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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막 - 창을 가진 여자, 방패를 가진 남자, 종장
미카 사에지마의 울음이 잦아든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지나서였다. 물론 난 그게 한 30분은 된다고 생각했지만 방 안의 시계를 확인해 보니 10분이였을 뿐이다.
울음을 그친 뒤에도 미카 사에지마는 좀처럼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떼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 그저 가만히 상황 변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바보…… 이럴 때는 어깨라도 좀 다정하게 안아 줘 봐요.”
“……?”
“일본어 몰라요? 좀 위로해 달라구요, 위로. 위로가 영어로 뭐였더라…….”
“…….”
말의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미카 사에지마의 말투가 뭔가 투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난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추론했다.
“나 혼자만 창피하니까 못 견디겠다구요. 당신도 좀 동참해 줘요. 같이 울든지 개인기라도 해 보라구요.”
“…….”
식은땀이 날 정도로 추론한 끝에, 난 뭔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후한을 두려워하면서도 도박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난 살며시 팔을 뻗어 미카 사에지마의 어깨를 안았다.
“아…….”
“…….”
“흐응…… 아주 바보는 아니네.”
다행히 미카 사에지마의 반응으로 보아, 내 추론이 완전히 틀리진 않은 것 같았다. 미카 사에지마는 잠시 동안 만족스러운 듯이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미카 사에지마가 내게서 떨어진 것은, 그로부터 다시 5분 정도 지나서였다. 그녀는 내게서 떨어짐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뭔가 말을 한다.
“티슈 좀 갖다 줘요. 아니, 내 핸드백 갖다 줘요.”
“…….”
“핸드백 말이에요, 핸드백. 핸드백은 알아들을 거 아니에요?”
“…….”
난 다시 한 번 필사적인 추론을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그녀의 [한도박그(핸드백의 일본식 발음)]라는 말이 핸드백을 뜻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정답이기를 빌면서, 난 미카 사에지마를 내버려 둔 채 방을 나섰다. 물론 방 밖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 미스터 윤. 어때요? 미즈 사에지마는 좀 괜찮아졌나요?”
“예,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미즈 사에지마가 [한도박그]라는 것을 찾는데요. 아마 핸드백……이겠죠?”
“후후후.”
료코 씨는 웃으면서, 2층 한쪽 구석에 놓인 미카 사에지마의 핸드백을 내게 건네주었다.
“미스터 윤이 곤란하다면, 제가 다시 미즈 사에지마와 이야기해 볼까요?”
“아뇨, 미즈 아마노. 제가 보기엔 미스터 윤이야말로 미즈 사에지마에게 딱 맞는 상대인 것 같아요.”
료코 씨는 당황한 표정의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대신 나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혜은 씨가 나서서 그것을 거절했다.
“혜은 씨…….”
“잘해 봐요, 현성 씨. 모국에 두고 온 조강지처에게는 알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말구요.”
“…….”
난 별수 없이 핸드백을 들고 다시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창피하니까 딴 데 봐요.”
“…….”
내가 핸드백을 건네주자, 미카 사에지마는 내게 손짓을 한다. 아무래도 딴 데 보라는 의미인 듯싶었다. 난 미카 사에지마에게서 돌아섰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다. 아마 미카 사에지마는 화장을 고치고 있는 듯싶었다. 간간히 코 푸는 소리도 들린다.
이윽고 미카 사에지마가 나를 슬쩍 건드린다. 나는 그제서야 다시 그녀 쪽으로 돌아선다. 미카 사에지마는, 화장을 고쳐서 그런지는 몰라도 꽤 상태가 나아진 듯 보였다.
“여기 앉아 봐요.”
미카 사에지마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뭔가 말을 했다. 난 즉시 그 의미를 깨닫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다.
“자, 이제 말해 봐요. 당신들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
“무슨 피플 어쩌고 하지 않았어요? 스페셜 피플이었던가? 그게 당신들 조직 이름이에요?”
“…….”
“아…… 당신이 일본어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당신이 마음 편해서요. 후후후…… 이런 소리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평소에 공부를 좀 해둘 걸 그랬다.
“근데 도대체 아까 그 못된 여자는 뭐예요? 지가 뭔데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그래…….”
