없을 거라고 총본부 쪽에서도 판단했어요.”
“예…….”
총본부에는 레이디 엘자가 있다. 그녀의 판단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헬렌 씨는 그럼…….”
“그분은 미즈 사에지마의 선택에 따라서는 아직 할 일이 있으니까, 우리 둘만 오늘 귀국하는 거예요.”
“예…….”
비록 할 일이 끝났다지만, 너무 빨리 떠나는 것 같아 왠지 조금 아쉬웠다.
“뭐, 모처럼이니 서점에라도 같이 갈까요?”
“만화책 말입니까?”
“예, 지로도 불러서.”
“아…… 그거 좋겠네요.”
혜은 씨가 모처럼 신경을 써 준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료코 씨에게 전화를 해서, 지로와 함께 서점에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아, 그거 참 좋겠네요. 지로도 참 좋아할 거예요.
“그럼 저희가 료코 씨의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아니, 잠시 호텔에서 기다리세요. 제가 지로를 데리고 그쪽으로 가죠.
료코 씨를 기다리는 동안, 난 궁금한 부분을 혜은 씨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제는 어떻게 쇼핑을 하신 겁니까? 전 돈이라고는 당연히 한 푼도…… 아니, 설마…….”
“몰라서 묻나요?”
“……또 한국에서 가져오셨군요.”
“후후후.”
순간 혜은 씨가 밀수라도 나서는 날에는 떼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이런 식으로 SP를 남용하면 안 되지만, 지금 우리는 업무로 여기 온 거예요. 결코 사적인 목적이 아니라구요.”
“……쇼핑은 업무가 아니잖습니까.”
“어차피 일본에서도 쓸 수 있는 카드나, 아니면 현금을 가져와서 환전한 거예요. 부당이득도 아니고 별문제 없어요.”
“그건 그렇지만…….”
그 이상 토를 달아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난 현명하게 그만두는 편을 선택했다.

* * *

“이 누나가 사 주는 거니까, 너무 많이는 고르지 말고 적당히 사렴. 참고로 저기 저 형은 한 푼도 없단다.”
“네.”
“…….”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한 후, 우리는 만화책만 파는 곳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큰 서점에 들어왔다. 지로는 모처럼 신이 난 듯 보였다.
“저기, 저는…….”
“현성 씨도 가서 고르세요. 몇 권 정도는 기념으로 괜찮으니까. 나중에 일본어 공부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나도 몇 권 살 거고.”
“혜은 씨도 만화책 보십니까?”
“순정 만화는 조금 보는데.”
“헤에…….”
“의왼가요?”
“예.”
나는 지로와 함께 다니며 만화책을 골랐다. 지로는 일본어를 모르는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다.
만화책 쇼핑이 끝난 뒤에, 우리는 신주쿠 역 주변을 돌아다니며 아이쇼핑을 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자, 여기서 기념품으로 하나 고르세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지는 건 좀…….”
“현성 씨. 기껏 외국에 출장 나와서 선물도 안 사가면 애인이 화낼 텐데요?”
“……감사합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일본 SP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의 카페에서는 헬렌 씨와 더불어 일본 SP 회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모처럼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제 일도 잘 마무리됐고, 너무 빨리 헤어져서 섭섭하지만 어쨌든 축하해야겠네요.”
료코 씨가 주최한 알코올이 없는 저녁 식사 겸 파티. 모두들 즐거운 얼굴로 식사를 했고,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모두들 정말 섭섭한 표정으로 변했다.
“시간이 나면 꼭 다시 와 주세요.”
“알았어, 그때 같이 게임이라도 하자.”
지로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와 혜은 씨는 료코 씨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지 3일 뒤에, 나는 미카 사에지마가 SP에 가입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2막 끝―


막간2 - 공평한 운명


파일 식별 명칭:SP 독일 지부 파일 D―224호.
파일 정식 명칭:SP 발현자 [칼 베셀]에 대한 감시 기록.
파일 작성 일자:1997년 6월 12일 ∼ 동년 7월 23일.
파일 작성자 명:SP 독일 지부장 요제프 슈타이너.

―1997년 6월 12일―
SP 총본부의 요청으로 SP 발현자 [칼 베셀]에 대한 감시 및 조사를 시작.
칼 베셀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41세의 남성으로, 40세의 아내(에반젤린 베셀)와 15세의 아들(한스 베셀), 11세의 딸(베로니카 베셀)을 둔 평범한 가장이다.
그의 원래 직업은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나, 1997년 2월 24일을 기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그 후 경제적인 곤란에 빠져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스트레스 탓인지, 그 후 칼 베셀은 불법 도박을 즐기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1997년 6월 11일, 그는 불법 도박에서 퇴직금을 모두 잃은 것을 계기로 SP를 발현하게 되었다.
칼 베셀의 SP는, 총본부와 당 지부의 조사에 의하면 이하와 같은 성질이 있다고 추정된다.

