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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이야기가 끝나고, 나와 료코 씨, 미카 사에지마는 안쪽 방에서 나왔다. 밖에서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행히 미즈 사에지마와 이야기가 잘됐어요. 미즈 사에지마는, 좀 더 생각해 보고 나서 자신의 처우에 대해 선택하겠다고 말하셨습니다.”
료코 씨의 말에 우리는 일단 안심했다. 드디어 이 골치 아픈 사건도 결말이 보이는 것이다.
“제가 미즈 사에지마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오도록 하죠. 다른 분들은 피곤하실 테니 이만 쉬시도록 하세요. 마코토는 상처 조심하고.”
미카 사에지마는 우리 SP 회원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적대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아까 난동을 부린 것에 대한 미안함과 창피함 때문 같았다.
“저, 저기……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미카는 료코 씨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마코토 씨에게 다가가 힘겹게 말을 걸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전 보기보다도 더 튼튼하거든요. 아무쪼록 아까 놀라게 한 거 사과드립니다.”
“아뇨…… 저야말로…….”
아무래도 미카 사에지마는, 마코토 씨의 손에 상처를 낸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일본어를 몰라도 둘의 대화 내용은 짐작이 갔다.
마코토 씨와 대화한 후, 미카 사에지마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역시 아까의 난투극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도, 미카 사에지마가 혜은 씨에게 눈을 흘기는 것을 나는 보았다. 왠지 미카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 * *

“마지막에서 대활약을 하네요, 현성 씨.”
“아니…… 무슨 대활약이라고 할 것까지는…….”
“상처받은 여성의 마음을 그렇게 잘 위로해 주다니, 다시 봐야겠는데요?”
“칭찬하시는 건지 놀리시는 건지 알 수 없군요.”
“당연히 둘 다예요.”
료코 씨는 미카 사에지마를 바래다주러 나가고, 마코토 씨와 마야 씨는 카페의 문을 잠근 뒤 지로를 데리고 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와 혜은 씨, 그리고 헬렌 씨는 함께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아직 저녁조차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건만, 하루 종일 긴장한 탓인지 우리는 피곤했다.
“그나저나 지로는 어디 사는 겁니까? 일본 지부의 피보호자라고 아까 그러셨는데…….”
“음…… 별로 다른 사람의 안 좋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진 않지만…….”
택시의 뒷자리에서 그렇게 운을 뗀 후 혜은 씨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로가 어렸을 때, 그 아이의 집에 큰 화재가 났었어요. 그리고 그 아이는, 화재 속에서 가족을 도우려고 처음으로 SP를 발현했죠.”
“…….”
“하지만 지로는 결국 가족들을 모두 잃고 말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료코 씨가 댁에서 맡아 돌보고 있죠. 이쯤이면 무슨 말인지 알겠죠?”
“예.”
문득 지로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내 SP를 부러워하던 그 눈빛도.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지로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어요. 료코 씨와 마코토 씨, 마야 씨가 가족처럼 대해 줘서 지금은 명랑한 꼬마가 됐지만요.”
“지로에게 다른 가족은 없는 겁니까? 조부모님이나 친척이나…….”
“먼 친척이 있긴 한데…… 아무래도 료코 씨가 돌보는 것이 여러모로 좋으니까요. 결국 료코 씨가 이것저것 손을 써서 지로를 맡게 됐어요.”
지로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하지만 내게는 한 가지 의문이 더 남아 있었다.
“이런 건 좀 그렇지만…… 마코토 씨와 마야 씨는 어떤 관계입니까?”
“후후후후후, 현성 씨도 그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군요? 연인이에요. 당연히.”
“역시 그렇군요.”
“일단은 사내 연애니까, 되도록 티 나지 않게 행동하고 있지만요. 게다가 SP는 평생 직장이니 더욱 조심스럽죠.”
“과연…….”
택시는 곧 호텔에 도착했다. 어차피 이 호텔은 SP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다. 나와 혜은 씨는 일단 거동이 불편한 헬렌 씨를 방까지 모셔다 드렸다.
“혜은 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잠이나 좀 자다가 쇼핑 나갈 건데, 현성 씨는요?”
“글쎄요…… 생각해 봐야겠네요.”
난 자칫 ‘쇼핑 같이 가요.’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여성이랑 같이 쇼핑을 가는 건 두려웠다. 예주와의 경험 때문이다.
“후후, 그럼 나중에 봐요.”
“예.”

