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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그게…… 다른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면 안 되니까, 역시 기억을 지우는 게 좋겠지만…….”
지로는 고개를 들고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지운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응……?”
“기억을 지워서…… 미즈 사에지마가 진정되면…… 그 다음에 SP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건가요?”
의외의 질문에 우리는 순간 멈칫했다. 그때 료코 씨가 나서서 지로의 질문에 대답했다.
“기억을 지워서 미즈 사에지마가 진정되면…… 아마도 SP 회원으로 받아들이게 되겠지. 그게 좋지 않겠니?”
“예…….”
지로는 순간 내 쪽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뭔가 결심한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는 이 일을 미즈 사에지마에게 비밀로 해야 하잖아요.”
“……?”
“사건이 일어난 것이나…… 기억을 지운 것을…… 전부 미즈 사에지마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되겠지.”
“SP는 견디기 힘든 비밀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려고 만들었는데…… 그런데 우리가 미즈 사에지마에게 뭔가를 또다시 비밀로 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
생각지 못한 지로의 의견에 우리 모두는 허를 찔렸다.
“만약…… 그 뒤에 미즈 사에지마가 SP 회원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그분에게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 과연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을까요? 전 아무래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우리 어른 여섯 명은 모두 침묵했다. 마치 료코 씨가 SP를 쓰기라도 한 것처럼.
……결국 우리는 미카 사에지마와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눠 보기로 결정했다.

* * *

“이제 미즈 사에지마를 깨우겠습니다, 미스터 윤.”
“예.”
지로를 제외한 어른 여섯 명은 다시 2층 안쪽 방에 모였다. 미카 사에지마는 여전히 소파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내가 미카 사에지마와 가장 가까이 서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는 마코토 씨와 료코 씨, 혜은 씨가 있었다. 헬렌 씨는 조금 떨어져서 마야 씨와 함께 있었다. 사실 헬렌 씨에게는 지로와 함께 방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료코 씨가 부탁했으나, 헬렌 씨는 미카 사에지마의 상태를 보고 싶다며 방 안에 남았다.
깨우기 전에 미카 사에지마의 손이라도 묶어야 하지 않을까…… 우린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으나, 어차피 허공에서 단도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인데다, 그런 짓을 하면 공연히 적개심만 부추길 것 같았다.
“으, 으…… 으음…….”
마코토 씨가 미카 사에지마의 손을 잡고 나서 잠시 후, 미카 사에지마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그런데 미카 사에지마가 갑자기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내 손을 찾아 잡더니……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이, 이거 어떻게 합니까…….”
난 당황하여 내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무슨 좋은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난 섣불리 행동하여 이 여자를 자극하지 말자고 마음먹고, 그냥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으음…….”
“……미즈 사에지마는 잠에서 깬 것 아닙니까?”
“아마 꿈을 꾸고 있을 겁니다. [수면 악수]의 효과는 서서히 발동되니까요. 그렇게 확하고 금방 깨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도, 내가 손을 빼면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무서웠다.
별수 없이 잠시 기다리고 있자, 미카 사에지마가 이번에는…… 가슴팍에 갖다 댄 내 손을 꼭 끌어안은 채 울기 시작했다.
“……흐, 흐흑…… 흐흐흑…….”
“…….”
뭔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난 패닉에 빠져 버렸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미즈 사에지마는 최근 남자 친구하고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
“뭐, 그거 말고도 이 여자는 요즘 큰일을 겪었으니까요. 이럴 만도 하죠.”
“…….”
마코토 씨와 혜은 씨는, 미카 사에지마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손을 잡힌 당사자는 나다.
“으음…….”
잠시 동안 울던 미카 사에지마는, 이윽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미카 사에지마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난 잽싸게 내 손을 빼냈다. 이상한 오해를 받기는 싫었다.
“…….”
미카 사에지마는 눈을 살며시 뜨고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자신을 둘러싼 우리들을 발견했다.
“다, 당신들은……!”
미카 사에지마는 순간 재빠르게 상체를 일으켜서 소파에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마침내 전후 사정을 완전히 기억해 냈는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진정하세요, 사에지마 씨. 우리는 당신과 대화를 하려고 해요.”
“가까이 오지 마!!”
료코 씨가 무어라 일본어로 말을 걸자, 미카 사에지마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여기 2층 안쪽 방은 방음이 잘되어 있어서, 굳이 [침묵의 숙녀]를 쓸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진정하세요. 우리는 당신에게 위협을 가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물러서! 저리 가!!”
하지만 역시나 미카 사에지마는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또다시 SP로 흉기를 꺼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료코 씨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사에지마 씨, 일단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 보시고…….”
“저리 가라고 했잖아!!”
“……!”
드디어 미카 사에지마는 SP로 허공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순간 나는 팔을 뒤로 뻗어,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물러서게 했다.
나 혼자만이 뒤로 물러서지 않자, 미카 사에지마는 반사적으로 나에게 단도를 들이밀었다. 난 아까의 난투극 때처럼, 재빨리 단도의 칼날 부분을 손으로 꽉 잡았다.
“뭐, 뭐야…… 당신……!!”
“……두렵고 화가 나는 것은 알겠지만, 일단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차분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뭐야, 무슨 말이야……!”
내가 영어로 말한 덕분에, 미카 사에지마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너무 놀란 나머지 단도를 손에서 놓은 것이 전부였다.
“도, 도대체…… 당신들…… 뭐하는 사람이야…….”
“사에지마 씨, 이분은 한국에서 온 저희 SP 회원이에요. 당신을 도와주려고 특별히 부른 분이죠.”
“뭐야 그게…… 저, 저리 가…… 저리 가라구……!!”
미카 사에지마는, 현재로선 자신의 유일한 보호 수단이라 할 수 있는 SP가,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러고는 더욱 패닉에 빠져든다.
“제, 제발…… 저리 가…… 저리 가 다들…… 저리 가……!”
역효과다. 내가 나서서 사람들을 보호한 것은 좋았으나, 이렇게 되면 오히려 더더욱 대화할 수가 없게 된다.
“다, 당신들…… 나를 어떻게 하려고……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겁에 질린 미카 사에지마가, 귀가 멍멍해질 만큼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뺨을 힘껏 때렸다.