미카 사에지마의 표정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설마 내가 뭔가 말을 잘못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아직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당신 아까 분명 칼을 그냥 손으로 잡았죠? 그 전에 카페에서도 그랬고…… 도대체…….”
미카 사에지마는 손을 뻗어, 내 손을 만진다. 그러더니 이윽고 내 팔과 몸을 더듬는다.
“미, 미즈 사에지마…….”
“좀 가만 있어 봐요. 흐음…… 보통 사람 같은데…… 설마 무슨 사이보그는 아니겠지…….”
순간 미카 사에지마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난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방 안에는 지로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샤프와 노트가 있었다.
난 샤프와 노트를 들고, 다시 미카 사에지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에다 영어로 단어를 써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Singular Point]라고.
“시, 싱귤러…… 포인트…….”
“…….”
그러고는 난 들고 있던 샤프로 내 손을 찔렀다.
“……!”
샤프가 거의 부러질 정도로 힘을 주어도, 샤프는 내 손에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그 장면을 보여 주고 나서, 난 다시 손가락으로 그 단어를 가리킨다.
Singular Point.
미카 사에지마는 허겁지겁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그러더니 뭔가 이리저리 버튼을 누른다. 설마 경찰에 신고하려는 걸까 하고 깜짝 놀랐지만, 그게 아니라 그녀는 영어 사전을 보고 있었다.
“특이……점…….”
“…….”
“……특이점이라는 뜻이죠? 당신의 그 능력이…… 그리고 내 이것도…….”
난데없이 미카 사에지마의 손에 고풍스런 활과 화살이 나타난다. 난 또다시 깜짝 놀랐지만, 그녀는 싸우거나 반항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내…… 이것도…… 특이점이란 이야기죠……? 맞죠?”
미카 사에지마는 자신의 손에 들린 활을 가리키더니, 재차 노트에 적힌 [Singular Point]라는 단어를 가리킨다. 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
“…….”
“그럼 아까 그 아줌마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거죠?”
“…….”
“혹시 이것도 무슨 함정 아니에요? 당신들은 날 미행했잖아요. 거기다 여기에 가두고.”
“…….”
미카 사에지마는 내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본다. 난 공연히 식은땀이 났다.
“속이는 거 같지는 않은데…….”
“…….”
“당신은 그렇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거든요. 하긴 내가 남자 얼굴에 속은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
“아무튼…… 알았으니까 아까 그 아줌마 좀 불러 줘요. 당신은 일본어를 모르니까 그 아줌마랑 다시 이야기해 봐야겠어요.”
“…….”
미카 사에지마는, 내 손에서 샤프를 뺏더니 노트에다 커다랗게 [WOMEN]이라고 적는다. 난 재빠르게 방 밖으로 나가 료코 씨를 불렀다.
“아무래도 미즈 사에지마가, 미즈 아마노와 다시 대화를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정말인가요? 그거 참 잘됐군요. 미스터 윤.”
설마 미카 사에지마가 노트에 적은 [WOMEN]이 혜은 씨일 리는 없었다. 난 료코 씨와 함께 다시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진정된 듯했지만, 그래도 미카 사에지마와 료코 씨를 단 둘이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 여성이 대화하는 동안 바로 곁에 머물러 있었다.
“이 사람은 왜 여기 있는 거죠? 아니, 알겠다…… 내가 무기를 꺼내면 이 사람이 나를 막는 거군요?”
“안타깝지만 그렇답니다, 사에지마 씨. 이분은 한국에서 오신 분인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특별히 모신 분입니다.”
“흐응…….”
“불편하면 잠깐 나가 있어 달라고 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가 무슨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두 사람의 대화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료코 씨는 대화 중간에 SP 개요서도 꺼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미카 사에지마도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혹시 몰라서 우리 쪽의 마코토가 사에지마 씨를 미행했어요. 그 때문에 사에지마 씨가 많이 놀라셨던 것 같군요.”
“아뇨, 뭐…….”
순간 미카 사에지마가 내 쪽을 쳐다본다.
“당신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아직 이야기가 믿기질 않네요.”
“물론 그러실 거예요. 쉽게 믿기 힘들죠.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회를 준답니다.”
“선택의 기회?”
“혹시 이런 이야기가 너무 부담스럽다면, 본인의 선택에 의해 여태까지와 똑같은 생활을 할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