1. 그는 자신이 행운/불운을 겪을 때마다, 그것과 거의 똑같은 비율의 불운/행운을 겪는다.
2. 예를 들어 도박으로 10마르크를 벌었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10마르크를 잃게 된다.
3. 만약 10마르크를 벌은 뒤 도박을 그만둔다면? 그렇다면 그는 10마르크에 해당하는 다른 불운을 겪는다.

실제로 그는 불법 도박에서 퇴직금을 모두 잃은 직후, 길가에서 버려진 복권을 주워 잃어버린 퇴직금의 95%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게 되었다.
칼 베셀의 SP는, 총본부의 의견에 따라 [공평한 운]이라 부르기로 결정했으며, 이 SP가 추후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 아직 알 수 없으므로 접촉 없는 감시만을 행하였다.

―1997년 6월 19일―
감시 1주일째. 현재로선 별다른 상황의 변화가 없다.
복권으로 돈을 번 뒤에도 칼 베셀은 여전히 불법 도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박으로 크게 돈을 벌거나 잃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칼 베셀의 SP [공평한 운]이 작용한 것으로, 그의 SP가 발현되고 있는 한 그는 항상 번만큼 잃고 잃은 만큼 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일주일 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과연 칼 베셀을 계속 감시해야 하는 것일지 의문이 제기된다.

―1997년 6월 26일―
감시 2주일 째. 여전히 별다른 상황의 변화가 없다.
결국 당 지부에서는 칼 베셀을 감시할 필요성에 대해, 총본부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총본부에서는 앞으로 1주일만 더 지켜보라는 답변을 해 왔다.

―1997년 6월 27일―
감시 15일째. 상황의 변화가 생겼다.
오늘 오전 칼 베셀의 아들 한스 베셀이, 소속 중학교에서 동급생 남자아이에게 맞아 크게 다친 일이 발생했다. 결국 양측 학생의 부모가 학교로 소환됐는데, 때린 아이의 부모가 합의의 조건으로 칼 베셀을 자기 회사에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경위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린 아이의 부모는 차량 정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칼 베셀은, 자신의 아들이 다친 대신 다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아직 총본부에서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상기 사건은 아무래도 그의 SP [공평한 운]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의 SP는 주변인을 말려들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1997년 6월 28일―
감시 16일째.
어제의 사건이 칼 베셀의 SP [공평한 운]에 의한 것임을, 총본부에서 확인했다. 이것으로 칼 베셀에 대한 감시는, 그의 주변인을 포함하여 행하기로 결정했다.

―1997년 6월 30일―
감시 18일째.
오늘부터 칼 베셀은 새로운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그 이외에는 별다른 상황의 변화가 없다.

―1997년 7월 3일―
감시 3주일째.
칼 베셀은 새로운 직장에 잘 적응해 가고 있다. 그 이외에는 별다른 상황의 변화가 없다.

―1997년 7월 5일―
감시 23일째.
칼 베셀이 새로운 직장에서 만난 묘령의 여성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확인했다. 그뿐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지자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
아직까지는 이 사건이 그에게 어떤 불운을 가져올지 알 수 없다.

―1997년 7월 9일―
감시 27일째.
오늘 이른 아침, 칼 베셀과 그의 아내 에반젤린 베셀이 크게 다투었다. 그 결과 에반젤린 베셀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 버렸다.
부부 싸움의 원인은 바로 7월 5일에 있었던 그 사건이다. 에반젤린 베셀은 남편의 불륜 행각에 대한 증거를 확실하게 잡고 있었다. 이것 역시 칼 베셀의 SP로 인한 사건이라고 추측된다.

―1997년 7월 10일―
감시 4주일째.
어제의 사건이 칼 베셀의 SP에 의한 것임을, 총본부에서 확인했다. 이제 칼 베셀은 자기 집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다.

―1997년 7월 17일―
감시 5주일째. 별다른 상황의 변화가 없다.
여전히 칼 베셀은 자기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1997년 7월 22일―
감시 40일째.
칼 베셀에게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칼 베셀은 요추 및 양다리에 심각한 골절상을 입었다.
칼 베셀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그의 아내가 자식들을 데리고 병원에 도착했다.
수술의 경과는 내일이 되어야 알 수 있겠으나, 현재로선 신체의 완전 회복은 불가능할 것으로 추측된다.

―1997년 7월 23일―
감시 41일째.
칼 베셀의 수술은 무사히 종료되었다. 하지만 역시 신체의 완전 회복은 절망적이다.
이로써 칼 베셀은 남은 생애를 휠체어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크나큰 불행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칼 베셀은 가족의 사랑을 확인했다. 오늘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총본부에서는 칼 베셀의 SP [공평한 운]이,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인지 밝혀 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칼 베셀이 어떤 것을 간절히 소원한다.
2. 그의 SP [공평한 운]이 발동하여,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3. 하지만 [공평한 운]은, 그에게서 일정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대가를 치르는 것은 소원을 이루기 전이어도 상관없다).
4. 그 대가가 완전히 치러질 때까지는, [공평한 운]은 다른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총본부와 당 지부에서는, 칼 베셀에 대한 이후 감시가 불필요하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이번에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바로 ‘평생 동안 신체적 장애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막간2 끝,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