호텔 방에서 모처럼 편히 잠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또다시 한 통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아, 미스터 윤? 방에 계셨군요. 혜은은 이미 나간 모양이던데…….”
“미즈 아마노? 무슨 일입니까?”
“아니…… 별일은 아니고, 괜찮으시면 미즈 그로닝하고 같이 셋이서 커피라도 한 잔 하죠.”
“아, 알겠습니다.”
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호텔 방을 나섰다. 료코 씨와 헬렌 씨는 이미 호텔 라운지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자, 여기 앉아요. 미스터 윤.”
“감사합니다.”
료코 씨와 헬렌 씨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하긴 두 사람의 위치와 역할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엔 미스터 윤의 도움이 아주 컸네요. 덕분에 미즈 사에지마도 지금 집에서 꽤나 안정을 취하고 있답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정말 위험한 일이었는데도 아주 침착하게 잘해 줬어요.”
“지로도 미스터 윤에게 아주 고마워했어요. 앞으로도 지로와 친하게 지내 주세요.”
료코 씨와 헬렌 씨의 연이은 칭찬에 나는 매우 송구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미스터 윤이 올해 몇 살이라고 했죠?”
헬렌 씨의 질문에, 난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한국식으론 분명 내 나이가 21살이 되지만, 일본이나 서양에선 만 나이로 계산한다고 들었으므로, 19살이 맞을 것이다.
“아…… 그게 19살입니다. 1991년생.”
“그렇게 젊은데도 참 침착하군요.”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은 잠시 이것저것 잡담을 나눴다. 주로 료코 씨가 헬렌 씨에게 SP 총본부의 사람들의 근황을 물었고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역할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야말로 좋은 기회라 여겨, 나는 평소 궁금하던 것을 두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 SP를 처음 설립하셨다는, 선지자라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역시 SP에 대해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내 질문에, 헬렌 씨가 미소를 지으면서 답해 주었다.
“미스터 윤이 선지자에 대해 알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그럼 제가 조금 이야기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제가 선지자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그러니까 정확히는 86년의 일이었어요. 아직 우리 SP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 힘겨운 일들이 많았을 때였죠.”
“예.”
“당시 선지자는 30대의 건장한 남성이셨어요. 또 상당한 미남이셨죠. 스무 살 무렵에는 꽤나 바람둥이였다고 들었는데, 30대의 선지자는 정말 매너 있는 분이셨어요.”
“…….”
[바람둥이]라는 표현 때문인지, 내가 가지고 있던 선지자에 대한 이미지가 왠지 좀 헷갈리기 시작한다.
“우리 SP에 힘든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분이 나서서 가장 험한 일을 도맡아하셨어요. 그 분이나 레이디 엘자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SP도 없었을 거예요.”
레이디 엘자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지금 나에겐 역시 선지자에 대한 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선지자의 SP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미스터 윤도 알고 있겠지만, SP 회원들끼리는 서로의 SP에 대해 그다지 왈가왈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칫 서로의 안 좋은 과거를 건드릴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의 SP를 너무 의식하는 것은 편견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더욱이, 신입 회원에게는 필요 이상의 정보는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암묵의 규칙이에요. 아직 모임에 익숙하지도 않은데, 괜히 혼란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나 혜은 씨가 나에게 별다른 정보를 알려 주지 않은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미스터 윤은 믿을 만한 분이고, 또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을 테니…… 제가 알려 드리죠. 그…… 선지자의 SP는 [신의 목소리]라고 불렸답니다.”
“신의 목소리…….”
“예, 그분께서 명령조로 말씀을 하시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게 돼요. 그런 SP죠.”
“…….”
“때문에 그분은 항상 의식적으로 명령조를 피하셨어요. 명령조를 쓰면 본의 아니게 SP를 쓰게 되니까. 게다가 그분의 SP는, 심지어 영어를 모르거나 귀를 막는 다고 해도 통했답니다.”
“그런…….”
이번에도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그 누구라도 선지자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않는가.
“그런 SP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선지자는 항상 겸손하게 처신했고, 평소 자신의 SP를 쓰는 것도 꺼려하셨어요.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운 분이죠.”
“예…….”
“그런 선지자야말로, [남들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그저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우리 SP의 근본정신을 만드신 분이세요.”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조금 믿기지 않았다.
“그 선지자는…… 결혼을 하셨습니까? 가족은…….”
“부인이 계셨죠. 슬하에 자식은 없었지만…… 무척 금슬 좋은 부부였고, 부인 또한 SP 회원이셨습니다.”
“…….”

“선지자의 부인께선, 근래에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선지자가 SP에서 은퇴한 가장 큰 이유도 그것이에요.”
“예…….”
“선지자는 우리 SP의 정신적 기둥이셨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의 은퇴를 만류하지 못했어요. 선지자가 얼마나 부인을 사랑했는지는 모두들 알고 있었거든요.”
“…….”
“지금은 몇몇 창립 초기의 회원들만이, 선지자가 사는 곳을 알 뿐이에요. 그 이외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이로써 내가 가지고 있던 선지자에 대한 의문은 대부분 풀렸다. 이야기의 내용을 되새기면서, 나는 다음 질문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레이디 엘자라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혹시 알려 주실 수 있으시다면…….”
“레이디 엘자는 선지자와 함께 SP를 처음 만든 창립 회원이에요. 그리고 현재로선 그분이 SP 회원들의 정신적 기둥이시죠.”
“그분의 SP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레이디 엘자의 SP는 [천국의 도서관]이라고 불리는데, 그분은 그 SP를 통해 꿈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정보를 알아내실 수 있답니다.”
“꿈속에서…….”
“다만 [천국의 도서관]을 발동시킬 때마다 너무나 기력을 소모하셔서…… 아직 한창 나이이신데도 건강은 그렇게 좋지 못하세요. 안타까운 일이죠.”
“예…….”
“현재 우리 SP의 가장 큰 목표는, 보다 빠른 정보망을 구축해서 굳이 레이디 엘자가 무리를 하지 않더라도 SP를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에요.”
“그렇군요.”
“미스터 윤의 신입 기간이 끝나면, 박 교수님께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미스터 윤은 정식 신고를 위해 SP 총본부에도 들르셔야 할 테구요.”
“예…… 알겠습니다.”
헬렌 씨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 후 우리들은, 이것저것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