‘짜악’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질 만큼, 미카 사에지마는 힘껏 뺨을 맞았다. 난 내 옆에 서서 미카 사에지마의 뺨을 때린 인물이 누군지 확인했다. 혜은 씨였다.
“이봐, 한마디 해 두겠는데.”
“……!”
“화내든지 겁먹든지, 칼을 빼든지 질질 짜든지 다 좋은데 말이야…… 그건 전후 사정을 알고 나서도 늦지 않아, 바보.”
“네, 네, 네가 뭔데…….”
미카 사에지마는 빨갛게 된 뺨에 손을 댄 채, 혜은 씨를 바라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널 어떻게 할 거였으면 진작 끝냈어. 아직까지 별일 없는 거 보면 몰라? 그러니 왜 별일이 없는지 이유라도 알려고 해 봐. 멍청하게 굴지 말고.”
“…….”
혜은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혜은 씨의 말에 미카 사에지마는 조금 진정된 모양이다.
그건 아마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혜은 씨의 당당한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혜은 씨가 그 이상 나서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므로, 난 손을 뻗어 혜은 씨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 순간이었다. 미카 사에지마가 내 품에 달려든 것은……. 난 칼이라도 들고 덤비는 것이라 생각해 놀랐으나, 그게 아니었다.
“으아아아앙!!”
“…….”
미카 사에지마는, 마치 모두의 눈길을 피하듯이 내 품 안으로 숨는다. 그러더니 맹렬한 기세로 울기 시작한다.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으아아아앙!!”
난 다시금 패닉에 빠져든다. 이럴 거면 차라리 칼을 들고 덤비는 쪽이 대처하기 쉬울 것 같았다.
“현성 씨, 잠깐 가만히 있어 줘요. 실컷 울게.”
혜은 씨가 다가와 그렇게 귀띔을 해 준다. 그리고 료코 씨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손짓을 하더니, 모두를 데리고 방을 나가 버린다.
그렇게 난,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와 함께 방 안에서 단둘이 있게 되었다. 왠지 데자뷰가 보인다.